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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계몽운동

다른 표기 언어 農村啓蒙運動

요약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한 농민·농촌 계발운동. 1920년대 조선의 농촌이 점점 피폐해져가자 그 원인으로 자연재해, 일본의 잘못된 농업 정책으로 인한 곡식 값의 폭락, 농민들의 사치 등을 들어 농촌과 농민을 계몽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계몽운동은 농촌의 문제와 원인을 분석하여 정치적인 제도로 인한 것과 농민들의 자체적인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나누어 후자인 경우라도 개선해 나가자는 취지로 진행되었으며, 나아가 계몽 대상자를 학생과 청년층 등으로 집중하여 개선 효과가 확실히 나타날 것을 기대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교육운동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1930년대에 일본이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면서 농촌계몽운동은 중단되었다.

개요

이 운동은 한말 계몽운동에 역사적 맥락을 두고 있다.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 기조

한말 문명개화론자들이 중심이 된 식산과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문화운동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방안으로 계승되었다.

농촌계몽운동은 특히 3·1운동 후 일제의 문화정책(민족분열정책) 실시와 더불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농촌피폐의 원인으로 자연재해로 인한 한발·홍수, 일제의 농업정책의 오류로 인해 발생된 곡가폭락, 공과금 부담의 과중, 농자금의 핍박, 고리대, 소작제도의 모순, 농촌지도자의 결핍, 농민들의 사치풍조, 음주 등을 들었다. 이러한 분석에 입각해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토지혁명과 같은 것은 '공상론'이라 규정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농촌문제의 대책을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 것과 위정당국자가 해결할 것으로 나누고, 위정자가 해결해야 할 근본문제는 토지분배문제로 이는 논의조차 할 수 없으므로 고식적인 현상유지책이나마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의 농촌구제대책은 농민교화, 민풍개량, 소비조합 경영, 위생상태 개선 등으로 요약되며, 농촌교화·농민계몽의 주도층을 학생·청년층 또는 인텔리겐치아층으로 설정하여 실시했다.

역사적 의의

농촌계몽운동은 일제강점기 조선 농촌사회의 현실적 문제점과 폐해, 그리고 농민의식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 민족주의 계열의 농촌운동이었다. 주로 협동조합운동·농촌교육활동 등을 통한 농촌경제의 향상과 농민사상의 계몽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민족교육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부터 농업공황 타개책의 하나였던 일제의 관제운동인 농촌진흥운동의 실시와 일제의 탄압으로 일체의 합법적인 농촌계몽운동 조직의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천도교의 농촌계몽운동

개요

천도교 계열의 조선농민사는 귀농운동·농민야학·공생조합운동 등을 통해 대대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실시했다.

귀농운동

조선농민사는 기관지 〈조선농민〉을 통해 해마다 7·8월호에 귀농학생에게 계몽운동을 권장하는 글을 실어 농촌계몽의 중요성을 호소했으며, 1926년 7·8월호를 귀농운동으로 편집했다가 원고 전부를 압수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후 귀농운동이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졌다.

이때 많은 잡지에서 귀농운동 특집을 내면서 농촌야학의 실정을 알리고 방학을 맞은 학생들에게 헌신적 봉사를 호소했다. 그리하여 방학이면 민족운동에 불타던 당시의 학생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농사와 가사를 돕고 강연회 및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는 물론 농민사상을 계도하고 지식을 보급했다. 그들 중 일부는 고향에서 농민운동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농민야학과 공생조합운동

농민야학은 1920년대 중반에 많이 설립되었고 청년과 학생이 교원이 되어 무보수로 봉사했다. 야학당은 과거의 서당이나 큰 집을 빌려서 쓰기도 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회관을 건립해 경영하기도 했다. 특히 농민이 야학회 혹은 수양회를 만들어 공동으로 품을 팔아 회관을 건립해 경영한 경우도 있었다.

한편 농촌의 조합경제 수립과 농민의 협동생활을 권장할 목적으로, 1931년 조선농민사 내의 알선부를 독립시켜 농민공생조합(農民共生組合)을 조직했다. 1932년 6월 통계에 의하면 181개 조합, 3만 7,962명의 조합원, 24만 5,571원의 조합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평양공생조합의 '농'표 고무공장, 의주공생조합의 옥수수공동판매장, 정주공생조합의 현미공장, 연변조합의 명주공판장, 순천조합의 밀·수수 공판장, 상원조합의 밤공판장 등이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농촌계몽운동

브나로드 운동

'브나로드'(vnarod)란 러시아 말로 '민중속으로'라는 뜻인데,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귀족청년과 학생에 의해 전개된 농촌운동이 브나로드 운동이다.

이것을 본떠 1931년 동아일보사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그 용어가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1931년 시작한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은 1933년 계몽운동이라 개칭하고, 1935년 여름 제5회 운동을 계획하던 중 총독부 경무국의 명령으로 중지당했다. 계몽대는 고보 4·5학년과 전문학교 학생으로 구성되었으며, 학생계몽대·학생강연대·학생기자대 등이 있었다. 이들 조직은 각 지방에 나아가 한글·산술을 가르치고 위생·음악·연극 등을 지도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31~34년까지 강습대원수 5,751명, 강습지 1,321개 지역, 수강생수 9만 8,598명이 참여했다. 농촌계몽운동은 당시 우리나라 어느 학교 학생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문자보급운동

문자보급운동은 문맹퇴치운동 내지 한글보급운동이다.

조선일보사의 문자보급운동이 대표적인 것으로 1929년 여름부터 1934년까지 6년간 실시했다. 이때 참가한 학생은 1929년에 409명, 1930년에 900여 명으로 46개교 학생이었다. 조선일보사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가르치자 나 아는대로'라는 구호가 박힌 〈한글원본〉이란 책을 배포했고, 1930년 문자보급가까지 공모해 신년호에 발표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 조선어학회에서도 1931년 전국순회 조선어강습회를 열었다.

그리스도교의 농촌계몽운동

그리스도교 계열의 농촌계몽운동은 주로 기독교청년회(YMCA)가 주도해갔으며, 조선농촌의 궁핍한 현실과 민족주의 운동의 민력양성으로의 방향전환, 사회주의의 도전과 그 영향, 국제 YMCA를 통해 유입된 사회복음운동의 영향 등을 배경으로 농촌사업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YMCA농촌사업의 방향에 대해 총괄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신흥우로 그는 농촌문제 해결방안으로서 공업화를 통한 농민전업, 유상매상·유상분배의 점진적 토지개혁, 농사개량, 축산 및 가내수공업 부활, 협동조합을 통한 농민생활의 조직화를 내세웠다.

1925년 11월 YMCA를 개편하여 연합회 내에 농촌부와 도시부를 신설하고, 중앙(서울 YMCA)·선천·함흥·대구·광주·신의주 등 6개 도시의 YMCA가 농촌운동을 벌여갔다. 한편 YMCA 국제위원회는 협약에 따라 1925년부터 에비슨·쉽·번스·클라크 등을 차례로 파견해 농촌계몽사업을 지원했다. 농촌사업의 내용은 주로 선교활동·한글보급·보건교육·부업 및 농사개량에 대한 교수와 강연(과수재배·시비법·원예·양잠·임업·농기구 사용관리) 등이었다. 이러한 농촌계몽사업은 YMCA에서 주관한 산업신용조합운동을 통해 진행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 YMCA 농촌사업은 장로교·감리교 양 교파와 각 선교단체와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1928년에 국제선교협회(IMC)의 예루살렘 세계선교대회의 결과였다. 1930년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농촌부를 신설하고 현재 사업은 진행중인 YMCA 농촌부와 협동할 것"을 결정했고, 양 교파 선교사로 구성된 선전부 농업전문가회가 탄생했다. 이로부터 YMCA와 각 교파연합으로 농민강습회가 개최되었고, 1929~34년 60여 개의 강습회에 7,200명의 학생을 수용했다.

이와 더불어 YMCA는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해 신촌의 고등농민수양소, 광주의 농촌실습학교 등에 주력해갔다. 신촌 고등농민수양소는 YMCA 연합회가 연희전문학교의 땅 1만 2,000여 평을 빌려 덴마크의 그룬트비가 세운 고등농민학교와 같이 농촌재건의 일꾼을 양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수양소는 전국에서 유능하고 열성적인 청년들을 선발하여 1931년 11월부터 교육을 시작했으며, 보통 4~5개월 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광주의 농촌실습학교는 광주 YMCA에 의해 1933년부터 약 20명으로 출발한 2년제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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