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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0~30년대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농촌운동단체.
1925년 10월 29일 서울 기독교청년회에서 천도교청년당의 김기전(金起田)·이돈화(李敦化) 등과 도쿄[東京] 유학생 이성환(李晟煥), 〈동아일보〉의 선우전(鮮于全)·박찬희(朴瓚熙), 〈조선일보〉의 김준연(金俊淵)·유광렬(柳光烈), 〈시대일보〉의 김현철(金顯哲), 변호사 이창휘(李昌輝), 최두선(崔斗善) 등이 한국 농민의 교양과 훈련을 목적으로 창립했다. 이밖에 창립예비모임에는 홍명희(洪命熹)·이순탁(李順鐸)·안재홍(安在鴻)·차상찬(車相瓚) 등이 참여했다. 조직은 사우제(社友制)로 하여 사우는 연 1원씩 부담하며,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부·사우회를 두며, 기관지 〈조선농민〉을 매월 발행하기로 했다.
초대 중앙이사회장은 이성환이 선출되었으며, 주요활동은 소비조합운동 등 계몽운동이었다. 1927년 8월 15일 중앙이사회에서 지방에서 농민운동의 통일을 위해 각 군에 사우회연합회를 설치했다. 1928년 2월 본격적인 농민운동단체로 개편하기로 하고,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농업노동자 등을 조직의 기초로 하며 리·면·군·전국의 4중 형태로 농민사를 만들어 민주적 중앙집권제로 운영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158개의 지부농민사와 전사원 1만 6,570명으로 구성되고 만주지역까지 조직이 확대되었다. 같은 해 4월 6일 제1차 전조선대표대회를 개최했으나, 대부분 각지의 천도교 조직이 참여하는 등 종교적 성격이 뚜렷했다. 이어 1929년 4월 4일 제2차 전조선대표대회를 개최했으나, 천도교청년당 문제로 내부분열되어 유산되고 말았다. 1930년 4월 6일 열린 제3차 전조선대표대회에서 단체의 지도권·운영권이 천도교청년당으로 가게 되자, 이성환 등 비천도교 농민사원들은 조선농민사를 탈퇴하여 따로 전조선농민사를 조직하고 1931년 1월 17일 전조선농민사를 전조선농민조합으로 개칭했으나 그 세력은 계속 약화되었다. 반면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농민사는 기관지 〈농민〉을 새로 발행하고 이사장에 박사직(朴思稷)을 선임했다. 농민사는 농민의 지식향상·복리증진·세력확장 대책을 담은 '3대정책'을 발표하고 천도교의 이념 실현을 위한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1931년 4월 농민공생조합(農民共生組合)을 설치하고, 연 8회 잡지 〈농민세상〉의 간행과 부단한 순회교육 등으로 대중적 기반을 강화했다. 그리하여 1933년 9월 사원총수 4만 1,057명, 군농민사 134개소로 조직이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사원들은 주로 천도교도들이 많은 서북지방에 몰려 있었고, 자작농과 소작농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1930년대 초 농민사의 운동 내용은 간행물과 강연을 통한 계몽운동, 농민야학, 공생조합, 공동경작 등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농업공황의 영향과 일제의 탄압·회유 정책, 천도교 신파의 친일화 등으로 세력이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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