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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 내의 기독교청년회(YMCA)들을 총망라한 전국 기독교 청년운동 단체.
국제적으로는 한국 YMCA를 대표하며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 YMCA연맹에도 가입되어 있다.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로 조직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기독교에 최후의 기대를 건 애국청년들과, 언더우드·아펜젤러 등의 초창기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과 청원으로 1901년 북아메리카 YMCA의 국제위원회는 질렛을 창설 전문간사로 파견했다. 1903년 10월 28일 창립총회를 갖고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발족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최재학·김규식 같은 몇몇 한인 지도자가 활동했으나 곧 이상재·윤치호 등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대거 가입하여 YMCA는 독립협회 운동의 후신 역할을 했다. 1908년 현재 YMCA의 부지인 종로2가에 3층짜리 현대식 건물을 준공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전국민이 비통해 있을 때 학생들의 연합하령회 등을 개최하여 민족정신 함양과 국민계몽으로 광복을 기약·다짐하는 한편 학생청년조직을 확대·강화해나갔다. 이에 일제는 105인사건을 날조하여 윤치호·이승훈·양전백 등 YMCA 지도자를 주모자로 검거하고 학생 YMCA 회원들을 모두 검거했다. 105인사건 이후로 대부분의 YMCA 지도자가 검거되거나 해외 망명길에 오르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1914년 다시 국내의 여러 YMCA 조직을 규합하여 조선기독교 청년회전국연합회를 조직했다. 3·1운동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그 뒤를 이은 일제의 문화정책기를 통해 YMCA는 그 조직망을 전국적으로 공고히 했다. 1921년부터는 기관지 〈청년 靑年〉을 월간으로 발행했고, 평양 YMCA 총무 조만식을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과 금주·단연·절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 동안 YMCA는 농민협동조합·소비조합·저축조합·야학 등을 세우는 한편 농민의 생활 향상, 의식개발, 단결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일제 말기의 탄압과 회유 등으로 서울 YMCA를 제외하고 모두 폐쇄되었던 YMCA는 8·15해방 후 재건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타격을 입었다. 1955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으로 개칭하면서 재조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사업으로는 선교사업을 비롯하여 사회교육사업, 농촌사업, 국제교류활동, 체육사업, 출판사업, 지도력개발사업, 캠프 야외활동 등을 벌이고 있으며 사회 각 방면에서 민간 단체들과의 결속을 통해 건전한 시민사회 형성에 힘쓰고 있다. 한국기독교학생총연맹·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한국군인복지연합회 등의 국내 협력기관과 세계YMCA연맹, 아시아 지역 YMCA협의회 등의 국제협력기관이 있으며 전국 50여 개 도시에 10만여 회원이 있다. 2000년 현재 이남주(李南周)가 사무총장으로 있으며,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에 본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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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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