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그리스도교의 농촌계몽운동

다른 표기 언어

그리스도교 계열의 농촌계몽운동은 주로 기독교청년회(YMCA)가 주도해갔으며, 조선농촌의 궁핍한 현실과 민족주의 운동의 민력양성으로의 방향전환, 사회주의의 도전과 그 영향, 국제 YMCA를 통해 유입된 사회복음운동의 영향 등을 배경으로 농촌사업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YMCA농촌사업의 방향에 대해 총괄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신흥우로 그는 농촌문제 해결방안으로서 공업화를 통한 농민전업, 유상매상·유상분배의 점진적 토지개혁, 농사개량, 축산 및 가내수공업 부활, 협동조합을 통한 농민생활의 조직화를 내세웠다.

1925년 11월 YMCA를 개편하여 연합회 내에 농촌부와 도시부를 신설하고, 중앙(서울 YMCA)·선천·함흥·대구·광주·신의주 등 6개 도시의 YMCA가 농촌운동을 벌여갔다. 한편 YMCA 국제위원회는 협약에 따라 1925년부터 에비슨·쉽·번스·클라크 등을 차례로 파견해 농촌계몽사업을 지원했다. 농촌사업의 내용은 주로 선교활동·한글보급·보건교육·부업 및 농사개량에 대한 교수와 강연(과수재배·시비법·원예·양잠·임업·농기구 사용관리) 등이었다. 이러한 농촌계몽사업은 YMCA에서 주관한 산업신용조합운동을 통해 진행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 YMCA 농촌사업은 장로교·감리교 양 교파와 각 선교단체와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1928년에 국제선교협회(IMC)의 예루살렘 세계선교대회의 결과였다. 1930년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농촌부를 신설하고 현재 사업은 진행중인 YMCA 농촌부와 협동할 것"을 결정했고, 양 교파 선교사로 구성된 선전부 농업전문가회가 탄생했다. 이로부터 YMCA와 각 교파연합으로 농민강습회가 개최되었고, 1929~34년 60여 개의 강습회에 7,200명의 학생을 수용했다.

이와 더불어 YMCA는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해 신촌의 고등농민수양소, 광주의 농촌실습학교 등에 주력해갔다. 신촌 고등농민수양소는 YMCA 연합회가 연희전문학교의 땅 1만 2,000여 평을 빌려 덴마크의 그룬트비가 세운 고등농민학교와 같이 농촌재건의 일꾼을 양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수양소는 전국에서 유능하고 열성적인 청년들을 선발하여 1931년 11월부터 교육을 시작했으며, 보통 4~5개월 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광주의 농촌실습학교는 광주 YMCA에 의해 1933년부터 약 20명으로 출발한 2년제 학교였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그리스도교의 농촌계몽운동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