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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0년 4월 1일 창간한 일간신문. 〈동아일보〉는 민족자본으로 출발하여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민족신문으로 자리를 굳혔다. 1940년 8월 일제가 강제 폐간함으로써 문을 닫았다가 8·15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1일 중간했다. 1974년 군사독재정권에 맞서다가 백지광고 사태 등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1980년 제5공화국의 언론사 강제 통폐합에 따라 기자 및 종사자들을 해직했으며, 1963년 개국한 동아방송을 한국방송공사에 넘겼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쳐 고도로 성장했다. 신춘문예 공모를 통해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으며, 자매지로는 〈신동아〉·〈주간동아〉·〈여성동아〉·〈과학동아〉·〈어린이동아〉·〈어린이과학동아〉·〈하버드비즈니스리뷰코리아〉 등이 있다.
개관
1920년 4월 1일 창간했다.
창간 당시 체재는 평판 4면이다. 〈동아일보〉는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등이 내건 언론·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사상과 〈매일신보〉 편집장 이상협(李相協), 〈평양일일신문〉의 주간 장덕준(張德俊), 오사카[大阪] 〈아사히 신문 朝日新聞〉 기자 진학문(秦學文) 등이 추진한 민간신문 창간운동을 계기로 전국 412명 주주들에게서 주식을 공모하여 주식회사로 출발했다.
자본금 100만 엔을 목표로 사업에 착수하여 1919년 10월에 〈동아일보〉라는 제호를 결정한 후 1920년 1월 4일부로 총독부의 허가증을 받았다.
김성수·박영효·장덕준 등 발기인 77명을 주축으로 주식을 공모해, 제1회 불입이 끝나기 전에 신문을 발간했다. 주식회사 발기인 대표 김성수, 사장 박영효, 편집감독에 양기탁(梁起鐸)·유근(柳瑾), 주간 장덕수(張德秀), 편집국장 이상협 등이 선임되어 발간을 주도했다.
일제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만이 간행되던 시기에 민족자본으로 출발했고, 그후 박영효에 이어 김성수·송진우·이승훈(李昇薰)·백관수(白寬洙) 등이 사장을 역임하면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민족신문으로 자리를 굳혔다.(→ 대한민국)
일제강점기
창간사에서 '평화주의'와 '인본주의'를 내세웠으며, 사시(社是)로 "①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②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③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라는 3가지를 밝혔다.
그뒤 〈동아일보〉는 민족주의 진영에서 전개한 민족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건립운동 등을 주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 만주에서 발생한 독립군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취재하던 중에 장덕준이 일본군에게 피살당하여 우리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자를 내기도 했다. 1922년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의 고국방문 추진을 계기로 과학진흥운동을 벌였고, 재외동포위문모금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조선의 노래〉를 제정하고 충무공 이순신 유적보존운동을 벌였으며, 문맹퇴치를 위해 농촌계몽운동 '브 나로드(V narod) 운동'을 벌여나갔다.
한국 최초로 공개 여성 경기인 전국여자정구대회를 개최하고, 허정숙·최의순 등의 여기자를 최초로 발탁해 여성 및 주부를 계몽하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보장하려는 여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또 1932년 11월에는 월간 종합지 〈신동아〉, 1933년 1월에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여성잡지 〈신가정〉을 간행했다.
1925년부터는 신춘문예작품을 공모하여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고 문화사업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동아일보〉는 당시의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여러 논문들을 실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으며, 민족의 현실을 반영한 문학작품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해 민족문화의 발전에 공헌했다.
나도향의 〈환희〉, 이광수의 〈마의태자〉·〈흙〉심훈의 〈상록수〉 등 많은 소설과 김기진의 〈가련아〉, 임화의 〈한 톨의 벼알도〉 등의 시와 이광수의 〈중용과 철저〉 등의 논문, 그리고 깊이 있는 문학이론 및 작품평을 실어서 근대문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신춘문예를 통해 윤석중(1925)·김해강(1926)·박아지(1927)·이정구(1932)·황순원(1933)·김동리·정비석(1935)·이광래(1937) 등의 신진 문인들을 발굴하여 일제강점기에 민족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문학을 전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제의 탄압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25일 '평양에서 만세소요'라는 기사로 발매·반포 금지 당한 것을 시작으로 무기정간 4회, 발매금지 63회, 압수 489회, 기사삭제 2,423회 등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그 중 무기정간 처분은 첫째, 1920년 9월부터 1921년 1월까지로 일본 황실의 상징인 3종신기(三種神器)를 비판한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기사를 실은 사건, 둘째, 1926년 3~4월까지로 국제농민조합본부에서 보내온 3·1운동 6주년 기념축사를 게재한 사건, 셋째, 1930년 4~9월까지로 한민족의 항쟁을 고무한 미국 언론인의 서한을 실은 사건, 넷째, 1936년 8월에서 1937년 6월까지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제패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유니폼의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1924년에는 신문사설에 불만을 품은 친일단체 간부들이 당시 사장 송진우와 김성수를 권총으로 협박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사건의 파문이 확산되어 전국적으로 언론·집회 탄압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 〈동아일보〉는 더욱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조선을 전쟁 수행을 위한 인력수급기지와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또 황민화·내선일체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관리들은 민족문화말살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리하여 조선인의 창씨개명과 아울러 조선어 간행물을 '일본어 보급', '용지기근대책', '언론통제'의 미명 아래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하기에 이르렀고, 이때 〈동아일보〉 역시 인쇄기기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강제로 매각당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한편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한때 친일 논조를 펴기도 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이 일본의 덴노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대불경(大不敬) 사건 돌발, 어로부에 폭탄투척, 폐하께옵서는 무사 어환행, 범인은 경성생 이봉창'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봉창의 폭탄투척을 "크게 불경스러운 일"이라면서 "천황 폐하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이외에도 항일독립군을 폭도로 몰거나, 중일전쟁 발발 후 학도병 지원을 선전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 기사를 내보기도 했다.
8·15해방 이후
8·15해방을 맞은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일 송진우 사장을 중심으로 중간(重刊) 했다.
해방 직후 〈동아일보〉는 반공·반탁 노선을 견지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에 앞장 섰다. 그해 12월 30일 좌우익의 소용돌이 속에서 송진우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김성수가 잠시 동안 사장직을 맡았다가 1947년 2월 최두선에게 사장직을 인계하고 체제를 재정비했다. 6·25전쟁 중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신문을 간행했다. 특히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를 반대하는 강한 논조를 펴서 전국 최고의 발행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1955년 3월 대통령에 관한 기사 표제에 '괴뢰'(傀儡)라는 문자의 오식(誤植)이 문제가 되어 해방 후 1차 정간을 당했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는 발행부수 30만 부를 돌파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날로 성장하여 1963년 4월 25일 김상만 발행인의 주도로 동아방송(DBS)을 개국하고, 1965년 4월 〈소년동아일보〉를 창간했다. 1964년 9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된 〈신동아〉를 복간했고, 1967년 11월 〈신가정〉을 〈여성동아〉로 바꿔 복간했으며, 1967년부터 매년 〈동아연감〉을 발간하고 있다.
이런 성장 속에서 〈동아일보〉는 유신헌법을 통과시키려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다가 1974년 12월 광고해약사태가 일어나 해방 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언론을 장악하려는 제3공화국과 집권 공화당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을 비롯한 발행 잡지의 광고주들에게 약 7개월 동안 무더기로 광고 해약을 종용했다. 이로 인하여 〈동아일보〉는 경영상 심각한 위기에 처했으나, 이후 독자들의 수많은 격려 광고에 힘입어 끈질긴 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은 한국언론사뿐만 아니라 세계언론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 경영진은 정권의 압력에 굴복해 자유언론수호를 외친 기자들을 강제 해직했다.
1980년 제5공화국의 언론사 강제 통폐합에 따라 〈동아일보〉는 700여 명의 기자 및 종사자들을 해직하고 동아방송을 한국방송공사에 넘겼다. 이후 〈동아일보〉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쳐 고도로 성장했다. 1972년에 준공한 여의도 사옥에 이어 1986년 8월 광주지사 신사옥, 1987년 부산지사 신사옥, 1992년 10월 충정로 사옥, 1993년 오금동 사옥, 1994년 10월 대구 공장, 1995년 7월 광주 사옥, 1996년 5월 대전지사 사옥, 1997년 6월 안산 공장, 1999년 동아 미디어 센터를 준공했다.
1993년 9월 발행부수가 200만 부를 넘었으며 1998년 1월에는 전면 가로쓰기를 실시했다. 〈신동아〉·〈주간동아〉·〈여성동아〉·〈소년동아일보〉·〈과학동아〉·〈음악동아〉·〈멋〉을 계속 발행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한편 국제학술회의·동아연극상·동아음악 콩쿠르·동아초청음악회 등 문화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황금사자기'로 알려진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야구대회·전국 여자 테니스 대회·동아수영대회·동아국제마라톤 등 각종 체육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1982년부터는 교양교육과 평생교육사업을 위한 동아문화 센터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또한 8·15해방 후에도 꾸준히 신춘문예작품을 공모해 신동문(1955)·정연희(1957)·천승세(1958)·김원호(1962)·최하림(1965)·이가림(1966)·오탁번(1966)·이성부(1967)·송기원(1969)·정희성(1970)·오생근(1970)·김홍규(1971)·한수산(1972)·이동순(1973)·조남현(1973) 등 시·소설·평론 각 분야에 걸쳐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여 한국 현대문학 발전에도 공헌하고 있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여러 소설들과 동아문화 센터의 창작교실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한 작품활동도 우리 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2001년 4월 현재 김병관이 회장, 김학준이 사장을 맡고 있다.
납입자본금은 150억 원이고, 총 발행주식수는 300만 주이다. 지역별 판매비율은 수도권 63%, 지방 37%이며 매주 약 296여 면(일 40~56면)을 발행하고 있다. 사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의 구사옥과 충정로의 신사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여의도 별관 및 오금동 사옥이 별도로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전국지의 하나로서 전국 각지에 지사와 지국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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