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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반란

다른 표기 언어 peasants' revolt , 農民叛亂

요약 고대·중세 시대 농민이 기존의 사회질서나 지배층의 폭정에 대항하여 일으킨 봉기.

역사용어로서 농민반란은 농민혁명, 농민전쟁과는 구분되는 용어이다. 근대사회를 성립시킨 시민혁명과 연계하여 발생한 농민봉기를 농민혁명, 봉건사회 해체기에 일어나 혁명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농민봉기를 농민전쟁이라 부르고, 농민반란은 전근대사회의 발달과정에서 발생한 농민운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14~15세기를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발생했던 농민봉기를 일컫는 반면 동양에서는 통일왕조 성립 이후 발생한 대규모의 민중봉기를 모두 농민반란으로 취급하고 있다.

유럽의 농민반란

중세시대를 통해 영주권력의 횡포에 항거하는 농민들의 봉기는 많았다. 그러나 이전에는 개별 영주에 대한 1회적인 것이 많았고, 14세기 이후 집중적이고 대규모로 발생해 플랑드르,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14세기 이후, 독일에서는 15세기 초반 이후, 러시아에서는 17세기 이후에 많은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발생시기와 양상, 직접적 계기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봉건지대와 농노제를 축으로 한다. 이 시기는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고 이와 결합하여 농민층이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로 농민의 성장을 억압하는 영주권의 갖은 제약, 부역제에 기초한 농노제의 가혹성, 농민간의 계층분화가 원인이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흑사병에 따른 인구감소와 농민의 저항에 대항하기 위해 영주층이 실시한 부역제 강화 등의 봉건반동정책이 반란을 촉발하기도 했다. 영주권의 문제를 넘어서 국가의 과중한 조세징수에 대항하여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의 반란규모가 가장 컸다. 1358년 자크리(Jacquerie)의 반란,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17~18세기 절대왕정 아래서도 이런 봉기가 여러 차례 발생했다. 사회분화가 진전됨에 따라 흉년·물가앙등을 계기로 빈농, 도시빈민들의 폭동이 영주·지주·부호·곡물상인에 대한 공격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농민반란은 진행과정에서 폭동과 학살을 수반하기도 했으며,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이었다. 무장도 곤봉이 주가 될 정도로 열악했다. 이들은 국왕과 영주의 군대에 의해 모두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농민반란은 유럽 봉건제의 질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농민반란을 계기로 영주제의 재편성, 국왕권의 강화가 나타났으며, 노동지대의 화폐지대로의 이행, 구래의 예속적인 농노제에서 영주와 농민간의 봉건적 계약관계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중국의 농민반란

중국에서는 진(秦) 왕조 성립 이후 청말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농민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중국의 농민반란은 실제로는 농민을 필두로 수공업자, 염업노동자, 운송노동자, 유민 등 각 계층이 참여한 민중항쟁이었다. 대체로 사회체제의 모순에 의해 부의 편중현상이 심해지고, 토지를 잃은 농민이 증가하며, 전제왕조의 수탈과 국가체제의 문란이 심화되었을 때, 이의 시정, 토지의 균분, 귀천의 철폐 등을 외치며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때로 황건(黃巾)의 난, 백련교도의 난과 같이 종교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하고, 반원, 멸만흥한(滅滿興漢) 등 이민족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운동과 결합하기도 하나 그 근본은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항쟁이었다. 중국의 농민반란은 한 왕조의 말기에는 반드시 거대한 농민반란이 발생한다고 할 정도로 규모와 연속성에서 세계사에서 특출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것들로는 진의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BC 209~208), 왕망(王莽) 정권 하의 녹림(綠林)·적미(赤眉)의 난(17~27), 한말 황건의 난(184~205), 당의 황소(黃巢)의 난(875~884), 송의 왕소파(王小波)·이순(李順)의 난(993~995), 원의 홍건의 난(1351~67), 명의 등무칠(鄧茂七)의 난, 유육(劉六)·유칠(劉七)의 난(1510~12), 이자성(李自成)·장헌충(張獻忠)의 난(1627~46), 청의 백련교의 난(1796~1805), 그리고 근대적 농민전쟁으로도 분류하는 청말 태평천국의 난(1850~64) 등이 있다.

농민반란의 구호는 실현되지 않고 농민반란의 지도자가 수립한 정권은 다시 전제왕권으로 돌아갔지만, 농민반란은 기존 사회체제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례로 황소의 난은 장원제를 기반으로 하는 당의 귀족세력을 몰락시키고 지주제에 기초한 사대부 계층의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송·명대에 지주제가 발달함에 따라 이후의 농민반란은 지주제의 모순에 항거하는 순수한 농민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해지고, 농민의식을 계속 고취시켰다. 송대에는 대규모 반란 외에도 전호(佃戶) 농민의 소작료 거부와 항조운동(抗租運動)이 발달했으며 명대 지주제와 농촌에 침투한 은경제(銀經濟)의 결합에 의해 급속히 몰락한 소농을 축으로 한 수차례의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이것들은 근대적 농민전쟁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한국의 농민반란

사료에 기록된 최초의 대규모 농민반란은 9세기말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농민반란이다. 이것은 신라의 지배체제를 마비시키고 후삼국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2번째는 고려 중엽인 12~13세기이다.

대토지겸병의 발달과 이자겸의 난부터 무신난으로 이어지는 중앙정계의 혼란에 따른 국가기구의 부패에 따라 전국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반란은 문신정권의 부활을 기도한 조위총(趙位寵)과 결합하기도 했으나 보통 차별대우를 받던 서북면 지역주민이나, 천민촌락인 향·소·부곡, 그리고 노비가 주동이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고립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

후기에는 반란군간의 연대가 일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중앙에 최씨정권이 들어서고 이어 원의 침략과 지배가 시작되면서 원과 고려정부의 군대에 의해 농민반란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향·소·부곡의 철폐, 노비제의 개선, 군현제와 외관제 정비 등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초래하여 중세사회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조선 전기에는 조사의(趙思義)의 난,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결합한 함경도 농민들의 봉기,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이몽학의 난이 유명하나 이전과 같은 전국적인 위기상황은 없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지주제의 발전과 부세제도의 문란에 따른 소농민의 몰락이 가속되어 갖가지 분쟁은 계속 발발했으며, 이들과 봉건정부 지주층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이것은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 1862년의 전국적인 민란,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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