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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오는 동포들이 수십만에 달해 서간도 각지에 산재하던 의병 영수, 보약사, 향약계, 농무계, 포수단 등의 대표 560여 명이 모여 단일기관으로 대한 독립단을 조직했다. 대화사에 본부를 두고 지방조직을 갖춘 뒤 독립군의 편성과 훈련에 주력했다. 중앙본부의 주요 요인들은 1910년 전후의 의병장들이었으며, 3~4명을 1대로 한 결사편의대로 국내에 진격하여 일본 군경과 친일파를 숙청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발족 당시 조선왕조 복위에 뜻을 둔 단체였으나, 참모부장 조병준이 평안북도 독판이 되면서부터 상해 임시정부를 상부로 추대하게 되었다. 1920년 12월 한족회·청년단연합회와 합류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사령부에 통합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로부터 만주로 건너오는 동포들이 수십 만에 달해 서간도 각지에 산재하던 의병 영수, 보약사(保約社) 대표, 향약계(鄕約契) 대표, 농무계(農務契) 대표, 포수단(砲手團) 대표 등 560여 명이 모여 각기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독립쟁취를 위한 단일기관으로 대한독립단을 조직했다.
대화사에 본부를 두고 퉁화[通化]·싱징[興京]·린장[臨江]·지안[輯安]·환런[桓仁]·콴톈 현[寬甸縣] 등지에 총관(總管)·지단(支團) 등 지방조직을 갖춘 뒤 독립군의 편성과 훈련에 주력했다. 중앙본부에는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군사부장 전덕원(全德元), 참모부장 조병준(趙秉準),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강세헌(康世憲), 서무 김일(金一), 고문 안병찬(安秉瓚)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910년 전후의 이름있던 의병장들이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반대하고 전왕조에 충성을 다하려는 복벽적인 성격을 띤 위정척사계열이었다.
또한 의병전쟁 당시 게릴라 전법의 경험을 살려 3~4명을 1대로 한 결사편의대(決死便衣隊)로 국내에 진격하여 일본 군경과 친일파를 숙청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지방조직으로는 전덕원·김승학(金承學)·백의범(白義範) 등이 평안도와 황해도지역에서, 맹헌규(孟憲奎)·유일우(劉一優) 등은 만주 지안 현·창바이 현 등지에서 활약했다. 국내외 모두 100여 개 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에는 거류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했다.
그해 8월에는 독립군이 1,500명에 달했는데, 독립단 본부에서는 그중 700명을 하얼빈[哈爾濱]에 주둔한 백계 러시아군 부대에 보내어 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또한 9월경에는 연해주에 2개 소대를 보내어 훈련을 받게 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흩어지거나 본단으로 복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12월에는 본부 밑에 4개 중대(제1중대 다시탄[大沙灘], 제2중대 란산[藍山], 제3중대 천싼도오거우[前三道溝], 제4중대 대뉴거우[大牛溝]에 주둔)를 조직하여 남만주 제1사단이라는 군호를 갖게 되었으며, 무송현에 사단본부를 설치했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와 대립하면서 일제기관의 파괴와 군자금 모금을 감행했다. 1919년 12월 전덕원은 이명서·허승택·왕경준·김용포·오학천 등을 인솔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제1차로 용천의 장일갑(張日甲)에게 5,000원, 또 2차로 장한성(張漢星) 부대를 철산·용천 등지로 파견하여, 1,000원을 모금함과 동시에 일제 앞잡이 기관을 공격했다. 또 전덕원이 직접 평양 등지를 10여 차례 왕래하여 군자금 10여 만 원을 보내와 도합 30여 만 원의 군자금을 마련했다.
대한독립단은 발족 당시 상해 임시정부를 반대하고 복벽운동에 뜻을 둔 단체였으나, 참모부장 조병준(趙秉準)이 평안북도 독판이 되면서부터 상해 임시정부를 상부로 추대하게 되었다. 이듬해 3~4월에는 결사대들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 처단에 주력했다. 1920년 6월 파본(坡本) 일본군부대장이 병력을 인솔하여 대한독립단의 근거진인 콴톈 현 샹로거우[香爐溝]로 공격해오자 백삼규는 이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김덕신과 함께 1921년 5월 16일 칭산거우[靑山溝]에서 일군에 체포되어 환런 현 사전쯔[沙鎭子] 산림 속에서 피살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뒤 일제밀정들의 정탐이 심해졌기 때문에 대한독립단은 본거지를 삼원보에서 류허 현 화셰거우[花斜溝] 푸순 성[福順成]으로 옮겼다. 그후 연호문제로 노년층과 청년층이 대립하여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열되었다가, 1920년 12월 한족회(韓族會)·청년단연합회(靑年團聯合會)와 합류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사령부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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