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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노동의 조직화와 분업은 로마 제국 시기에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지만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오히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 후기에 들어 사회적·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쇠퇴로 인해 서부 유럽 대부분은 소규모 경제, 자급자족적인 경제단위로 되돌아갔다. 이때문에 전문생산을 위한 시장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봉건적 사회구조가 새로이 확립됨에 따라 상업과 도시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각 지역 사이의 상업이 되살아났으며 점차 늘어나는 시장의 수요에 답하기 위하여 전문 수공업이 다시 나타났다.
농업·동력·수송·야금·기계 분야의 중요한 기술적 혁신을 통해 전문화의 영역들이 더욱 넓어졌다. 부의 증대, 기업의 확대와 새로운 시민 계급의 출현은 합리적인 생산관리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산업화를 촉진했다.
중세사회의 계급구조는 분업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귀족 계급인 봉건영주는 전사이자 보호자였고 중요한 소비자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의 조직을 담당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은, 다양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농민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조상들이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에 묶여 있는 농노들로서 장원의 영주에게 일정한 노동과 의무를 지고 있었다. 영주는 그 대가로 농노들을 보호했다.
장원의 자급자족적인 성격, 농작물 재배와 가축사육에 기초를 둔 혼합농경의 발전, 바퀴가 달린 무거운 쟁기 및 고정된 마구(馬具)와 같은 기술적인 개량, 토지보유와 소작지 분할체계 등 상호연관된 네 가지 요소들이 중세 농업의 노동조직화를 결정했다.
각 농가는 거의 모든 필수품을 생산했으며 영주가 독점하고 있던 방아간이나 포도 압착기 등을 사용한 뒤 화폐가 아닌 일정 지분의 현물로 대가를 지불했다.
토지에 묶여 있는 농노들과는 달리 도시민들은 신분이 자유로웠다. 일부는 장거리무역을 비롯한 상업에 종사했으며 상인동직조합(merchant guild)과 같은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가장 높은 기술수준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장인(匠人), 중간 수준의 수공업자인 직인(職人), 초보자들인 도제(徒弟)로 구성된 수공업자조합(craft guild)에 속한 소상인이자 수공업자들이었다.
수공업자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율이었다. 특정 수공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을 통제함으로써 수공업자조합들은 노동력의 공급을 제한할 수 있었다. 또한 임금·시간·도구·기술 등에 있어서도 규제를 가함으로써 노동조건과 생산과정을 조절했다. 품질정도와 가격 역시 정해졌다. 그 성격상 독점적인 수공업자조합은 개별조합이든 결합체이든 간에 지역상권을 완전히 지배하려고 했으며 외부인들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공업자조합들은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일부지역에서는 시의회 의원 대다수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만이 아니라 일정한 정치적 지배력까지 장악했다. 점증하는 원료에 대한 요구와 시장의 성장으로 인해 수공업자들은 원료와 시장의 확보를 위해 상업에 치중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나 장인들은 다른 수공업분야의 사람들을 고용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당연히 분쟁이 일어났다.
시장의 확대는 동일 수공업 내의 계급분해를 초래했다.
상업의 기능이 점점 더 중요해졌으며 수공업조직 내부의 특정 개인들에 의해서도 행해지게 되었다. 이들은 상인들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던 수공업자들이었다. 동시에 원래는 상인들만의 대표자였던 상인동직조합이 수공업자조합을 흡수한 뒤 점점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수공업자조합은 내부적으로도 분해되기 시작했다.
장인들은 점점 커지는 시장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직인들을 자신들의 테두리 안에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들을 임노동자로 고용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장인-직인-도제의 관계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변했으며 고용인들이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동안 장인들은 상업에 몰두했다. 이렇게 해서 수공업자조합 체제의 붕괴와 함께 초기 산업체제의 발전을 위한 기초인 원시적인 공장제 수공업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배제된 직인들은 결국 수공업자조합의 규제가 미치지 않는 도시 외부에서 임금을 받고 기술을 파는 자유노동자가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노동조직화는 직물산업분야에서 나타난 '전대제'(轉貸制)라는 새로운 방식과는 크게 달랐다. 직물업자들이 가공되지 않은 양모를 구입하여 농민들에게 제공하면 농민들은 양모를 빗질하여 털실로 만든 뒤 직물을 짰다.
그다음 직물업자는 숙련된 수공인의 도움을 받아 옷감을 완성했다. 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노동하게 되었기 때문에 점점 더 종속적인 지위로 변했다. 반면에 노동은 여전히 가내수공업적 형태로 가정 내에서 행해졌으며 비인격적인 규율아래 공장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작업속도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더구나 직물업자는 실제적인 노동과정을 직접 감독하지 않고 단지 주문내용을 점검하고 일련의 다양한 기술적 과정을 연결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직물을 전대한 직물업자는 전체 생산과정을 감독할 수 있었으며 19세기의 산업자본주의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거대한 전국적 시장의 확립을 통한 상업 규모상의 변화만이 중세의 노동조직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기술의 발전, 특히 풍력과 수력의 이용에서 기인한 변화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수차와 풍차 같은 장치를 통해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의 힘이 대신하게 되었다. 10세기말부터 곡물을 빻는 일에 쓰이던 수차가 가죽 무두질, 올리브유 짜기, 나무켜기, 무기연마, 가루 만들기, 멧돌, 곡물을 이겨서 맥주 만들기 등 여러 가지 산업과정에 이용되었다. 서부 유럽에서 최초의 수평 회전축 풍차가 만들어진 것은 1185년이었지만 단기간 내에 영국 북부에서 중동지방까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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