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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

다른 표기 언어 economic history , 經濟史

요약 인류의 경제생활이 발전해온 역사.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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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경제사학의 체계가 정립되어 왔다. 경제사학은 역사학의 발달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지만, 특히 이론경제학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결과 경제사학의 연구방법이나 연구과제도 대부분 시대별로 당시 경제학의 연구방법과 과제에 따라 규정되어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제사학은 크게 3가지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독일역사학파가 국민경제학의 입장에서 연구한 경제사, 둘째 마르크스 경제학의 유물사관에 기초를 둔 경제사, 셋째 근대경제학에서 특히 경제성장이론과 관련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해온 경제성장사학 등이 주요흐름이다. 그러나 경제사학은 단지 경제이론과의 교류뿐만 아니라 사회학·인류학·통계학 등 다양한 인접학문들의 발달에도 영향을 받아왔다. 또한 영국·프랑스·독일·미국·일본·한국 등 각국의 학문적 풍토나 현실의 정책과제와도 긴밀한 관련을 가지면서 발달해왔다.

경제사학의 발전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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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학의 성립 전사(前史)

경제사 연구의 원류는 17~18세기 영국 중상주의시대이다.

중상주의자들은 상업활동을 통한 국부의 증대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경제사 연구 역시 통화·화폐제도·조세·상업 등의 역사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러한 경향은 당시의 저서들에 잘 나타나 있다. 매덕스의 〈왕실재정의 역사 History and Antiquities of the Exchequer〉(1711)·〈도시과세 Firma Burgi〉(1726) 등은 재정제도의 역사를 다루었으며, 존 스미스가 펴낸 〈양모의 역사적 회고 Chronicon rusticum-commerciale:or Memoirs of Wool〉(1747)에는 양모 및 양모공업에 관한 사료들이 연대기로 실려 있다.

또 애덤 앤더슨의 〈상업의 역사 Historical and Chronological Deduction of the Origin of Commerce〉(2권, 1764)는 고대부터 7년전쟁(1756~63) 종전 무렵까지의 상업사를 연대기로 서술했다. 이들 연구는 모두 경제사가 학문으로 정립되기 이전의 과정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경제사연구 수준과 동일선상에서 논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대의 연구성과들이 이후 19세기의 경제사 연구에 선구적 업적을 남긴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은 경제학을 정치와 종교의 지배에서 독립시켜 하나의 독자적 학문체계로 확립한 획기적 업적이었다.

그러나 스미스의 경제학체계에서는 아직 경제사가 경제이론으로부터 독립된 지위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경제현상을 성장과 동태의 관점에서 파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주요관심사는 '경제인'을 전제로 해서 보편타당한 경제법칙을 탐구하는 데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맬서스·리카도·밀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학파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고전학파 경제학은 경제사 연구에 적극적인 자극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사학은 영국 고전학파에 대한 독일 역사학파의 비판 속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독일역사학파와 경제사학의 성립

독일 역사학파의 토대는 프리드리히 리스트에 의해 마련되었다.

리스트는 저서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 Das Nationale System der Politischen Ökoonomie〉(1841)를 통해, 생산력 개념을 노동생산성에만 국한시켰던 스미스와 달리 모든 요소를 국민적으로 결합한 '국민생산력' 개념을 제시했다(→ 국민경제). 또한 국민생산력이 고도로 발휘되는 것은 경제활동 수준이 야만과 방목의 단계에서 차츰 발전해 농·공·상 단계에 도달한 때부터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무역'이 가능해지며 영구적인 세계평화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리스트는 이러한 견해를 근거로 하여 당시 19세기 중엽의 후진 독일에서 가장 시급한 정책은 취약한 국내공업의 보호·육성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역사학파의 특징은 경제생활을 국민의 입장에서 파악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경제현상들을 통해 귀납적으로 경제발전법칙을 도출하려 했다. 따라서 역사학파 경제학에서는 필연적으로 경제사 연구가 중심을 차지했다.

원래 경제사 연구의 목적은 이론과 정책이 지니는 역사적 제약성을 밝히는 데 있다.

그러나 역사학파의 관심은 경제이론보다는 경제발전단계와 역사사실의 연구에 집중되었다. 특히 구스타프 폰 슈몰러를 중심으로 한 신역사학파는 역사사실에 대한 연구를 보다 정치(精緻)하게 심화시켰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들에 힘입어 경제사학은 크게 발흥해 마침내 경제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역사학파의 경제사 이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경제발전단계설로서,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유형으로 경제발전과정의 단계를 구분했다.

먼저 리스트는 생산과정을 기준으로 해서 '야만(수렵·어로)-방목-농업-농공-농공상'의 5단계로 분류했다. 브루노 힐데브란트는 교환 과정을 기준으로 삼아 '자연(실물)경제-화폐경제-신용경제' 순의 3단계설을 주장했으며, 카를 뷰허는 재화가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전달되는 과정의 장단점을 기준으로 관찰해 '봉쇄적 가내경제-도시경제-국민경제'의 3단계로 경제발전과정을 구분했다.

또한 슈몰러는 정치 조직을 기준으로 연구해 '가족경제-촌락경제-도시경제-연방경제-국민경제-세계경제'로 발전된다는 단계설을 제시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발전단계설은 여러 가지 한계를 드러냈다. 첫째, 단계설은 경제사실과 동떨어져 도식적으로 되기 쉬우며 둘째, 각 단계의 이행과정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동태적 이론이 되지 못한다. 셋째, 발전단계와 발전유형간의 관계도 명확하지 않다. 이들 단점 가운데 일부는 막스 베버의 '이념형', 좀바르트의 '경제체제', 스피토프의 '경제양식' 등 여러 개념을 통해 어느정도 극복되었다.

그러나 발전단계설을 중심으로 한 경제사 연구는 경제이론의 발전선상에서 차츰 멀어져, 결국 독일 역사학파와 함께 막을 내렸다.

마르크스 경제사학

마르크스 경제학. 특히 그 철학적 기초인 유물사관은 경제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관념사관을 계승한 학자들은 정신 또는 국가로 표현되는 이념이 역사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던 것에 반해, 유물사관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에 반대하면서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물질적 생산력이라 규정하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계급투쟁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영향은 경제사 연구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연구방법은 비록 구미에서는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지만 오늘날까지 경제사 연구분야에서 독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Das Kapital〉(1867) 가운데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자본제 지대(地代) 발생사' 두 부분에서 자본주의 발생사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미 1870년대에는 자본주의라는 마르크스주의 개념이 역사연구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 마르크스의 원시공산사회 가설과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hums und des Staats〉(1884) 집필은 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원시사회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정통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노동과 사회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던 사회주의자와 역사가들에 의해 진척되었다.

이들은 모두 마르크스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대표적인 연구성과로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웨브 부부의 〈노동조합주의의 역사 History of Trade Unionism〉(1894)와 토니의 〈16세기 농업문제 The Agrarian Problem in the Sixteenth Century〉(1912) 등을 들 수 있다. 또

한 아널드 토인비는 처음으로 영국 산업혁명을 경제사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면서 산업혁명이 노동자계급에 가져다준 암울한 면들에 주목했다.

그의 저서 〈영국 산업혁명사론 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18th Century〉(1884)은 산업혁명의 선구적 연구업적으로 기록될 만하다.

이밖에도 폴 조지프 맨토우, 해먼드 부부, 홉스봄 등이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에 몰두했다. 좀바르트는 이론과 역사를 종합하기 위해 '경제체제'(Wirtschafts system)라는 독자적 개념을 경제학의 지도적 개념으로 세우고 많은 자료를 동원해 경제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후 좀바르트 자신은 점차 반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섰다.

이처럼 경제사학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찬성 여부를 떠나 그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경제성장사학의 발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사학은 미국을 중심으로 두드러진 발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제사학은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사학'이라고 부르며, 좁은 의미로는 '신경제사학'(new economic history)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사 연구는 기존의 연구과정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경제성장사학의 목표는 근대경제학의 한계학파이론을 역사에 접목시키는 데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근대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역사적 요소를 사상한 채, 주로 정치한 한계분석을 통한 이론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뒤 이들은 차츰 경기순환과 단기적 균형 등에도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이들 문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경제의 사회·정치구조, 기술수준, 설비능력 등의 요소는 주어진 환경으로 간주해 고정불변한 것으로 가정했다. 따라서 이들의 분석방법으로는 역사와 이론이 서로 배치될 뿐 상호교류가 성립되지 못했다.

그러나 전후(戰後) 경제학 연구의 초점은 단기의 정태적(靜態的) 균형문제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성장의 문제로 옮아갔다. 그결과 경제성장론이 등장했으며 근대경제학자들이 차츰 역사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이론과 역사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둘째, 경제성장사학은 이론과 역사의 교류에서 후진국개발을 현실의 공동과제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특히 '해러드-도마 모델'과 같은 근대성장이론을 후진국개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이미 비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후진국의 경제구조가 보여주는 질적인 차이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진국의 상태를 마치 산업혁명 이전의 선진국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공업화 또는 근대화의 문제를 역사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경제학의 수량화를 지적할 수 있다. 경제사와 경제이론이 밀접한 교류를 갖기 위해서는 인구·물가·임금·생산량 등 계측가능한 여러 요소들의 사료(史料)를 정비·수정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계량경제학과 전자계산기의 발달에 힘입어 이미 소실되었거나 빈약한 자료들도 추계해서 계량화하고 재편성할 수 있었다.

그결과 숫자 상호간에 일정한 관계를 도출해내는 새로운 경제사 이론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계량경제사'(econometric history)이다(→ 계량경제학).

넷째, 경제발전 역사의 주체로 기업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점이다. 과거 슘페터는 기업가의 혁신행동을 경제발전 분석의 핵심으로 설정했었다(→ 슘페터). 경제성장사학의 연구자들은 바로 이러한 슘페터의 이론을 발전시켜 거대기업이 지배하는 전후 사회의 구조를 파악했다.

그결과 '경영사' 또는 '기업가사'라 불리는 새로운 경제사 분야가 형성되었다.

지금까지 서술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사의 동향은 경제학·경영학·사회학 등의 경험과학 분야에서 기능분석과 체계이론이 발전하는 데 따른 대응이었다. 따라서 전통적 경제사와는 방법론의 기초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제성장사학의 흐름을 전제로 해서 현대경제사 연구의 성과와 문제점들을 서술한다.

공업화의 발전단계와 유형

개요

경제성장사학은 각국의 공업화 과정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공업화의 정의는 다양해서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을 뜻한다. 또한 공업화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과정에 널리 무생물자원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공업화의 시기를 좁은 의미로 말할 경우 봉건제 해체로부터 산업혁명에 이르는 과도기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의 공업화는 '완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중인 '과정'을 뜻한다. 그리고 공업화 개념은 단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측면까지 포괄한다.

결국 공업화는 총괄적 개념으로서, 자본주의국가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국가들까지 포함하는 근대산업사회의 모든 특징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업화의 경제적 측면을 나타내는 특징으로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 수 있다. 먼저 생산조직이 근대과학기술의 개발 및 응용에 기초를 두고 구성된다는 점, 단위당 실질생산비용의 감소, 인구증가와 농업인구 감소, 경제성장, 무생물자원의 이용, 대량생산·대량소비, 정치·경제적 자유, 상품과 노동,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등 여러 가지 현상을 들 수 있다.

한편 공업화의 사회적 측면을 나타내는 특징들로는 공동체 붕괴, 1차산업 위주의 직업구성에서 2·3차산업 비중의 증대, 사회적 기능의 분화, 근대화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공업화는 경제성장과 근대화과정이 서로 결합하면서 근대산업사회를 형성해가는 동태적 과정이다. 또한 공업화는 18세기 영국 산업혁명에서 출발해 서유럽, 미국, 일본을 거쳐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결국 오늘날 경제사학의 과제는 경험과학의 성과를 충분히 활용해 공업화의 역사과정을 해명하는 일이다.

로스토의 경제성장단계설

'공업화=경제성장'이라는 단계론적 시각의 대표적인 예는 로스토의 성장5단계설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저서 〈경제성장의 제단계 The Stages of Economic Growth:A Non-Communist Manifesto〉(1960)에 제시된 경제성장과정은 전통사회-도약준비기-도약기-성숙기-고도대중소비단계의 5단계로 이루어진다.

로스토가 말하는 전통사회는 고대 및 중세의 농업사회로서 뉴턴 이전의 세계를 가리키며 현재는 미개발국이 이에 속한다. 2번째의 도약준비기란 전통사회로부터 벗어나 지속적인 성장을 준비하는 과도기로서 이때에는 투자율이 인구성장률을 상회하는 수준까지 상승한다.

도약기는 보통 산업혁명시기를 가리키는데 생산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져 마침내 '성장'이 사회의 한 속성으로 정착된다. 한편 성숙기는 도약을 거친 경제가 근대기술의 성과를 흡수해 한층 고도의 발전을 이루는 시기로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고도대중소비단계에서는 내구소비재를 중심으로 해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다.

로스토의 성장단계설은 기존의 발전단계설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우선 이 이론의 목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성장이라는 현실적 과제에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즉 당시 미국과 소련의 경제성장논쟁, 미국의 반공정책, 후진국 개발과 공업화 등 여러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후진국의 공업화 또는 근대화를 '전통사회-준비기-도약기'순의 발전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미·소 성장경쟁을 평가하면서 미국은 가장 먼저 고도대중소비단계로 돌입해 이미 그로부터 탈출하기 시작한 데 비해 소련은 뒤늦게 성숙기를 거쳐 고도대중소비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미국이나 서유럽보다 성장이 뒤진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의 주장에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강하게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로스토의 2번째 특징은 도약기를 공업화에 결정적인 전환기로 중시해 특별히 도약단계에는 측정가능한 수량적 정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는 도약기의 특징으로 먼저, 국민소득 가운데 5% 이하였던 생산투자율이 10% 이상으로 상승해야 하며, 1가지 이상의 제조업부문이 고도로 발전해야 하고, 지속적 성장을 위해 정치·사회·제도의 환경이 정비되어야 한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그는 이 3가지 조건을 각각 수량으로 규정하고 통계자료를 이용해 각국의 도약기를 검증했다. 그의 구분에 따르면 영국의 도약기는 1783~1802년, 미국 1843~60년, 일본 1878~1900년 등으로 그 기간은 대략 20년 정도이다. 그밖에도 로스토는 각 단계의 이행기를 '생산의 동학이론'(dynamic theory of production)으로 설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단계설은 미래사회의 명확한 상(像)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받는다.

거센크론의 공업화 유형론

로스토 이론의 결점 가운데 또 하나는 서구 경제성장을 공업화의 전형이자 유일한 길로 간주한 점이다.

이와 달리 거센크론은 경제발전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공업화 '유형'을 도입함으로써 크게 주목받았다. 그는 저서 〈역사적 전망에 있어서의 경제의 후진성 Economic Backwardness in Historical Perspective〉(1962)에서 19세기 유럽의 공업화 유형을 선진·중진·후진 지역으로 나누고 이 3가지 유형이 일련의 단계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지역적 유형과 단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고찰했다.

우선 영국을 비롯한 선진지역은 공장설립 초기부터 이미 축적돼 있던 부와 서서히 회수되는 이윤으로 자본을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생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반면에 19세기 중엽부터 비약적으로 공업화가 시작된 프랑스·독일 등의 중진지역에서는 은행이 주된 자본 공급원이었다. 더욱이 19세기말경에 이르러서야 공업화를 시작한 러시아 등의 후진지역에서는 국가가 대부분 자본공급의 책임을 맡았다. 결국 중·후진지역들은 영국처럼 공업화의 선행조건을 자생적으로 창출하지는 못했으며 그 부족한 부분을 은행 및 국가가 충당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영국은 후진국 공업화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유럽공업사는 영국 공업화로부터의 조직적 이탈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밖에도 후진경제의 공업화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나타난다. 첫째, 경제가 후진적일수록 공업화는 고도의 자본구성과 기술수준을 갖추고 비약적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소비재공업보다는 생산재공업의 발달에 중점이 두어진다. 셋째, 자본 공급면에서 은행의 산업지배력이 커지고 국가투자가 주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넷째, 후진국 경제성장을 위해 공업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결국 후진경제의 발전에는 다양한 길이 가능하며 그 다양성 속에서 여러 가지 유형을 도출할 수 있다.

신경제사학의 발전

1950년대말부터 미국 경제사 분야에는 일종의 혁명이 발생해 '신경제사학'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급속한 발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성행하고 있는 이 학파는 '계량경제사' 또는 '클리오메트릭스'(cliomertrics)라고도 불린다.

신경제사학의 특징으로는 첫째 수량화·계량화에 큰 관심을 보인다는 것과, 둘째 역사사실에 반하는 허구개념을 이용해 경제사의 가설들을 검증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역사를 수량화하는 시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물가사(史)·인구사 등에서도 행해진 바 있으므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후에는 경제학의 이론적·통계적 모델을 이용해 소실된 자료까지 추계해서 재편성할 뿐만 아니라 직접 계량이 불가능한 것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계량화하는 등 이전의 경제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들을 나타냈다.

역사를 수량화하고 통계이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 가설검증이 역사연구의 큰 과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같은 특성이 신경제사학의 가장 독특한 부분이며 동시에 주된 논쟁의 대상이다. 신경제사학이 설정하는 가설은 과거사실에 반대되는 가정이다. 즉, 과거역사의 비현실적인 모형을 설정함으로써 거꾸로 실제 현실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의 경제적 효과를 측정하는 것이다.

신경제사학 연구는 1957년 A.H. 콘라드와 J.R. 마이어가 논문〈경제이론 및 통계적 추론과 경제사〉를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신경제성장사학의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는 포겔의 저서 〈철도와 미국의 경제성장 Railroads and American Economic Growth:Essays in Econometric History〉(196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19세기 미국경제의 발전에서 철도가 불가결한 요소였다고 보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포겔은 성장이 철도에 의존하는 정도를 추정하기 위해, 어떤 한해의 실제 국민총생산(GNP)과 철도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의 가상 GNP를 비교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철도가 가장 효율적으로 작용한 시점을 1890년으로 설정해 분석대상으로 삼고, 그 다음은 철도가 없었던 것으로 가정할 경우 예상되는 추가비용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마침내 다음의 결론을 얻었다.

즉 "철도가 경제성장에 공헌하긴 했지만 그 영향이 혁명적이라든가 결정적인 정도는 아니었다. 미국의 주요철도가 없었더라도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결론이었다. 포겔은 일종의 신앙처럼 철도가 미국경제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여기는 통념을 미국 역사학계에서 불식시키는 획기적 기록을 남긴 것이다.

역사를 계량화하는 움직임은 경제이론 및 통계이론의 발전에 힘입어 더욱 확산되었다.

특히 '허구설정'방법을 이용한 계량경제사는 이제 역사 연구의 다른 분야에까지 널리 응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구설정방법의 효과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포겔의 경우 철도의 불가결성에 대한 의문제기는 타당하다. 그러나 '철도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아래 논의를 진행하면서도 그가 이용한 자료들은 사실상 철도가 존재하는 현실적 제약 아래에서의 자료였다.

결국 이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즉 허구설정을 통해서는 실증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사실이 정당하다는 논리적 증명만이 가능할 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논리적 증명과정을 경제 및 통계이론에만 의존한다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수량화할 수 없는 비경제적 요인'까지 중시하는 전통 경제사학의 강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계량경제사의 연구방법은 경제사의 특정 분야에만 적용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계량경제사의 강점과 한계를 모두 인식한다 할지라도, 과연 허구설정으로 도출된 것을 역사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히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경영사의 발전

영국의 언윈과 독일의 뢰펠홀츠로 대표되는 유럽 경영사연구는 독자적인 성격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다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것은 미국의 경영사였다. 경영사연구의 학문적 기초를 세운 사람은 1927년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의 경영사강좌 초대 주임교수였던 N.S. 그라스이다.

좀바르트와 언윈의 연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1920년대 거대기업의 세력확대에 힘입은 경영학의 발전 속에서 대표적인 저서 〈기업과 자본주의:경영사입문 Business and Capitalism:An Introduction to Business History〉(1939)을 집필했다. 그라스는 이밖에도 많은 저서와 논문을 통해 그동안 경제사가 거의 무시해온 사기업의 관점에서 경영사의 독자적 성격을 찾아냈다.

그는 경영사란 기업을 조직·통제하는 경영·관리에 대해 경영자와 기업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역사라고 정의했다. 또 경영사의 구체적 내용은 경영조직, 경영, 관리, 경영이념, 경영법, 경영제도 등의 역사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그라스의 경영사학을 한층 더 완성시킨 학자는 H.M. 라손이다.

그녀의 대표적 저작으로는 〈경영사입문 Guide to Business History〉(1948)이 잘 알려져 있으며 또 하버드대학교의 경영사강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구성과가 〈하버드 경영사총서〉로 간행되어 지금까지 20여 권이 출간되었다.

기업가사학의 발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영사는 그라스로 대표되는 개별기업사의 특성을 보였던 반면, 전후의 경영사는 기업과 기업환경의 관련, 또 경제발전 주체로서 기업가가 부여받은 역사적 역할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경영사는 일반적으로 '기업가사학'이라 불리게 되었다. 1940년 미국경제사학회 발족 당시 경제사 연구의 주요과제로 설정되기도 했던 기업가사 연구는 1949년 하버드대학교에 설립된 '기업가사연구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연구활동이 이루어졌다.

한편 기업가사 연구의 성립배경은 그라스 계열의 경영사 연구로부터 발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시 하버드대학교 교수였던 슘페터의 '기술혁신론' 또는 '기업가론'에 기초를 두고 비판적으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기업가사 연구를 추진한 대표인물은 미국 경제사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아서 해리슨 콜이었다. 그는 또 기업가사연구소의 창설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콜의 대표적 저서로는 〈경영과 사회:기업가사학 서설 Business Enterprise in its Social Setting〉(1959)이 있다.

이 저서는 그가 오랫동안 몰두했던 기업가사연구의 이론적·실증적 성과들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기업가사학의 원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콜은 이 책에서 경제성장이론과 역사 사이에 교량을 놓으려 했다. 자본주의가 발전됨에 따라 소유와 경영이 차츰 분리되면서 자본가와는 별개의 인격체인 기업가의 기능이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콜은 기업가가 자본가처럼 이윤극대화의 동기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님을 발견했다.

콜은 기업규모의 확대, 업적, 권력, 공공봉사 등 다양한 동기가 오늘날 기업활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기업가의 활동목적이나 성공의 척도는 결국 화폐적 이익과 이윤율이지만, 이들 목표를 달성하는 일은 기업을 둘러싼 경제·정치·사회 환경과의 관련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은 자기이익만을 추구할 수 없고 시민사회의 요구와 복지 등을 고려하는 조화로운 사회환경 속에서 유지·존속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콜의 기업가 연구는 근대경제사의 중심상(像)에 대한 연구이다. 그는 기업가 활동의 역사적·실증적 연구가 3가지 측면의 사회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첫째 기업가를 둘러싼 조직, 둘째 기업가의 변화과정 내지 기업가 단위의 상호작용, 셋째 기업가의 경제·문화적 환경 등이었다.

이러한 콜의 연구방법은 기업가에 대한 비교사적·유형론적 연구를 촉진시켰다. 즉 그것은 기업가 활동에 현저한 국제적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기업가의 성격이 어떻게 그 차이를 유발시키는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콜은 각기 상이한 사회체제의 성격이 기업가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째, 그 사회의 변화수용능력이 중요한 요인이다. 즉 혁신이나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인가 아닌가 하는 점에 따라 다른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계층구조나 신분제도 등 사회의 이동성을 그 1가지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이윤추구 및 경영활동에 대한 허용 여부도 기업가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3가지 전제조건이 모두 충족된다 해도 각국의 사회체제나 문화환경의 차이로 인해 여전히 기업가활동에서는 다양한 특성이 표출된다. 따라서 각국 기업가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층 더 깊은 사회·문화·경제의 요인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처럼 콜의 기업가사 연구는 기업가가 근대적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역사주체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에 주목했으며, 더 나아가 후진국개발이론을 기업가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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