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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영국의 사회주의 경제학자 부부.
정식 이름은 각각 Sidney James Webb, Baron Passfield of Passfield Corner, Martha Beatrice Potter Webb.
개요
페이비언 협회의 초기 회원으로 런던 정치경제대학을 공동으로 설립했다.
시드니 웨브는 런던대학교를 교육기관의 연합체로 재조직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노동당원으로 정부에 봉사했다. 탁월한 역사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개혁의 선구자인 웨브 부부는 영국의 사회사상과 제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비어트리스 포터 웨브의 초기생애
비어트리스 포터는 글로스터에서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습관적으로 명령하는'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실업가인 리처드 포터와 리버풀 상인의 딸인 라우렌시나 헤이워스의 8번째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후에 연 1,000파운드의 개인소득을 그녀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비어트리스는 다소 외롭고 병약한 소녀로 성장했으며, 광범한 독서와 아버지의 방문객과의 토론을 통해 독학했다. 아버지의 방문객들 중에서는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가 그녀에게 지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의 언니들은 인습적인 결혼을 했으며, 그녀 자신도 만약 성격 차이로 절교하는 일이 없었다면 나이가 훨씬 많은 자유당 소속 정치가인 조지프 체임벌린의 3번째 아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전부터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몸담고 있는 사업세계의 여러 전제들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랭커셔의 조그만 마을에 있는 먼 친척집에 머무르면서 그녀는 노동자계급의 협동조합 운동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체임벌린과의 관계가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자 그녀는 런던으로 가서 사회사업에 참여했고, 곧 빈곤문제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자선기관의 부적절한 조치들의 실패를 비판했다.
그녀는 선박소유주이자 사회개혁가인 사촌 찰스 부스의 기념비적인 논문 〈런던 사람들의 삶과 노동 The Life and Labour of the People in London〉의 집필을 도와주면서 하층계급생활의 현실을 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
1891년 그녀는 랭커셔에서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영국의 협동조합 운동 The Cooperative Movement in Great Britain〉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훗날 고전적인 저작이 되었다. 그녀는 빈곤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든 조직, 즉 노동조합에 대해 보다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초기의 경제적 조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녀는 '정보의 보고(寶庫)'인 시드니 웨브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조언을 듣고, 1890년에 웨브를 만나게 되었다.
시드니 웨브의 초기생애
시드니 제임스 웨브는 런던의 중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유계약직 회계사였고, 어머니는 상점 점원이었다. 그는 16세가 되기 전에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야간학교에 계속 다녀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3년 후인 1884년에는 변호사자격시험에 합격했다. 한동안 그는 젊은 기자인 버나드 쇼의 절친한 친구였다. 1885년 버나드 쇼는 웨브에게 페이비언 협회라는 새로 창설된 조그만 사회주의자 단체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쇼는 이 협회가 사회주의를 이론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웨브의 광범하고 사실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1887년 웨브는 협회를 위해 〈사회주의자들을 위한 사실들 Facts for Socialists〉이라는 소책자의 제1판을 저술하여 쇼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이 소책자는 산업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것이 그 사회를 개혁시켜나가는 데 필수적인 첫걸음이라는 페이비언의 확신을 최초로 간명하게 표현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말까지 개정판들이 출간되었다.
페이비언 협회의 실무자로서 웨브는 1889년 〈페이비언 에세이스 Fabian Essays〉에 실려 있는 내용 중 한 부분을 강연하여 협회를 세상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이듬해에 그는 비어트리스 포터를 만났는데 당시 그녀는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점차 확고히 하고 있었고, 〈페이비언 에세이스〉에 기고한 웨브의 글에 깊은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웨브는 즉시 이 아름답고 지적인 젊은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강연자로서 그리고 경제학에 관한 저술가로서 이미 명성을 얻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가 낡은 옷을 걸친 초라하고 못생긴 키가 작은 이 남자에게 호감을 갖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1892년에 결혼했고, 노동조합에 대한 기록을 조사하기 위해 신혼여행차 글래스고와 더블린으로 갔다.
결혼 후 그들의 업적
그들은 런던으로 돌아와 그곳에 집을 얻었다.
그들은 사회연구와 정치적인 활동에 보다 많은 시간을 쏟기 위해서 시드니가 공직을 그만두고 비어트리스의 유산과 그들이 저술활동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생활하기로 결정했다. 시드니는 오로지 1892년 처음 선출된 런던 시의회와 페이비언 협회에서만 활동했다. 그들의 공동연구의 최초의 결실인 2권의 대작 〈노동조합주의의 역사 The History of Trade Unionism〉(1894)·〈산업민주주의 Industrial Democracy〉(1897)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저서들에서 웨브 부부는 사실상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영국 사회생활의 일부로서 영국의 경제학자와 사회사가들을 소개했다. 그후 그들은 역사적·사회적 연구, 교육적·정치적 개혁, 언론 부문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그들의 저술 중에는 17~20세기의 영국 지방정부의 역사를 다룬 엄청난 기획이 있다. 25년에 걸쳐 출판된 이 저작으로 웨브 부부는 일류 역사연구가로서의 위상을 정립했다. 그들은 또한 다수의 크고 작은 책들과 소책자를 집필했다. 그 책자들 중 일부는 단명했지만 다른 일부는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의 저술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제도를 설립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그들의 활동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다.
시드니는 1892~1910년 런던 시의회에서 활동했다. 그의 주된 업적으로 중등공립학교체제와 초등학교 학생을 위한 장학제도의 창설을 들 수 있다. 그는 또한 런던에 기술교육과 사회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그와 비어트리스는 자유당 정치인인 R.B. 홀데인과 함께 런던경제대학을 설립했다.
시드니는 런던대학교를 교육기관들의 연합체로 재조직하고, 교육가 로버트 모랜트와 함께 다음 세대를 위한 영국공립교육의 성격을 결정지은 교육법의 청사진을 1902, 1903년에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시드니와 비어트리스는 '침투'라고 알려진 전술, 즉 그들의 정치적인 지향과는 상관없이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변화시켜 페이비언 정책 또는 그 정책의 일부를 관철시키려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때부터 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보수당 총리인 밸푸어 경과 그의 자유당 경쟁자인 로즈버리 경에게 접근했다.
1906년에 거대한 자유여당이 출현하자 이러한 전략은 실효성을 잃게 되었고, 웨브는 결국 막 창당된 노동당에 '침투'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전에 비어트리스는 1905~09년 구빈법(救貧法)에 관한 왕립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전반적인 사회보험제도를 주장한 '베버리지 보고서'보다 35년 전에 복지국가의 개요를 명확하게 묘사한 '소수집단 보고서'를 작성했다. 웨브 부부가 사회보장을 위해 조직한 전국적 차원의 운동은 1911년 수혜자가 보험료를 분담하는 보험계획에 관한 로이드 조지의 성급하고 즉흥적 발상에 의해 무산되었다.
노동당과의 협력
1914년말 웨브 부부가 노동당원이 된 후에 그들은 노동당의 자문위원으로 급속하게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켜나갔다.
페이비언 협회에 있어서의 그들의 지도력은 반대파들에 의해 약화되었는데 처음에는 H. G. 웰스, 이후에는 역사가이자 경제학자인 G. D. H. 콜이 이끄는, 산업에 있어서의 자치를 주장하는 길드 사회주의자들과 좌익 반대파들에 의해서였다. 그동안 그들은 〈뉴 스테이츠먼 New Statesman〉이라는 독자적인 잡지를 창간하여 그들 자신을 위한 새로운 논단을 만들었다. 당의 전시(戰時) 지도자였던 아서 헨더슨의 우정과 사심없는 충고에 의해 시드니는 집행위원회의 일원이 되었고, 최초이자 오랜 기간 동안의 당의 가장 중요한 정책보고서가 된 〈노동계급과 새로운 사회질서 Labour and the New Social Order〉(1918)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 직후인 1919년 그는 석탄탄광에 관한 생키 위원회의 위원이 되기 위해 광부연맹이 선출한 전문가의 한 사람이 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위원회에서의 활동의 결과로 1922년 선거에서 그는 더럼의 시엄하버 선거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통해서 패스필드 남작으로서 상원에 자리를 확보했다. 아울러 1924년 노동당 내각하에서 상무부장관을 지냈으며, 1929년 역시 노동당 내각하에서 식민장관을 지냈다.
비어트리스는 시드니의 이 모든 활동들에 성심껏 협력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다소 늦게 정치에 투신했고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식민장관 시절에는 팔레스타인 정세로 곤란을 겪었다. 1932년 그와 비어트리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전망에 심한 환멸을 느끼고 소련으로 건너가,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이 그곳에서 발견한 것과 '사랑에 빠졌다'. 그후 3년에 걸쳐 그들은 최후의 대작인 〈소비에트 공산주의 Soviet Communism:A New Civilization?〉(1935)를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들은 점진적인 사회적·정치적 발전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1928년부터 햄프셔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 있었는데, 비어트리스는 1943년에, 시드니는 1947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웨브 부부에 대한 평가
웨브 부부와 그들의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20세기 전반 영국의 급진적인 사상과 제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여러 부문에 걸친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는 항상 논란이 따랐다. 이것은 그들이 일단 런던경제대학과 같은 기관을 설립했으면서도 그것을 발전시키는 데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사상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들의 공헌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로간의 충실한 협력자로서 그들이 이룬 업적의 일부는 그들의 재능이 보기 드물게 보완적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시드니는 사실들과 출판물에 대한 지식에 정통했고, 비어트리스는 섬광 같은 통찰력을 지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완전히 만족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숭고한 만족은 때때로 그들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고 느꼈던 사람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의 능력과 사심없는 공적 활동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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