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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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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예수교장로회는 칼뱅주의에 입각한 장로교 교리,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한 장로회 헌법과 12신조,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기본신조로 하는 교파이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 개척자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소속 선교사였던 로스와 매킨타이어이다.
1884년 북장로회 선교사인 앨런이 광혜원을 설립했으며, 1885년 언더우드가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이어 미국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캐나다장로회가 선교활동을 폈다. 1907년 최초의 한국장로교 목사들이 탄생되었다. 이후 각기 다른 장로교파가 분할선교한 한국장로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성립하게 되었고,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조직되었다.
현재 교세가 비교적 큰 교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합동·고신·대신·장신·개혁·고려, 한국기독교 장로회 등이다.

예수교장로회는 칼뱅주의에 입각한 장로교 교리,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한 장로회 헌법과 12신조 및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기본신조로 하는 교파이다.

장로교선교사들의 한국인 접촉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소속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cIntyre) 선교사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선교사는 1875년 성서의 한글번역사업에 착수했고, 성서번역에 함께 참여한 이응찬·이성하·백홍준·김진기·서상륜에게 장로교회의 예식에 의한 세례를 줌으로써 이들이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이 되었다.

이들은 쪽복음서를 들고 국내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예배당을 세움으로써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솔래교회)이자 한국 개신교회의 개척자들이 되었다.

한편, 1884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자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인 의사 앨런이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해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로 있으면서 한국 의료선교의 요람이 된 '광혜원'(세브란스의 전신)을 설립했다. 그 뒤를 이어 1885년 부활절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내한해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었다.

1892년 북장로교회에 뒤이어 미국남장로회는 호남지역에서 선교했고, 캐나다 장로회는 1899년 함경북도와 간도지역을 선교기지로 삼고 선교했다. 또한 그 이전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가 경상남도 지역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폈다. 이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장로회의 창설을 위해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선교뿐만 아니라 신학교육, 성서번역, 각종 문서사업,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에서 연합했다. 이들은 '장로교공의회'(Presbyterial Council)를 조직했으며, 1901년에는 마포삼열 목사의 집에서 연합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를 설립해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들어갔다.

1907년에는 33명의 각파 장로교 선교사와 36명의 한국인 장로교도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여 '조선예수교장로회독로회'를 조직하고,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에게 목사 안수를 줌으로써 최초의 한국장로교 목사들이 탄생되었다. 이로써 4개의 각기 다른 장로교파가 분할선교한 한국장로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성립하게 되었고, 1912년에는 독로회 시대가 청산되고 총회가 창설되어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1935년 일제의 대륙침략이 기세를 부리면서 한국민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고, 교회는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다. 일제는 한국인 목사들과 평신도들에게 위협과 회유정책을 쓰며 참배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을 고문·투옥했다. 교회는 결국 1938년 27회 총회에서 일제의 무력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순교를 각오하고 투쟁한 주기철·이기선·한상동·손양원 목사 등과 같은 순교자들도 많았으며, 평양신학교가 폐교당하고, 200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000여 교인이 투옥되었다.

일제는 한국 그리스도인을 말살시킬 목적으로 몇몇 무지한 교회 지도자들을 회유해 1943년에는 어용의 '조선혁신교단'을 만들더니 1945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단'으로 통합시켜버렸다. 이로써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해방 직후 거의 명맥이 상실된 채로 좌초되어 있었다.

이러한 혼란시기에 장로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교권의 숙정(肅正)을 요구하는 고려파(高麗派)와 교권파와 갈등을 빚게 되었으며, 1951년 부산에서 모인 장로교회에서 분열함으로써 분열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조신파(朝神派:지금의 기독교장로회)와 예장파의 분열 역시 이때 일어났다. 평양장로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1938년에 휴교하자 서울에서 김재준 목사가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개설했다. 이 신학교는 근대주의적 신학자들에 의해 진보적 신학(자유주의신학)을 표방하는 대담한 신학교육을 실시했다.

교단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성서의 고등비평과 역사적·문학적 비판방법론으로써 결국 보수주의와 근본주의의 신학 일색이던 장로교회에 충격을 던져주었고, "근대주의 신학사상과 성경의 고등비평을 거부한다"면서 총회는 김재준 목사를 파면시켰고 마침내 이들이 1954년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조직했다.

1959년 예수교장로회는 다시 합동파(合同派)와 통합파(統合派)로 분열되었다.

한국교회의 반공이념과 신앙의 순수성 보존을 이유로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하는 측이 총회의 결의를 얻지 못하자 회의 도중 퇴장해 그해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구성함으로써 또다시 분립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합동파는 1962년 ICCC(국제기독교연합회) 탈퇴문제로 박병훈계가 혼헌파로 분열되었고, 1979년에는 사당동파(舍黨洞派)와 방배동파(方背洞派)로 다시 분열되었다. 이러한 분열의 결과로 지금은 '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으로 여러 교단이 산재하게 되었다.

1985년도의 문공부 집계에 의하면 장로교의 교파수는 47개 교단으로 발표되었으나 여기에는 계보상 뚜렷한 경로 없이 자생적으로 생긴 교파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주요 교파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합동·고려·고신·법통·대신·호헌·호헌총회·장신·개혁총회·종합·계신측(契神側)·재건교회총회·환원·총련(總聯)·로고소공의회·연합·독로회·근본주의 총회·동신측·보수·복음·부흥·평신, 대한예수교 순장로회·성경장로회, 한국기독교연합총회, 대한예수교 복음선교협의회 총회, 한국기독교 장로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교세가 비교적 큰 교파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합동·고신·대신·장신·개혁·고려, 한국기독교 장로회 등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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