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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사랑하라, 삶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
조르주 상드
George Sand출생 | 18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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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6년 |
천재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고 때로 천재들을 파괴하며 천재들과 뜨겁게 사랑한 여인 조르주 상드. 세상은 그녀를 뮈세의 연인이나 쇼팽의 연인으로만 기억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놀랍고 위대한 예술가다. 우리는 상드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이해하는 것보다 오해하고 있는 것은 더욱 많다.
숨은 인물 찾기
베를린의 구 국립미술관에는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의 화가 요셉 단하우저가 그린 작품이 걸려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한 일곱 명은 19세기 중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예술계를 화려하게 장식한 실존 인물이다.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 작품의 제목은 〈피아노 앞의 리스트(Liszt at the Piano)〉, 프란츠 리스트가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 친구 여섯 명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인물은 당연히 이 작품의 주인공 리스트다. 베토벤의 흉상을 바라보며 연주하는 리스트의 발치에는 한 여인이 피아노에 기대앉아 그의 연주에 몰입하고 있다. 이 여인은 파리 사교계의 꽃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다. 훗날 리스트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는 여인, 그녀는 리스트의 공인되지 않은 아내이자 미래에 바그너의 장모가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또한 다니엘 스턴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작가이기도 했다.
의자에 앉아 리스트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은 남장을 한 조르주 상드다. 상드의 옆 의자에 나란히 앉은 인물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두 사람의 의자에 팔을 걸치고 있는 인물은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다. 일설에는 작곡가 베를리오즈라는 의견도 있으나 빅토르 위고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빅토르 위고 곁에 팔짱을 낀 채 음악에 심취한 남자는 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다. 리스트는 1831년에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감동받아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파가니니와 더불어 한 공간에 있으니 리스트의 꿈은 이루어진 셈이다. 파가니니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음악에 심취한 인물은 역시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로시니다.
낭만주의 시대는 천재들의 시대였다.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역사의 중심이 이동하고, 탁월한 예술가들이 국경을 초월해 만나고 서로를 고양시키던 위대한 시대, 민중 속에서 빛나는 인재들이 등장하던 변화의 시대였다. 피아니스트가 연주하고 그 음악이 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작가의 글이 그림으로 빚어지던 천재들의 시대, 그것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바로 〈피아노 앞의 리스트〉다.
상드, 경계를 뛰어넘은 혁명가
〈피아노 앞의 리스트〉 속의 상드는 그녀가 살아온 삶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상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남장을 하고 나선 거의 최초의 여인, 천재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고 때론 천재들을 파괴하며 천재들과 뜨겁게 사랑한 여인 조르주 상드. 세상은 그녀를 뮈세의 연인이나 쇼팽의 연인으로만 기억하지만, 상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놀랍고 위대한 예술가다. 우리는 그녀에게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이해하는 것보다 오해하고 있는 것은 더욱 많다.
예나 지금이나 상드에게는 ‘쇼팽의 연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쇼팽의 연인으로만 머무른 여성이 아니었다. 남성의 시각으로 기록된 상드는 한결 같이 문란한 사생활만 부각되어 있다. 물론 시대적 정서를 감안할 때 그녀의 사생활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당대의 남성 예술가들이 상드에 대해 남긴 글을 보면 오늘날의 인터넷 악성 댓글 못지 않게 가혹하다. 보들레르와 공쿠르 형제가 특히 잔혹한 평가를 남겼다. ‘하수구, 화장실’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보들레르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을까? 하긴 자기 안에 없는 것은 그 사람을 격앙시키지 않는 법이다. 니체 역시도 상드의 문학세계를 폄하하며 ‘암소가 우유를 만들듯 글을 쏟아 냈다’고 표현했다.
반대로 작가로서의 상드를 존경한 예술가도 많았다. 그녀가 걸어온 길을 보면 당연하다. 상드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문학에 담았고, 일하는 사람의 세상을 꿈꾼 노동운동가였으며, 유럽통합이 이루어지기 거의 150년 전부터 유럽통합을 열망한 선구자이자, 빅토르 위고와 어깨를 나란히 한 사회소설의 대가였다.
상드는 예술가를 이렇게 정의했다. ‘예술가란 단순히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자가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라고. 그녀는 자신이 정의한 예술가의 삶 그대로를 살았다. 그녀의 작품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 러시아에서도 많이 읽혀졌다. 유럽통합을 꿈꾸며 진보적인 잡지 발간에 동참한 상드의 연재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귀족과 하층민, 부자와 가난한 사람, 남자와 여자,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 개인과 사회, 프랑스와 그 밖의 나라들, 그 모든 경계선에서 갈등과 상처를 극복하고 봉합하려는 노력을 평생 기울인 상드는 결코 스캔들 따위로 폄하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니다. 그녀는 경계를 무수히 뛰어넘은 혁명가였다.
‘사회는 언제나 나쁜 타깃을 찾는 데 집착하고 있다’고 스위스 출신의 작가이자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또한 사회 문제 중 많은 부분은 나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이나 상상력의 결여, 진부함 때문에 발생한다고 통찰했다. 알랭 드 보통의 시각으로 보자면 상드는 1830년대가 찾던 나쁜 타깃에 스스로를 먹이로 제공한 셈이다.
귀족과 민중 사이에서
상드는 자신의 좌우명을 ‘자유’라고 말했다. 그녀가 평생 문학 속에 녹이려 했던 ‘사랑’은 바로 그 ‘자유’와 ‘평등’을 융합한 결정체였다. 그녀가 이토록 용기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귀족과 하층민의 운명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드의 아버지는 폴란드 왕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할머니 뒤팽 드 프랑퀘이 부인은 폴란드 왕 오귀스트 2세 가문에서 태어났다. 뒤팽 부인은 장 자크 루소의 사상에 심취한, 알려지지 않은 여성 철학자였다. 예술가이자 사상가로서 상드의 모습은 많은 부분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상드의 아버지 모리스 뒤팽은 기병대 장교로 복무하던 중에 어머니 소피 들라보르드를 만났다. 그녀는 센 강변의 새장수 딸로 태어나서 전쟁터를 따라 떠돌던 단역배우였다. 뒤팽 부인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리스 뒤팽과 소피 들라보르드는 혼인신고를 마쳤고, 한 달 뒤인 1804년 7월 1일에 상드가 태어났다.
조르주 상드의 본명은 오로르 루실 뒤팽이다. 그녀는 네 살 때 파리를 떠나 노앙의 할머니에게로 갔다. 그러나 노앙으로 간 지 넉 달 만에 아버지가 낙마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노앙의 성에는 세 여자가 남았다. 교양 있는 할머니와 교육받지 못한 어머니, 그 사이의 총명한 오로르. 할머니와 어머니는 상드의 양육 방식을 두고도 갈등을 빚었다. 할머니는 손녀를 귀족의 자제로 키우기를 원했다. 결국 1년 뒤 어머니가 노앙을 떠났다. 상드에 대한 양육권을 포기하고 떠나면 매년 500프랑을 주겠다는 할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뚜렷한 두 계층의 갈등을 경험한 상드는 할머니를 존경한 것과는 별개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어버린 상실감 속에 성장했다. 그녀의 소설에 아버지의 존재가 희미한 것도, 그녀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갈구했던 것도, 뜨거운 연애가 매번 깊은 모성애로 옮겨간 것도 이런 성장 배경과 연관이 있다.
상드의 유년시절 친구는 소작농의 자녀들이었다. 할머니는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는 엄격했지만 사회적 정의나 평등에 관해서는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할머니는 그녀가 남자아이의 옷을 입고 농부의 아이들과 어울려 들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때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하녀의 딸 위르쉴과는 50년이 넘도록 절친한 친구로 지내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할머니는 상드에게 음악과 미술,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수학과 역사까지 가르쳤다. 그뿐만이 아니라 농민을 포함한 약자와 더불어 사는 구체적 방법도 하나씩 터득하게 해주었다. 가난한 사람이 아플 때 치료해줄 수 있도록 간단한 의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상드가 평생 농민과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품었던 정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극과 극의 현실을 경험하고 수용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두 계층을 조화롭게 엮을 수 있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살롱에서 한가롭게 예술을 향유하면서도 동시에 자유와 평등을 향한 투쟁에도 앞장섰던 상드의 정신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프랑스 중부의 앵드르 지방에 라샤트르가 있고, 라샤트르의 한 마을 ‘노앙’이 있다. 파리도 아니고 리용도 아니고 마르세이유도 아니며 노르망디나 프로방스의 어딘가도 아닌 곳. 이토록 낯선 지명들로 가득한 작은 시골 마을 노앙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노앙의 인자한 부인(La bonne dame de Nohant)’이라고 불리던 상드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1821년, 열일곱 살의 상드는 노앙의 대저택을 물려받았다. 성이라고 불러도 좋은 이 저택은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농부의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던 곳이고, 위대한 예술가들을 불러들인 휴양지였으며, 세상에 지친 노년의 상드에게 안식을 주었던 곳, 노앙은 상드의 성지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예술계의 작은 성지이기도 하다.
노앙에는 프레데릭 쇼팽은 물론이고 프란츠 리스트, 오노레 드 발자크, 외젠 들라크루아, 하인리히 하이네, 이반 투르게네프, 귀스타브 플로베르, 성악가 폴린 비아르도 같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쇼팽이 머물던 ‘푸른 방’은 상드가 얼마나 배려 깊은 여인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쇼팽이 마음껏 연주할 수 있도록 이중문을 설치했다. 그 방에서 쇼팽은 작곡과 연주에 집중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선율에 손님들은 고개를 저었다지만, 상드는 쇼팽의 열정을 자신이 품을 수 있는 한 품었다. 화가 들라크루아를 위해서는 아틀리에를 꾸며주기도 했다. 식당은 살롱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조되었다.
상드의 저택에는 연극이 공연되는 작은 극장도 있었다. 그녀의 희곡이 공연될 때에는 상드는 물론이고 그 집의 하인들도 배우로 출연했다. 공연이 있을 때면 상드는 인근의 지역 주민과 하인도 초대했다. 그러므로 이 극장은 소수의 귀족과 예술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자유와 평등의 공기로 가득했던 노앙, 그곳은 20세기가 추구한 예술의 현장을 미리 시연한 공간이었다. 쇼팽이 녹턴을 연주하면 뒤를 이어 리스트의 폭풍 같은 연주가 이어지고, 비아르도가 노래하는 노앙 성의 저녁. 그 풍경을 들라크루아가 그리고, 발자크 혹은 투르게네프가 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작품을 구상하던 곳. 노앙은 음악과 미술과 문학이 삼위일체를 이루던 예술의 성지였다.
상드의 재발견, 4만여 통의 편지
조르주 상드는 평생 4만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밝혀지고 정리된 것만 1만 8000여 통, 그녀가 주고받은 편지들은 1864년부터 수집되고 책으로 엮어지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1995년이 되어서야 26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상드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은 무려 2000여 명, 그 명단만으로도 19세기 유럽의 예술사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상드의 편지는 발굴되는 중이다. 안데르센, 톨스토이, 에밀 졸라와 주고받았다는 편지도 분명 언젠가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많은 편지를 쓰면서도 숱한 소설과 평론, 신문 기고문까지 썼던 상드,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뜨거운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편지는 상드를 재평가하는 증거가 되었다. 대개의 예술가가 그렇듯이 상드도 세상을 떠난 뒤 쇼팽의 연인으로만 간간히 기억되었을 뿐 한동안 잊힌 작가였다. 1910년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상드의 편지를 수집하고 복원한 학자들은 그녀가 결코 뮈세의 연인이나 쇼팽의 연인으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되는 작가라는 것을 확인했다. 4만여 통의 편지, 그것은 상드가 기록한 그녀 자신이며, 그녀의 인생이며, 그녀가 몸담은 시대의 기록이자 한 인간이 얼마나 드넓게 세상과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다. 그녀가 노동운동에 눈 뜬 최초의 세대였으며, 자유와 평등을 위해 헌신한 박애주의자였고, 유럽통합을 꿈꾼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스캔들 너머로 매몰되었던 19세기의 상드는 페미니스트이자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20세기에 부활했다. 그녀의 작품은 다시 읽혀지고, 비로소 제대로 해석되었으며, 시대를 앞서간 조르주 상드라는 작가를 다시 보게 해주었다.
상드의 편지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첫 번째 남편 카지미르 뒤드방 남작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다. 무려 원고지 190장 분량인 이 편지를 그녀는 하룻밤에 썼다. 그런데 그 내용이 더없이 당돌하고 기막히다. 오렐리앙 드 세즈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남편에게 고백하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남편과 함께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감정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상드의 남편 뒤드방 남작은 사냥과 파티와 도박에 빠져 있었고, 예술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 피아노 소리를 싫어했기 때문에 상드는 피아노 치는 것을 포기했다. 남편에게 좋은 책들을 읽어주며 어떻게든 교양인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보려 했지만 책과 담 쌓은 뒤드방 남작은 금방 졸았다. 그래서 상드는 책읽기도 접었다. 어떻게든 남편의 취향을 맞춰보려 노력했으나 남편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뒤드방은 방탕한 남편이었다. 외롭고 상처받고 지친 그녀는 피레네로 여행을 떠났다. 바로 그 여행길에 매력적인 청년 법관 오렐리앙 드 세즈를 만났다. 그는 상드가 꿈꾸던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약혼녀가 있던 드 세즈와의 만남은 전적으로 플라토닉한 것이었다고 그녀는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원고지 190장 분량의 편지라니!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면 그토록 긴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상드가 이 장문의 편지에 쓰고 싶었던 본론은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파리에 가면 함께 어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당신이 음악을 싫어하니 음악은 나 혼자 듣겠다고, 대신 노앙에서는 함께 책을 읽으면 어떻겠느냐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공통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썼다.
상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솔직하고 대담하다. 남편에게 ‘남편이 아닌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쓰고, 단 한 줄도 숨기지 않을 테니 드 세즈와 한 달에 한 번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심히 뻔뻔한 부탁까지도 써놓았다. 정말 무모할 정도로 솔직한 여인이다.
편지에서 보듯, 상드는 평생 어떤 상황에서나 솔직했다. 부도덕한 면은 있을지언정 인정할 것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괴테의 연인이자 베토벤의 연인이었던 베티나가 베토벤의 편지나 괴테와의 관계를 왜곡했던 것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알마 말러가 말러의 기록들을 고의적으로 편집했던 것과도 대비되는 미덕이다. 물론 그 솔직함은 부메랑이 되어 상드에게 되돌아왔다. 그녀를 스캔들의 여왕으로 기억하게 된 증거를 그녀 스스로 구축해 놓은 셈이니까. 비록 뮈세와 나눈 편지의 일부분, 쇼팽과 나눈 편지의 상당 부분을 태워버린 일은 있지만, 그녀는 평생 자신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감추지 않았고 왜곡하지도 않았으며 변명하지도 않았다.
치욕보다 자유
‘여자는 남자가 변할 것이라 생각하고 결혼한다. 그러나 남자는 변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결혼한다. 하지만 여자는 변한다.’ 상드의 결혼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다. 그녀는 자기가 선택한 뒤드방이 좋은 남편이 되리라 믿었고, 그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소망했고, 헌신적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폭주기관차처럼 파국을 향해 달렸다. 결국 상드는 남편에게 종속된 아내로서의 결혼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첫 번째 결혼이 남긴 상처는 상드가 잠시 잊고 있었던 강인한 핏줄을 되새기게 했다. 여성의 독립을 위해서는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헌신적인 아내 역할을 자처했던 상드는 결혼의 실패와 더불어 성장했다. 부도덕한 여인이라는 굴레를 쓴 채 남편에게 어쩔 수 없이 노앙의 성과 자녀들의 양육권을 넘겨야 했던 그녀는 여성이 강해져야 평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첫 번째 결혼은 파탄으로 끝났지만, ‘오로르 루실 뒤드방’이 ‘조르주 상드’가 되기 위한 필연적인 수업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유로운 연애와 가난이 동시에 그녀를 찾아왔다. 상드는 파도에 단련되는 바위처럼 강해졌다. 1830년, 그녀는 법학도이자 무명작가 쥘 상도와 함께 파리의 낡은 다락방에서 살고 있었다. 쥘 상도와는 문학에 대한 꿈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두 사람은 공동 집필을 하자는 데 의기투합했고, 그 꿈은 〈장미와 백색〉이라는 작품으로 결실을 맺었다.
쥘 상도는 그녀의 인생에 그다지 큰 영향을 남겼다고 할 수는 없다. 작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상드의 워밍업을 도와준 파트너였다고 표현하면 어떨까? 그 대신 쥘 상도는 상드에게 필명을 선물했다. ‘조르주 상드’는 쥘 상도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말하자면 쥘 상도의 여성형쯤 되는 이름이다.
상드라는 필명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그녀는 세상과 맞설 투지와 맷집을 키웠다. 그 첫 번째 시도는 맥없이 버리고 떠나온 노앙 성과 양육권을 되찾기 위한 소송이었다. 삶은, 그리고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는 그녀의 생각은 이즈음에 확고해졌다. 다른 사람의 평판에 신경 쓰며 살기에는 그녀가 추구하는 문학과 이상이 시대를 훌쩍 앞서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주장하기 거의 100년 전에, 페미니스트가 여성의 독립에 가장 필요한 경제력을 주장하기 한 세기 전에, 상드는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글을 써서 생계를 해결한 선구적 여성이었다.
상드가 작가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1832년에 발표한 《앵디아나》를 통해서였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씌운 굴레에 저항하는 이 소설에 대해서 〈르 피가로〉 지는 ‘여성의 마음을 진정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조르주 상드’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이 소설은 급변하는 시대상과 맞물리며 그녀를 혁신적이고 흥미로운 여성작가로 주목하게 만들었다. 이 소설이 발표되던 1832년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시기,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 뒤이어 파리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던 바로 그해였다.
상드는 이듬해에 《렐리아》라는 또 다른 작품을 출간하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이 무렵부터 파리의 사교계에 남장을 하고 나타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상드는 이따금 ‘렐리아’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그러므로 소설 《렐리아》에는 상드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렐리아를 포함한 중요한 등장인물 넷 모두가 상드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이 소설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 소설에 자신을 너무 많이 드러낸 것을 잠깐 후회한 적이 있을 정도로.
《렐리아》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을지, 새로운 시선을 목말라하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이 작품 속에 들어 있다.
“정말로 강한 영혼을 소유했다면 치욕이 뭐가 중요한가요? 렐리아, 여론의 힘 앞에서 고상하게 불리는 영혼이 얼마나 맹목적인지 아나요? 약한 자는 여론에 복종해야 하고, 여론에 저항하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아나요? 렐리아, 깨어나세요.”
1833년에 이런 통찰이 가능했다니! 강요된 여성상으로부터 깨어난 상드가 당대의 사람들을 그렇게 일깨우고 있었다. 그 대가로 그녀는 쏟아지는 비난과 모욕을 감당해야 했지만, 《렐리아》에 쓴 것처럼 강한 영혼을 소유한 상드에게는 치욕보다 자유가 중요했다.
- 1~2렐리아 표지
상드 식 연애의 정석
상드의 삶과 사랑과 예술을 이해하는 데 ‘어머니’라는 키워드는 무척 중요하다. 그녀의 사랑은 언제나 뜨거운 연인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어머니의 사랑으로 옮겨갔다. 어머니와 연인의 혼연일체. 그것은 상드에게 늘 ‘부재 중’이던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의 부재가 빚은 결과물이다. 그녀 인생에서 시소처럼 쉼 없이 오르내리던 ‘존재와 부재’, ‘풍요와 빈곤’, ‘안정과 불안정’의 반복이 상드를 그렇게 이끌고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녀 인생에서 사랑이 끊임없이 필요했던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드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연인들이 어딘가 섬약한 부분이 있어야 했다. 여섯 살 아래의 뮈세와 쇼팽에서 마지막 연인이었던 열세 살 연하의 알렉상드르 망소에 이르기까지, 상드는 병약한 연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반면에 남편이던 뒤드방이나 일주일간의 연애 끝에 헤어진 〈파랑새〉의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 같은 남성 호르몬 왕성한 남자들과는 상극이었다. 어딘가 댄디 하면서도 연약한 남자에게 끌려 연인이 되었다가 헌신적인 어머니로 변신하는 것이 상드 방식의 연애였다.
상드가 팜므 파탈로서의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시인 알프레드 뮈세와 사랑에 빠졌던 1833년부터였다. 뮈세는 상드가 발표한 두 번째 소설 《앵디아나》에 열렬한 찬사를 바쳤다. 여성으로서의 상드보다는 작가로서의 상드를 찬양하는 편지로 뮈세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섯 살 연상의 상드와 사랑에 빠진 뮈세는 활활 타오르는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밖에 모르며 황량하게 살던 어느 날 나는 상드를 만났다.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 사랑에 빠졌다.”
뮈세는 약학도에서 미술학도로, 작가로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바꾸었다. 뮈세의 첫 시집을 본 빅토르 위고가 그의 문학성에 주목했다. 당시 위고는 낭만주의 문학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고 있었는데, 위고는 뮈세를 그가 이끄는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모임 ‘세나클(cenacle)’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뮈세의 자신감은 중도에 크게 한번 꺾였다. 그가 발표한 첫 희곡 〈베네치아의 밤〉이 관객과 비평가로부터 혹독한 비난과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그 상처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할 때 그는 상드라는 탈출구를 만났다.
뮈세는 이기적이고, 과감하고, 다정했다. 몸이 약하면서도 방종한 생활에 빠져 있어서 그는 상드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상드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곧 모성애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요양을 위해 베네치아로 떠났다.
베네치아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뮈세는 베네치아를 ‘세계의 비상구’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베네치아는 아름답고도 타락하기 좋은 도시였다. 베네치아에서 상드는 앓아누운 뮈세를 어머니처럼, 간호사처럼 열심히 간호했다. 여행 경비와 치료비가 부족해지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현실감각 없는 뮈세는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상드를 비난했고, 급기야는 술집과 도박장을 드나들었다. 그의 알코올중독 증세가 심해지자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심각해졌다. 뮈세는 주치의와 상드와의 관계를 의심하며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상드는 지쳤다. 뮈세의 주치의에게 어려움을 털어 놓다가 상드는 자신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잠시 어머니의 역할을 접고 상드는 뮈세의 주치의 파젤로와 사랑에 빠졌다.
상드와 뮈세의 사랑은 쓸쓸하게 끝났다. 현실을 외면한 뮈세를 비난하는 시선도 없진 않았으나, 아픈 연인을 두고 주치의와 사랑에 빠진 상드를 향한 비난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감정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뮈세와 상드는 파리로 돌아와서도 몇 번의 만남을 반복했다. 그들이 완전하게 헤어진 건 1835년이었다. 뮈세는 상드와의 이별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실연한 자신을 시의 제단에 내놓고 슬픔을 곱씹었다. “······ 신이 말씀하시니 우리는 답해야 한다. 이 세상에 내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것이다.” 〈슬픔〉이라는 이 시는 1835년 5월, 뮈세가 상드와 헤어진 상처를 안고 쓴 시다. 이 시 외에도 〈5월의 밤〉, 〈12월의 밤〉, 〈8월의 밤〉, 〈10월의 밤〉이라는 연작시를 쓰며 뮈세는 상드와의 이별을 마음껏 아파했다.
〈세기아의 고백〉이라는 뮈세의 소설에는 상드와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뮈세와 상드에게 무슨 일어났는지 궁금하게 여기던 파리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으며 두 사람을 자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포크와 나이프로 찌르고 자르며 마음껏 감상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경험하기 쉽지 않은 사랑의 역사를.
상드 이전에도, 상드 이후에도 뮈세에게는 많은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뮈세의 인생에 가장 뜨겁고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 연인은 상드였다. 뮈세와 상드의 사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키스(Les enfants Du Siecle)〉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1840년에 이르자 뮈세는 다소 빛바랜 예술가가 되었다. 불과 서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다행이라면 그에게 상처를 준 연극계에서 다시 재기했고, 훗날 아카데미 회원까지 되었다는 사실이다. 말년에 뮈세에게는 루이즈 콜레라는 유명한 연인이 있었는데, 시인인 그녀는 뮈세와 만나기 전에 작가 플로베르의 연인이었다. 훗날 상드와 플로베르가 연정이 약간 뒤섞인 우정을 나누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들은 마치 드라마처럼 복잡하게 엮인 인연이다. 뮈세와 플로베르와 상드 그리고 루이즈 콜레. 당시 파리 사교계와 예술계가 좁았던 것일까, 아니면 조르주 상드의 네트워크가 넓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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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드가 남장을 한 이유
세상은, 상드가 남장을 즐겼던 이유를 남성중심의 사회를 향한 도전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상드가 남장을 한 것은 실용적인 이유가 더 컸다. 노앙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남장을 하고 말을 타며 놀았으니 그녀에게 남장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다. 파리로 온 뒤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살 돈도 없었지만, 비가 자주 내리는 날씨와 딱딱한 보도에 치마와 구두가 금방 상해버려 어쩔 수 없이 간편하고 튼튼한 남자 복장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남자 구두를 신고 파리를 종횡무진 걷는 것이 마치 세계 일주를 하는 기분이라고 상드는 만족스러워 했다. ‘날씨에 상관없이 외출하고, 시간에 상관없이 귀가하고, 남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극장에 갔다’는 상드, 그녀의 남장은 현실과 이상을 모두 반영하는 아주 편리한 장치였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 대한 도전이라는 상징성 외에도 여성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선택이었고, 경제적이기까지 했으니까.
또한 남장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살롱에서 그녀가 주목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드는 여러 이유로 ‘튀는 역할’을 자처했고, 그녀의 남장에 놀라고 당황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씩 즐기기 시작했다.
쇼팽의 상드, 상드의 쇼팽
상드의 인생에 프란츠 리스트는 의미심장한 인물이다. 할머니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음악교육을 받았던 상드는 리스트의 혁신적인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고 지지한 동료였다. 또한 리스트는 상드와 쇼팽이 만날 수 있도록 해준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리스트는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와 망명 음악가 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을 파리의 예술계에 소개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마리 다구 백작부인의 살롱에서 연주할 기회도 자주 마련해 주었다. 그 덕분에 마리 다구의 살롱은 파리에 온 예술가들의 아지트였고,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잉태하는 요람과도 같았다. 상드와 쇼팽이 만난 곳도 바로 이 살롱이었다.
1836년, 상드는 마리 다구 백작부인의 살롱에서 쇼팽을 처음 보았다. 상드는 쇼팽의 첫 인상이 ‘마치 여성처럼 연약해 보였다’고 썼다. 쇼팽은 남장을 한 상드를 불편하게 여겼다. 당시 서른두 살이던 상드는 작가로서나 여성으로서나 산전수전 다 겪은 무렵이었다. 남편과의 이혼 소송에서 승소한 뒤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남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며 사생활이 문란한 여성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스물여섯의 망명자 쇼팽은 마리아 보진스카와의 결혼이 반대에 부딪혀 슬픔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상드는 자서전 《나의 생애》에 이렇게 기록했다. ‘만약 마리아가 쇼팽에게 진실한 행복과 예술혼을 찾아줄 수 있다면 그를 잊겠지만, 마리아와의 결혼이나 사랑이 쇼팽의 예술혼을 파괴한다면 내가 그를 빼앗아 오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상드는 쇼팽을 다시 만나기 위해 리스트를 여러 번 졸랐다. 하지만 쇼팽은 상드의 초청을 여러 번 거절했다. 마리아 보진스카와 헤어진 뒤에도 쇼팽은 상드를 둘러싼 불미스런 소문에 연루될까 봐 그녀를 멀리 했다. 상드는 결국 쇼팽을 찾아 파리로 올라왔다.
쇼팽은 마침내 상드에게 마음을 내주었다. 쇼팽에게 절실한 안온함, 보살핌, 치유의 힘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쇼팽이 연주하는 동안 상드는 마치 그의 눈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처럼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쇼팽은 상드의 검고 커다란 눈에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쇼팽은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썼다. ‘그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뒤 마요르카로 떠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 여행은 다소 무모했고, 결과적으로는 쇼팽의 건강을 악화시킨 나쁜 선택이었다. 마요르카를 선택한 것은 상드가 아니라 쇼팽이었다. 그런데도 상드는 마요르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모든 책임과 비난을 억울하게도 혼자 감당했다.
쇼팽은 마요르카에서 ‘빗방울 전주곡’이 포함된 〈24개의 프렐류드〉를 비롯해 많은 명곡을 탄생시켰다. 그 곡들의 탄생 뒤에는 상드의 고생이 있었다. 팔마에서 발데모사의 외진 수도원으로 옮기기까지 숱한 어려움을 감내하며 상드는 쇼팽을 뒷바라지했다. 강인한 그녀가 아니었다면 쇼팽은 마요르카의 겨울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드는 오랫동안 ‘쇼팽의 상드’로 역사에 남았다. 쇼팽의 생명을 단축시킨 흡혈귀처럼, 지겹도록 쇼팽을 소유하고 냉정하게 버린 악녀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쇼팽이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청년기부터 각혈을 하면서도 마흔 살 가까이 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상드 덕분이었다는 쪽으로 정리되고 있다.
상드와 쇼팽은 10년을 함께 보냈다. 그들이 10년 내내 뜨거웠던 것은 아니다. 마요르카에서 돌아온 뒤에는 거의 어머니와 아들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상드는 ‘나는 매우 따뜻한 모성애와 결백으로 일종의 어머니 같은 감정을 이 예술가에게 바쳤다’고 쓰고 있다. 격정을 침착하게 소멸시킨 관계였다는 상드의 표현을 입증하듯 쇼팽도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그녀의 눈은 내가 피아노를 칠 때밖에 빛나지 않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쇼팽이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명곡이 나오지 않았다. 음악 감식안이 탁월한 상드는 쇼팽이 작곡한 음악을 들어주고, 자신의 견해를 전해주며 작곡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노앙에서 그들이 보낸 일상은 수십 년 간 함께 살아온 부부처럼 담담했다. 쇼팽이 작곡에 몰두하면 그녀는 글을 쓰고, 저녁이면 식탁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생활. 격정적인 상드였지만 쇼팽을 위해서 스스로의 욕망을 물리치고, 심지어 쇼팽의 육체적 격정까지 만류하며 작품을 위해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상드는 세상이 자신을, 쇼팽을 육체적으로 고갈시킨 여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억울했지만, 그녀는 변명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그녀는 세상의 비난이나 찬사에 초연했다. 상드는 오직 상드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마리 다구 백작부인의 손님들은 너무나 화려하다. 〈피아노 앞의 리스트〉라는 그림에서 본 것처럼 리스트와 쇼팽, 베를리오즈, 파가니니 같은 음악가만이 아니라 빅토르 위고와 알렉상드르 뒤마, 발자크, 하이네 같은 문필가,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도 모여들던 최고의 살롱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더 나은 예술을 창조했다.
당시의 살롱은 부유한 귀족과 예술가의 한가한 유희만 있던 공간은 아니었다. 혁명의 발원지가 파리와 빈 등지의 카페였던 것처럼, 살롱은 예술과 이념과 평등과 진보를 토론하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쇼팽과의 결별
상드와 쇼팽의 결별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상드의 딸 솔랑주였다. 쇼팽과 상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푸른 노트〉를 보면 솔랑주가 마치 쇼팽의 연인처럼 그의 곁을 맴도는 장면들이 나온다. 솔랑주가 쇼팽을 좋아했다고 볼 수 있는 정황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 상드를 겨냥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솔랑주는 클레징거라는 조각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상드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쇼팽은 솔랑주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편이었다. 상드의 부모가 그랬고, 상드가 그랬던 것처럼 솔랑주는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했다. 상드는 쇼팽에게, 그 어떤 도움도 솔랑주에게 주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만약 자신의 당부를 어기면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될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쇼팽은 엄마한테 쫓겨나다시피 한 솔랑주를 외면할 수 없었다. 솔랑주에게 돈을 마련해 주었고, 상드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한 클레징거도 다정히 보살펴 주었다. 결국 상드는 쇼팽에게 결별의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상드와 쇼팽의 결별은 솔랑주 때문이긴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어느 지점쯤에서 감정이 굳어버린, 과거완료형의 연인이었다. 쇼팽은 자신이 노앙의 수많은 방문객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상드는 쇼팽의 지나치게 진지하고 예민한 성정에 지쳐 있었다. 솔랑주는 화석처럼 굳어버린 그들의 관계를 정리할 하나의 명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상드와 쇼팽의 사랑에 대해 손익계산서를 작성하려 이런저런 기록들을 뒤지곤 한다. 상드가 쇼팽을 보살폈다는 시선이 보편적인 반면 쇼팽이 연주회의 수익과 레슨비, 작품의 출판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상드를 도와주었다는 주장도 팽팽하게 맞선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그런 계산서를 들이댄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상드와 헤어진 뒤 쇼팽은 건강도 나빠졌고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들라크루아와 폴린 비아르도가 나서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상드는 사랑할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일단 마음이 떠나면 결코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1848년 봄, 두 사람은 어느 귀족의 살롱에서 재회했지만 차갑게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쇼팽은 당황했고, 상드는 냉담했다. 이 우연한 만남 이후로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제자 스털링의 초대로 영국으로 건너간 쇼팽은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공, 웰링턴 공작 등이 참석한 연주회에서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런던과 스코틀랜드의 습한 기후는 쇼팽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부축을 받아야 옷을 입을 정도로 쇠약해졌고, 불면증과 기침에 시달렸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세상을 떠났다. 클레징거가 쇼팽의 데스마스크를 떴다. 장례식에서는 폴린 비아르도가 노래를 부르며 쇼팽을 전송했고, 페르 라 셰즈 묘지까지 가는 길은 들라크루아가 전송했다. 그의 무덤에는 친구들이 가져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년 되던 날, 들라크루아가 기획하고 클레징거가 조각한 기념비가 쇼팽의 무덤에 세워졌다. 리라를 든 여인이 슬픈 얼굴로 쇼팽의 무덤을 내려다보는 기념비는 쇼팽이 혈육처럼 아꼈던 클레징거와 솔랑주 부부가 보내는 고별 편지 같은 것이었으리라.
쇼팽과 들라크루아 그리고 상드
루브르 미술관 2층의 전시실에는 쇼팽과 들라크루아의 초상이 나란히 걸려 있다. 두 사람의 우정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두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는 이유를 알 것이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과 상드의 초상화가 서로 다른 장소에 걸려 있는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쇼팽이 파리에 처음 왔을 때 불안하고 외로운 이 천재의 마음을 감싸주고 위로해 준 인물은 들라크루아였다. 들라크루아는 리스트, 상드와도 절친했지만 쇼팽과는 세상 누구와도 나눈 적 없는 친밀감을 공유했다. 전생에 쌍둥이였거나 짝이었다고 여겨질 정도로 닮은 영혼을 소유한 쇼팽에 대해 들라크루아는 이렇게 써놓았다. ‘나는 내가 몹시 사랑하는 훌륭한 인간 ‘쇼팽’과 한없이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한 예술가다.’
쇼팽과 들라크루아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곱슬머리에 따뜻하고도 고독한 눈빛을 가졌고, 조르주 상드가 증언하듯 우아한 정신과 훌륭한 태도를 공유했다. 우아한 취향과 안목까지도 서로 닮았던 그들에게 차이가 있다면, 들라크루아는 건강했고 쇼팽은 몸이 약했다는 정도였다.
들라크루아는 쇼팽보다 상드를 먼저 만났고,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한 친구였다. 상드가 뮈세의 연인이던 무렵, 들라크루아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상드를 그린 가장 유명한 초상화,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 꽃을 꽂은 그녀가 그려진 초상화는 바로 들라크루아의 작품이다. 하지만 쇼팽을 만난 뒤 들라크루아는 상드보다는 쇼팽과 더 가까웠다.
들라크루아와 쇼팽이 ‘영혼의 쌍둥이’와 같았다고 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쇼팽이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 들라크루아는 ‘오늘 쇼팽이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가졌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마쳤을 무렵, 들라크루아는 쇼팽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갈을 받았다. 쇼팽이 세상을 떠난 지 무려 10년이 지난 뒤에도 들라크루아는 그를 그리워하면서, ‘도대체 누구와 더불어 쇼팽 같은 천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탄식했다. 그의 아쉬움을 이해한 후세 사람들은 루브르에서 두 사람을 재회시켰다. 깊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신사이며 진정한 예술혼을 가진 영혼의 귀족 두 사람을.
들라크루아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예술계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화가다. 화가로서도 최고의 명성을 얻었지만, 작가보다도 더 글을 잘 쓰는 작가이자 음악가만큼이나 뛰어난 연주자였다. 들라크루아는 이십 대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기를 썼다. 뛰어난 문장력과 남다른 통찰력을 가졌던 들라크루아의 일기는 18세기 중후반 프랑스를 묘사한 탁월한 기록이다. 당대 예술가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며, 상드가 불태워버려서 정확히 알 수 없는 쇼팽에 관한 기록으로도 최고의 자료다. 또한 문학과 음악, 미술을 총망라하는 비평서로 읽어도 무방하며, 루소의 〈고백록〉에 필적하는 진솔한 기록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상드와 발자크
상드는 문학보다는 사생활이 유명한 여인이다. 하지만 상드만큼 당대의 남성 작가로부터 존경받은 여성작가도 드물 것이다. 발자크는 상드를 작가로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 존경했다. 서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지만, 발자크는 그녀의 정신과 용기를 존중했다. 발자크는 상드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당신은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바를 그리시지요. 저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린다고 자부합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옳습니다. 단지 제게는 저속한 존재들이 더 흥미로울 뿐입니다. 저는 그들을 확대시키고 추함과 어리석음이라는 방향으로 이상화시키지요.”
발자크가 상드에게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바를 그린다’고 표현한 것은 적확하다. 상드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해 언제나 투쟁해야 했고, 비난과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발자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삶을 살면 되었다. 문학에서는 인간의 내면 깊이 숨어 있는 속물 근성을 절묘하게 들춰내고, 현실에서는 모순으로 가득한 삶을 살면서 발자크는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소설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력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 발자크. 그는 인간적인 결점이 수두룩했으나 예술에서는 한 치 양보 없는 투사였다. 쉼 없이 블랙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다는 발자크에게 휴식이 있었다면 바로 살롱으로의 외출이었다. 그 외출에서 발자크는 상드를 만났고, 들라크루아와 쇼팽을 알았으며 리스트, 하이네와도 교류했다.
발자크는 마리 다구 백작부인의 살롱만이 아니라 노앙에서 여름을 보내기도 했다. 쇼팽과 리스트의 연주에 귀 기울이는 순간에도 그는 치밀한 시선으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은밀한 사인과 변화하는 시대의 흔적을 읽었다. 노앙에서 함께 여름을 보내곤 하던 화가 들라크루아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발자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더욱 그를 기다린다. 그는 내가 이곳에서 겪는 무료함을 떨쳐버리게 하는 요설가다.’
여하튼 발자크는 천재였다. 속세의 강물에 발을 풍덩 담근 천재. 상드가 숱한 남자들과 염문을 뿌릴 때 발자크는 허세와 탁월한 언변으로 명문가의 여성들과 스캔들을 만들었다. 그는 살아가는 내내 ‘명예와 재산과 사랑에 배고팠다.’
베티나 폰 아르님과 바그너가 닮은 구석이 있듯이, 상드와 발자크도 닮은 구석이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작품 활동이 그렇고, 사생활의 복잡함이 그렇고, 성장기의 복잡함도 닮았다. 발자크와 상드가 서로 절친하기는 했으나 연정을 품은 적이 없다는 것도 특이하다. 둘은 작가로서 서로 존경했으나 남자와 여자, 혹은 인간적으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법하다. 서로 너무 닮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발자크는 1837년 봄, 노앙에서 머무를 때 벽난로 앞에 혼자 앉아 있는 상드를 우연히 보았고, 그 장면을 이렇게 써놓았다. ‘나는 상드가 아무도 없는 넓은 방에 혼자 난로 옆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붉은 바지를 입고 있는 상드.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는 남자는 드물 것이다.’
상드의 손님, 투르게네프
상드는 러시아에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다. 피에르 르루와 함께 발간한 잡지 〈르뷔 앵데팡당트(Revue Independante)〉 덕분이었다. 하나 된 유럽을 추구하는 시대정신을 담았던 이 잡지에 상드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독일과 영국, 미국, 러시아의 작가와 비평가들이 이 잡지를 통해서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작가로 데뷔하기 전 상드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바 있다.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과 러시아 작가들은 상드에게 호감을 보였다.
러시아 작가 중에서 상드와 가장 친밀했던 작가는 투르게네프였다.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같은 작품으로 유명한 투르게네프는 노앙에서 몇 번의 여름을 보냈다. 투르게네프가 평생 사랑한 여인 폴린 비아르도가 상드의 딸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1843년, 스물다섯의 투르게네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공연을 하러 온 폴린 비아르도에게 반했다. 폴린은 이미 결혼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투르게네프는 평생 그녀를 변함없이 사모하며, 그녀를 따라 많은 시간을 서유럽에서 보내게 된다.
투르게네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베를린으로 가서 다시 헤겔의 철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투르게네프는 사상가 바쿠닌을 만나 함께 공부하며 절친해졌다. 바쿠닌 역시 상드를 존경했고, 투르게네프와 더불어 노앙에 초대받기도 했다. 투르게네프와 바쿠닌은 베를린에 머물던 시절 베티나 폰 아르님과 교류했다. 베를린의 투사이자 독일 낭만주의의 명사 베티나 폰 아르님 말이다.
베티나와 상드는 시대의 흐름에 적극 동참한 여성 작가이자 진보적인 투사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투르게네프가 연결한 것인지 혹은 베티나가 상드의 소설이 실린 잡지의 구독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년의 베티나는 상드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의 혁명적인 삶과 시대정신을 격려했다.
투르게네프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장과 예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무엇보다 그는 러시아 문학에서 제외되었던 농민을 문학 속으로 초대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을 작가다. 농민이 대대로 물려받은 지혜로운 모습, 순박한 삶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투르게네프는 〈사냥꾼의 수기〉라는 작품으로 러시아 문학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폴린 비아르도를 찾아 프랑스로 떠난 투르게네프는 1848년 파리에서 혁명을 목격했다. 혁명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유럽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아직 혁명의 기운이 도달하지 못한 러시아와 달리 프랑스는 이미 몇몇 혁명을 거치면서 그 빛나는 업적만큼이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경험한 뒤였다. 투르게네프가 지주의 아들이면서도 농민에 대한 애정을 가졌던 것은 서유럽의 혁명을 경험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투르게네프와 비아르도의 사랑은 몇몇 예술적 결실을 남겼다. 1867년, 마흔아홉의 투르게네프는 그녀와 함께 네 편의 오페레타를 탄생시켰다. 투르게네프가 가사를 쓰고 비아르도가 작곡한 〈너무 많은 여자들〉, 〈최후의 무녀〉, 〈크리카미셰〉, 〈겨울〉은 이들의 사랑이 빚은 작품이다. 이 작품들이 후세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평생에 걸친 짝사랑이 빚은 음악적 보석이라는 것만으로도 애틋하다.
두 사람의 사랑이 빚은 결실이 또 하나 있다. 1883년, 척추암을 앓고 있던 투르게네프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작품을 썼다. 〈종말〉이라는 이 작품은 투르게네프가 구술하고 폴린 비아르도가 정리한 작품이다. 투르게네프가 일생동안 지켜온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한 소설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상드와 빅토르 위고
상드는 빅토르 위고와 동시대 작가였다. 위고가 상드보다 2년 먼저 태어났고, 작가로서도 상드보다 훨씬 빨리 출발했다. 문학의 역사가 기록하듯 위고와 상드의 위상은 차이가 많다. 위고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핫한 작가다. 영화와 뮤지컬에서 화제의 중심에 있는 작품 〈레 미제라블〉과 〈노트르담 드 파리〉의 원작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위고와 상드는 피에르 르루라는 걸출한 지식인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위고가 작가로서 성공하게 된 것에는 사상가 르루의 역할이 컸다. 르루는 자유를 옹호하는 낭만주의자의 잡지 〈르 글로브(Le Globe)〉에 몸담고 있었는데, 젊고 재능 있는 위고에게 과감하게 지면을 내주었다.
위고는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 계획적으로 움직였다. 스스로 낭만주의 문학의 정점이 되기 위해서 ‘르 세나클’이라는 문학 집단을 만들었고, 뮈세를 비롯한 유망한 작가들을 그의 영향권 안에 두었다. 또한 희곡 〈크롬웰〉의 서문에는 낭만주의 문학의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의 자유’를 주장하는 내용을 실었다.
그는 ‘시대와 함께 행동한 위대한 작가’로 기억되지만, 프랑스가 온갖 정치적 변혁을 겪을 때 몇 번의 정치적 변신을 거쳤다. 처음에는 왕정을 지지하다가 후반부에 공화주의자로 변신했고, 말년에는 하층민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개선하기 위한 민중저항운동에 뛰어들었다.
1851년, 위고는 나폴레옹 3세가 일으킨 쿠데타에 저항하다가 망명길에 올라 무려 19년을 타국에서 지냈다. 프랑스 정부가 그를 사면했으나 위고는 프랑스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는 아직 오지 않았다며 사면도 거부했다. 후세 사람이 기억하는 ‘위대한 빅토르 위고’의 모습은 1848년 이후의 위고, 마흔여섯 살 이후의 위고다.
위고는 망명지인 영국의 저지 섬에서 그의 은인이자 한때 소원해졌던 피에르 르루를 다시 만났다. 르루는 위고의 재능을 높이 샀지만, 젊은 날의 위고에게서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파악하고는 등을 돌렸다. 망명지의 이웃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같은 공화주의자로서, 박해를 피해 망명한 동지로서 예전의 관계를 회복했다. 두 사람은 1853년 한 해 동안 날마다 바닷가를 산책하며 시대와 문학과 예술을 논했다. 르루는 이 만남을 《그레드 드 사마레즈》라는 책으로 남겼다.
위고와 상드는 똑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1832년 6월,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계기로 불붙었던 짧고도 비극적인 항쟁을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로 그려냈고, 조르주 상드는 〈오라스〉라는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혁명 속으로 뜨겁게 뛰어든 작품이라면, 조르주 상드의 〈오라스〉는 혁명을 파리 사람의 삶의 일부분으로 냉철하게 그리고 있다. 상드는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는 청춘과 노동자에게 애정을 품고 작품을 썼지만 폭력만큼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오라스〉는 1832년 6월 항쟁으로부터 9년 뒤인 1841년에 출간되었고, 〈레 미제라블〉은 1862년 세상에 나왔다. 같은 시기를 다루었으나 작품을 쓴 시기가 20여 년이나 차이가 나는 만큼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 1레미제라블 표지
- 2오라스 표지
상드는 명성을 욕심내기보다는 시대에 대한 의무를 더 중요하게 여겼고, 언제나 뜨거운 마음으로 시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노년에는 이 모든 변혁의 과정에 실망하며 시골로 돌아가 전원에 묻혀 살았다. 반면 위고는 시대적 의무를 조금 늦게 이행했고, 대신 죽는 날까지 시대와 함께했다. 어느 쪽이 자신의 명성에 도움이 되는지 저울질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말년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가 원하던 정치적 명성도 얻었다. 처음에는 명성을 향한 욕망에서 시작된 일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위대한 의지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실천했다.
작가로서의 노선은 한동안 달랐지만, 위고와 상드는 서민의 삶을 문학에 담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공유했다. 대부분의 프랑스인이 상드의 파격적인 사생활에만 관심을 두고 그녀를 비난할 때 위고는 훌륭한 작가로서의 상드에 주목했다. 가난한 사람과 노동자의 아픔을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선 용감한 투사로서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 ‘그녀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상드는 위대한 인간이 된다’고 표현한 것도 위고였으며, 상드의 장례식에서 그녀를 ‘영원불멸한 위대한 영혼’이라고 부른 것도 위고였다.
상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 피에르 르루
조르주 상드의 삶에,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피에르 르루는 누구일까? 그는 프랑스가 낳은 독특하고 위대한 사상가이자 작가, 비평가이며 노동자였다. 사적 재산의 점진적 폐지, 사랑과 결혼에서 여성의 평등, 윤회를 통한 불멸이라는 동양적 사상을 설파한 르루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형제애’를 인류의 표어로 삼았다. 상드가 정말 반할 만한 인물이었다.
피에르 르루는 문학과 철학의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노동자 출신 지식인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쇄소의 식자공으로 일했고, 자신의 경험을 살려 ‘피아노 타입(Piano-Type)’이라는 새로운 인쇄법을 발명해서 특허를 취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피에르 르루였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과 독일 · 이탈리아 · 영국 문학 그리고 산스크리트 어에도 해박했으며, 1830년에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위대한 석학과 문호로부터도 존경받았던 르루는 상드와 위고는 물론이고 발자크, 마르크스, 투르게네프, 바쿠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발자크는 르루를 ‘우리 시대를 뒤흔든 심오한 사상가’라고 평했고, 하이네는 사상가로만 알려진 르루를 ‘선량한 인물’로 표현했다. 마르크스는 아주 간단하게 ‘천재 르루’라는 표현으로 르루의 위대함을 기록했다.
19세기에 다시 부활한 ‘루소’ 같았고, 20세기로부터 미리 다녀간 ‘체 게바라’ 같았던 피에르 르루. 그는 무기를 들고 앞장 선 투사는 아니었지만 변혁기의 유럽인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할 정신적 토대를 마련해 준 투사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고, 언제나 민중과 노동자를 생각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으며, 명성이 높아져도 결코 그 달콤한 열매에 취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르루는 세상을 떠난 뒤 잊혀졌다. 상드의 작품을 거론할 때 이따금 등장하던 그는 유럽통합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다시 조명받았다.
상드는 어렸을 때 피에르 르루와 잠시 만난 적이 있었다. 르루의 사상에 매료되어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835년의 일이었다. 비평가 생트 뵈브의 소개로 르루를 만났을 때 상드는 뮈세와 헤어지고 쇼팽과는 아직 만나지 않았던 상태였다. 1837년 잡지에 연재되어 상드에게 명성을 안겨준 소설 〈모프라(Maupra)〉는 르루와의 만남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
상드는 1841년부터 잡지에 소설 〈콩슈엘로〉를 연재했다. 유럽통합 정신을 담은 이 소설은 〈르뷔 엥데팡당트〉지에 실려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찬사를 받았다. 상드의 소설에 독일과 러시아의 독자들이 많았던 것은 피에르 르루를 존경하는 유럽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또한 르루의 잡지가 해외의 독자들을 늘릴 수 있었던 것 역시 상드의 〈오라스〉, 〈콩슈엘로〉 같은 소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장에 총알을 품은 여인, 플로라 트리스탄
상드는 수많은 남자와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상드의 인생에는 훌륭한 여성과의 만남도 많았다. 초창기 프랑스 노동운동의 여전사였던 플로라 트리스탄과의 인연도 그 중 하나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다. 상드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트리스탄의 아버지는 스페인의 귀족이었다. 트리스탄과 상드는 똑같이 네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런데 상드의 부모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트리스탄의 부모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다. 사생아가 된 트리스탄은 어머니를 따라 파리 변두리로 옮겨가 인쇄소의 직공이 되었다. 어머니는 트리스탄이 인쇄소 사장 앙드레 샤잘과 결혼하기를 강요했다. 이 결혼에서 세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 중 셋째로 태어난 딸이 고갱의 어머니 알린느 샤잘이었다.
플로라 트리스탄도 상드처럼 어린 시절부터 루소의 책을 읽으며 성장했다. 상드가 뒤드방 남작과의 결혼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스물두 살의 트리스탄도 앙드레 샤잘과의 고통스러운 결혼으로부터 도망쳤다. 그 후로 5년 동안 그녀는 상류층 부인의 외국 여행을 수행하는 하녀 겸 비서로 살았다.
트리스탄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페루로 떠난 일이었다. 페루에서 그녀는 재산을 상속받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이국적인 풍물을 보았고, 페루의 원주민들이 어떻게 착취되고 있는지를 보았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노예들을 본 뒤로 다시는 그렇게 생산되는 설탕은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페루의 현실은 그녀를 일깨웠다.
페루에서 보낸 2년간의 경험을 그녀는 《파리아의 긴 여행》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파리아(Pariah)란 사생아 혹은 버림받은 하층민이라는 의미다. 트리스탄이 머물던 당시 페루는 막 독립한 상태였다. 모든 것이 급변하던 페루에서 그녀는 사상가, 노동운동가, 페미니즘의 선구자가 될 준비를 마쳤다. 프랑스로 다시 돌아올 때 그녀는 이미 사회 개혁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남성보다 더 용감한 노동운동가였다. 그녀는 심장 가까운 곳에 총알이 박힌 상태로 죽음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그녀에게 총을 쏜 사람은 남편이자 고갱의 외할아버지인 앙드레 샤잘이었다. 멋대로 집을 나간 아내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샤잘은 트리스탄이 《파리아의 긴 여행》을 내고 유명인사가 되자 파리에 있는 그녀의 거처를 알아냈다. 며칠동안 숨어서 기다리던 샤잘은 집을 나서던 트리스탄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총알은 치명적인 곳을 살짝 비껴 나갔고, 플로라는 위급한 수술 끝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심장 근처에 박힌 총알은 끝끝내 빼낼 수 없었다.
이 살인미수사건으로 트리스탄은 더욱 유명 인물이 되었다. 자신이 사생아임을 만천하에 당당히 알린 여성작가라는 타이틀 위에, 죽음을 무릅쓰고 남편의 박해로부터 독립한 여인이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얹혀졌다. 총에 맞아 누워 있는 그녀를 격려하려는 명사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상드였다. 두 여인, 참 공감하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트리스탄은 지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탄생된 것이 노동자를 위한 잡지 〈노동자 동맹〉이었다. 1843년에 창간된 이 잡지는 노동자에게는 25상팀, 경제적 사정이 좋은 구독자에게는 열 배에 가까운 2프랑에 판매되었다. 상드는 이 잡지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구독자였다.
이 잡지가 인쇄되는 과정 역시 험난했다. 파리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인쇄소들로부터 거절당한 뒤, 센 강변의 어느 작은 인쇄소에서 은밀하게 인쇄되었다. 순서를 무시하고 급하게 인쇄되는 바람에 한 남자가 발간하려던 잡지가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남자는 ‘이따위 잡동사니 글 따위를 인쇄하느라 내 잡지가 늦어진다’고 불평하다가 플로라 트리스탄에게 딱 걸렸다. 그녀는 ‘지금 인쇄되는 잡지는 인류의 역사를 바꿀 책’이라면서 남자에게 호통쳤다. 그녀에게 일장 연설을 들은 그 남자는 카를 마르크스였다. 트리스탄을 존경하던 독일의 사상가가 꼭 한 번 데리고 와서 소개시키겠다고 한 마르크스를 그녀는 그렇게 만났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1843년부터 44년까지 프랑스를 일주하며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심장에 총알이 박힌 채 그녀는 경찰의 감시와 정치가의 박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랑스 전역을 누볐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가는 곳마다 리스트의 연주회 포스터를 보았다. 마치 리스트가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여정이 겹치는 때가 많았다.
리스트의 연주회에 참석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지만 1844년 9월이 끝나갈 무렵, 그녀는 자신을 보살펴 준 르모니에 부부와 함께 리스트의 연주회에 참석했다. 소문대로 리스트의 연주는 격정적이고 아름다웠다.
공교롭게도 트리스탄은 그 연주회를 감상하던 도중에 갑자기 쇼크를 일으켰다. 신문에는 ‘작가이며 사회개혁가인 플로라 트리스탄 부인이 지난 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거장 리스트의 격정적인 연주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가 실렸다. 결과적으로 트리스탄은 리스트의 명성을 높이는 에피소드를 하나 만들어 준 셈이었다. 그녀는 그날부터 두 달간 병석에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플로라 트리스탄의 마지막 일정이 리스트의 연주회였다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리스트도, 트리스탄도 끊임없이 세상을 떠돈 사람이며 세상을 바꾸어 간 사람이다. 비록 마주 앉아 예술을 논한 적은 없으나 그들에게는 조르주 상드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트리스탄이 딸 알린느를 보살피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돌 때 상드는 잠깐이나마 그녀의 딸을 보살펴준 적도 있었다.
플로베르와 상드의 우정
노르망디 지방의 루앙을 생각하면 세 사람의 예술가가 떠오른다. 루앙 대성당을 그린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 남성용 소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현대 미술의 충격적인 서막을 열었던 마르셀 뒤샹, 그리고 〈보봐리 부인〉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 플로베르는 1821년, 루앙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진료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플로베르가 치밀한 성격과 완벽주의를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플로베르와 상드가 친구가 된 것은 다소 의외였다. 플로베르는 상드의 글을 읽으면 불쾌하고 괴로운 심경을 느낀다고 토로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감정은 플로베르만이 아니라 당대 거의 모든 남성이 상드를 향해 느낀 불편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플로베르와 상드가 우정을 나누게 된 계기는 플로베르가 고대 카르타고를 배경으로 쓴 〈살람보(Salammbo)〉라는 작품이 출간되었을 때였다. 평론가와 대중이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상드는 이 작품을 열렬히 변호하고 지지했다. 이때부터 플로베르는 상드와 편지를 교환하게 되었고, 상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들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공업도시 루앙에서 자란 플로베르는 돈과 성공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래서 그는 루앙에서 멀지 않은 크루아세라는 곳으로 옮겨서 무려 40여 년을 은둔자처럼 살았다. 상드가 노앙으로 몇 번이나 초대했지만 번번이 거절했던 플로베르는 1869년에야 마지못해 노앙에 잠시 다녀갔고, 4년 뒤에는 투르게네프와 함께 노앙에 한동안 머물렀다. 하지만 상드는 파리와 노앙을 오가는 길에, 혹은 일부러 플로베르를 찾아갔다. 한적한 시골 크루아세에 은둔하고 있던 플로베르의 집에서 두 사람은 새벽까지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함께 산책했다.
플로베르는 상드에게 보내는 편지에 ‘삶이란 내게 맞지 않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 라고 썼다. 가장 열정적인 자세로 뜨겁게 한 세상을 살았던 상드와, 완벽주의와 패배주의에 시달리던 플로베르의 우정은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멋진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쩌면 상드에게도 플로베르 같은 면모가 있고, 플로베르에게도 상드 같은 면이 있었으리라. 그들은 서로의 숨겨진 모습을 상대방에게서 보았던 것은 아닐까?
크루아세 집에는 이 은둔자를 위로하려는 동료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에밀 졸라, 공쿠르 형제, 알퐁스 도데, 그리고 플로베르가 문학적 아들이라고 불렀던 모파상이 크루아세의 단골손님이었다. 러시아의 투르게네프와 미국의 작가 헨리 제임스도 플로베르를 만나러 이곳을 찾았다. 특히 투르게네프는 플로베르에게 각별한 사랑과 존경을 바쳤다. 1877년에는 플로베르의 단편 〈수도사 성 쥘리엥의 전설〉과 〈에로디아〉라는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했고, 3년 뒤 플로베르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그를 추도하는 글을 썼다. 작가는 세상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플로베르는 평소에 말했지만, 투르게네프는 후세를 위해 플로베르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노앙의 인자한 부인, 상드
상드는 시대의 변화에 늘 적극적으로 동참했지만, 세상은 그녀가 예상하는 대로 변하지 않았다. 폭력으로 변질되는 혁명이 그녀를 가슴 아프게 했고, 순수한 정신이 오염되는 것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1848년 혁명이 지나간 뒤 상드는 노앙에 완전히 정착했다. 자연만이 그녀에게 평화와 안식을 선물했다. 여전히 그녀를 찾아오는 예술가를 맞이하고, 음악을 듣고 연극을 공연했다. 식물학과 지리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자연을 탐험했다.
‘사랑하라. 삶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 상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입증하듯 상드는 노앙에서 젊은 판화가 알렉상드르 망소와 마지막 사랑을 나누었다. 아들 모리스의 초대로 노앙에 왔던 망소는 상드의 연인이자 비서가 되었다. 1864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망소는 15년 동안 상드 곁을 지켰다.
평범한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경험과 열정을 쏟으며 살아서 그랬을까? 상드는 마흔 후반에 이미 할머니처럼 보였다고 한다. 노앙에서 보낸 그녀의 인생 후반부는 비교적 평온했다. 손자들을 위해 동화책을 쓰는 인자한 할머니로 살았으며, 여전히 하루에도 몇 통씩 편지를 썼고, 전원소설을 발표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모습도 여전했다. 상드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억울하게 희생되고 추방당한 사람들의 사면을 위해 노력했다.
환갑이 넘어서도 앵그르 강에서 냉수욕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철의 여인’ 같은 상드가 좀 지겨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토록 강인했으니 여성의 삶을 바꾸고,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시대의 흐름에 온 몸을 던질 수 있었으며 그토록 많은 사람과의 사랑을 감당할 수 있었으리라. 뜨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차갑기도 했고, 다정하면서도 냉정했으며, 강인하면서도 푸근했던 조르주 상드. 참 엄청난 인생을 살아낸 여인이다.
“산다는 것은 멋지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괴로움, 남편, 권태, 부채, 가족 그리고 가슴이 미어지는 고뇌와 끈질긴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은 도취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며, 행복입니다. 천국입니다. 아! 나는 맹세코 예술가의 생애를 살고 싶습니다. 나의 좌우명은 자유입니다.”
조르주 상드가 1830년 어느 여성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상드가, 이제야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21세기를 향해 보낸 편지 같다. 좌우명은 ‘자유!’, 상드답다. 발자크는 상드를 가리켜 ‘남자로 살았고 그러길 원했다. 상드는 여성의 역할을 뛰어넘은 인물’이라고 평했다. 반면에 에밀 졸라는 ‘상드는 그저 여자로 살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어느 쪽이 맞을까?
1876년 6월 8일, 조르주 상드가 세상을 떠났다. 상원의원인 빅토르 위고는 그녀를 추모하며 이런 글을 바쳤다. ‘상드의 죽음을 애도한다. 상드는 하나의 사상이다. 그 사상은 육체 너머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다. 조르주 상드는 세상을 떠났다. 바로 그래서 그녀는 또한 살아 있다.’ 그녀를 떠나보내며 투르게네프는 ‘상드는 우리 시대의 성인’이라고 추모했다. 상드와 성인, 그녀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다. 하지만 상드를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이라면 투르게네프의 말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한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어느 한 등산로를 택해 그 삶을 재구성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껏 세상이 ‘그토록 수많은 사랑’으로 상드를 조명했다면 이제는 ‘혁명가’로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상드의 삶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상드는 강한 것으로는 절대 굴복시킬 수 없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여는 것은 언제나 여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강한 것 앞에서는 더욱 강해지고, 약한 것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애로워지던 여인. 조르주 상드는 약한 것을 사랑한 강인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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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박흥순, 《프랑스 근대 사상과 소설》, 청동거울, 2000
- ・ 박흥순, 《소설과 역사》, 청동거울, 2002
- ・ 반스, 줄리언, 신재실, 《플로베르의 앵무새》, 열린책들, 2009
- ・ 상드, 조르주, 이재희, 《편지1》 ~ 《편지6》, 지만지, 2011
- ・ 요사, 마리오 바르가스, 김현철, 《천국은 다른 곳에》, 새물결, 2010
- ・ Sand, George, Story of My Life, SUNY,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