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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술가의 지
몽마르트의 연인, 벨 에포크의 증인

쉬잔 발라동

Suzanne Valadon
요약 테이블
출생 1865년
사망 1938년

위대한 예술가는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 교류하며 서로를 이끌어준다. 벨 에포크를 관통한 여인 쉬잔 발라동을 둘러싼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들도 그렇다.

쉬잔 발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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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를 관통한 여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향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던 19세기 말, 쉬잔 발라동은 밑바닥부터 인생을 시작해 화가로 생을 마감한 여인이다. 그녀에 관한 기록은 신분의 변천사와 복잡한 사생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던 소녀가 화가로 성공하게 된 이야기는 그 어떤 예술가의 삶보다 뜨겁다. 그녀의 남다른 생애에는 로트레크와 드가처럼 인간적인 격려를 보내준 사람도 있었고, 에릭 사티처럼 순수한 사랑을 선물해준 연인도 있었다.

위대한 예술가는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 교류하며 서로를 이끌어준다. 벨 에포크를 관통한 여인 쉬잔 발라동을 둘러싼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들도 그렇다.

에릭 사티, 그의 생애 마지막 장면부터 이야기해보자. 1925년 7월이 막 시작될 무렵 에릭 사티가 세상을 떠났다. 파리 근교 아르쾨유에 있던 그의 마지막 주거지는 남루했다. 27년 동안 아무도 들여놓지 않았던 방에서는 똑같은 모양의 벨벳 슈트 열두 벌과 여러 개의 검은 모자와 검은 우산 그리고 한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 세 통이 발견되었다. 그것이 심산유곡의 은둔자처럼 살았던 사티가 남긴 전부였다. 그의 음악처럼 그의 죽음 또한 에릭 사티다웠다. 사티가 남긴 세 통의 편지, 수신인은 모두 쉬잔 발라동이었다. 그녀는 에릭 사티가 사랑한 유일한 여인이었다.

사티의 방에서 나온 유품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쉬잔이 그려준 사티의 초상이고, 다른 하나는 쉬잔과 그녀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 그리고 사티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티의 초상은 쉬잔이 이 짧았던 사랑에 남긴 유일한 정표 같은 것이었다. 이 유품들은 쉬잔에게 전해졌는데, 훗날 쉬잔은 사진 왼쪽에 있던 사티를 오려냈다. 쉬잔은 왜 에릭 사티를 잘라냈을까?

카바레 ‘검은 고양이’

에릭 사티는 카바레 ‘검은 고양이(Le chat noir)’에서 악단을 지휘하고 피아노를 연주했다. 19세기 말 파리의 카바레는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공연장이었다. 특히 ‘검은 고양이’ 카바레는 표현의 자유가 무한정 보장되는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1881년 12월에 문을 연 ‘검은 고양이’는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추리소설 《검은 고양이》에서 이름을 빌려온 곳이다. 작가 알퐁스 도데와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그리고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 작곡가 샤를 구노와 쥘 마스네, 클로드 드뷔시도 즐겨 찾는 명소로 금방 유명해졌다. 일렁이는 가스등 아래서 단테 서클과 셰익스피어 서클이 문학과 예술을 치열하게 논하던 열기 또한 그곳을 명소로 만들어주는 매력적인 요소였다.

‘검은 고양이’의 절정기는 미구엘 위트릴로가 그림자 공연을 하고 사티가 음악을 연주하던 1892년이었다. 이 카바레의 성공은 또 다른 카바레 ‘오베르주 뒤 클루(Auberge du Clou)’가 문을 여는 계기를 만들었다. ‘오베르주 뒤 클루’의 주인은 미구엘 위트릴로와 사티에게 오프닝 공연을 의뢰했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이자 미술비평가인 미구엘 위트릴로는 쉬잔 발라동이 낳은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의 법적인 아버지다. 하지만 그는 쉬잔의 남편도, 모리스 위트릴로의 진짜 아버지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미스터리한 관계는 어떻게 된 일일까?

미구엘 위트릴로는 ‘검은 고양이’의 초창기에 쉬잔을 만나 연인이 되었다. 카바레는 스페인 사람인 그에게는 향수를 달래주는 공간이었고, 이제 막 몽마르트르에 입성한 쉬잔에게는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었다. 쉬잔은 미구엘 위트릴로와 함께 보낸 이 시절을 ‘예술가로, 보헤미안으로 보낸 최고의 청춘기’였다고 회상했다.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린 1889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림자 연극을 하며 몽마르트르에 다시 정착한 미구엘 위트릴로는 쉬잔에게 아버지 없는 아들 모리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호적에 모리스를 입적시켰다. 쉬잔에 대한 우정과 애정의 표현이었을까? 일설에 의하면 모리스의 아버지가 대가인 퓌비 드 샤반이거나 혹은 르누아르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그래? 그렇다면 샤반과 르누아르 사이에 내가 있었다고 쓰지 뭐!’ 하며 호적에 서명했다고도 한다.

에릭 사티의 유일한 연인, 쉬잔

에릭 사티는 쉬잔과 연인이 된 날이 1893년 1월 14일이라고 자세하게 기록했다. 파리의 끝자락에 편입된 몽마르트르는 몇몇 좁은 골목이 꼭대기의 샤크레 퀘르 성당으로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어느 골목에서나 예술가들은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서 마주치지 못하면 몇몇 카페나 카바레에서 대부분 만날 수 있었다. ‘검은 고양이’의 성공에 힘입어 새로 생긴 ‘오베르주 뒤 클루’ 카바레도 있었고, 사티가 집으로 가는 길에 자주 찾던 ‘디방 자포네(Le Divan Janonais)’도 있었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파리에는 자포니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에도 시대의 도자기를 감싼 포장지 그림인 우키요에는 이국적 신비로움으로 파리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고흐와 로트레크와 모네의 그림에는 자포니즘의 흔적이 많다. 로트레크는 집에서 일본풍의 옷을 즐겨 입었고, 모네는 훗날 지베르니의 집을 수많은 우키요에로 장식했다. ‘디방 자포네’는 바로 그 일본 열풍으로 탄생된 곳이었고, 몽마르트르의 예술가에게 사랑받는 곳이었다. 점묘파 화가 조르주 쇠라의 작품 중에 〈샤위 춤(La chahut)〉이라는 것이 있는데, 카바레 ‘디방 자포네’에서 공연하던 춤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사티는 ‘디방 자포네’에서 춤추고 있는 쉬잔을 자주 보았다. 그녀는 좋게 말하면 ‘몽마르트르의 공인된 뮤즈’였지만, 쉬잔을 그렇게 곱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티는 ‘오베르주 뒤 클루’의 오프닝 공연을 하던 날 쉬잔을 만났다. 그날 청중은 사티에게 야유를 보냈지만 쉬잔은 사티의 공연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사티에게 자신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현직 ‘모델’인 화가와 모델이 된 피아니스트, 사티는 그날이 다 지나기 전에 쉬잔에게 청혼했다. 그리고 쉬잔은 이틀 뒤 몽마르트르 코르토 가 6번지, 사티의 집으로 이사했다. 에릭 사티의 단 한 번뿐인 사랑이 시작되었다.

    • 1~3사티 뮤지움

사티는 수수께끼의 연인이었다. 그는 한 세계에 몰입하면 그 다음 세상은 잘 고려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은 뜨겁고, 풍성한 예술적 결실을 낳았다. 쉬잔은 사티의 초상을 그렸다. 그녀가 그린 최초의 유화였다. 사티도 오선지에 쉬잔 발라동을 그렸다. 그가 그린 쉬잔은 아주 모던한 만화 주인공 같다. 사티는 쉬잔에게 드뷔시를 비롯한 음악가들을 소개했고, 그녀를 위해 작곡하고 연주했다. 사티를 사랑하면서 쉬잔은 ‘음악이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사티는 그녀와 함께 사는 6개월 동안 무려 300통에 달하는 편지를 썼다. 마치 지령문처럼 만날 장소와 이유를 쓴 편지를 보낼 때도 있었고,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에도 편지를 써서 주었다. 평생의 사랑을 그녀에게 다 쏟아부었기 때문일까? 이 사랑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그들의 결별은 좀 사나웠다. 어느 날 사티가 쉬잔에게서 ‘어머니’를 보았고, 그리고 더 이상은 함께 지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결별의 이유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쉬잔의 쉼 없는 남성 편력이 이유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들이 결별할 때 쉬잔이 발코니에서 추락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티가 경찰에 자신이 떠밀었다고 자백했다는 설도 있고, 쉬잔이 사티를 공격하려고 하다가 뛰어내렸다는 설도 있다. 결별의 과정이 사나웠기 때문에 쉬잔은 사티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진 속의 에릭 사티가 잘려져 나간 것은 아닐까?

에릭 사티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는 개성 가득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에게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는 식상한 표현을 붙여준다는 것도 어쩐지 결례일 것만 같다. 사티는 고향 옹플뢰르에 살던 시절부터 노르망디 풍의 목조성당 ‘생트 카트린’ 미사에 열심히 참여했고 그레고리안 성가에 매혹되었다. 〈짐노페디〉, 〈그노시엔느〉 같은 그의 초기 작품들은 그레고리안 성가와 카바레 음악의 접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에릭 사티의 고향 옹플뢰르 생트 카트린 목조교회 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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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레 ‘검은 고양이’ 시절에도 그의 피아노는 한 구석의 가구처럼, 혹은 벽에 걸린 그림처럼, 공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있는 듯 없는 듯 떠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떠는 그 공간에 어울리는 ‘가구의 음악’, ‘구석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렇게 하찮은 신념이라니! 하지만 모두가 위대한 무엇을 추구하던 시대에 구석의 음악을 추구했다는 것이야말로 사티의 진정한 위대함이 아닐까?

몽마르트르 언덕길을 언제나 똑같은 벨벳 슈트를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고양이 우산을 지팡이 삼아 걸으며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치던 에릭 사티. 몽마르트르의 아이들은 그를 ‘가난뱅이 아저씨(Mousieur le Pauvre)’라고 놀렸다. 그것이 그를 완성시킨 ‘사티 스타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에릭 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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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는 스스로를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은 영혼으로 온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멋진 말이다. 포가 살아있었더라도 아마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994년 〈사티와 쉬잔〉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그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한 멋진 문장은 에릭 사티의 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기기 위해서?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를 띠고? 휴식 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갓난아이 때부터 내가 작곡한 음을 흥얼거렸지. 그래, 내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

서커스의 소녀, 모델이 되다

쉬잔 발라동의 본명은 마리 클레망틴 발라동, 1865년 9월 23일에 가난한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잡초처럼 성장한 소녀 쉬잔은 몰리에르 서커스단에서 곡예사로 일하게 된다. 1880년 3월, 불과 열네 살이던 쉬잔은 공중그네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쉬잔의 생애에서 ‘추락’이란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서커스단에서 나올 때 쉬잔은 그녀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추락은 경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리라. 그녀의 강한 자의식은 바로 그 추락의 기억이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생계가 막막해졌다. 하지만 한쪽 창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법. 잠시나마 생계를 위한 일에서 해방된 쉬잔은 튀를리 공원에서, 뤽상부르 공원에서, 미술관에서, 교회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열네 살 소녀의 그 짧은 휴식은 그녀 안에 잠든 예술혼을 일깨웠다. 잠깐 동안 누린 황홀한 자유로움 속에서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임을. 만약 쉬잔에게 추락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녀가 계속 서커스단에 머물렀다면 그녀의 인생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쉬잔에게는 이탈리아에서 온 클레리아라는 친구가 있었다.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던 클레리아의 주선으로 쉬잔도 모델이 되었다. 처음으로 쉬잔을 화폭에 담은 화가는 로댕의 친구이기도 한 퓌비 드 샤반이었다. 샤반의 작품 〈성스러운 숲〉에 모델로서 처음 등장하게 된 쉬잔은 자신이 위대한 작품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에 감격했다. 하지만 당시 화가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화가의 정부가 된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였다. 그녀는 샤반의 모델이자 어린 애인이었다. 쉬잔이 샤반과 결별하게 된 대목이 인상적이다. 쉬잔은 몇몇 드로잉을 샤반에게 보여줬다. 샤반은 그녀의 그림을 무시했고, 그 길로 쉬잔은 샤반을 떠났다.

쉬잔은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욕망에 이끌리는 대로만 산 여인은 아니었다. 푸른 눈과 뚜렷한 눈썹 그리고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쉬잔은 비록 가난하고 기댈 곳 없는 약자였지만 자신이 원할 때만 모델로 일했고, 한번 모델이 되면 최선을 다해 화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만큼 예술적 자질이 있었고, 자신이 예술의 한 부분이 된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19세기 말 화가들의 작품에는 쉬잔 발라동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퓌비 드 샤반이 그린 쉬잔과 르누아르가 그린 쉬잔, 로트레크가 그린 쉬잔은 사뭇 다르다. 쉬잔이 그린 몇 점의 자화상도 동일 인물일까, 싶을 정도로 다른 느낌이다. 그녀가 천의 얼굴을 가진 훌륭한 모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화가들이 그녀와 맺은 관계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1880년, 몽마르트르에서 쉬잔은 모델로서 본격적인 삶을 시작했다. 몽마르트르에서 모델이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몇몇 카페와 카바레 혹은 모델 시장에 나서면 쉬잔은 금방 발탁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평범한 듯하지만 모델로 서는 순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만의 분위기를 표현했다. 몇몇 무명화가들의 모델을 거쳐 쉬잔은 르누아르의 모델이 되었다.

르누아르는 쉬잔을 모델로 여러 작품을 그렸다. 1883년에 완성된 〈부지발의 무도회(Dance at Bougival)〉에 등장하는 쉬잔은 뺨이 복숭아 빛으로 물든 채 춤추고 있는 사랑스러운 소녀다. 이듬해 완성된 〈도시의 무도회〉에 등장하는 쉬잔은 좀 더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으로, 〈목욕하는 여인〉에서는 풍만한 몸매의 매력적인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르누아르의 작품에는 사랑스런 쉬잔, 수줍은 쉬잔, 희고 부드럽고 둥근 곡선을 가진 육감적인 쉬잔이 나온다. 그건 아마도 르누아르가 그녀를 모델로서, 또 여성으로서 ‘소비’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부지발의 무도회

르누아르, 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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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레크, 쉬잔 발라동의 거울

〈로트레크〉라는 영화가 있다.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의 생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상당 부분 쉬잔을 비추고 있는 영화다. 로트레크의 인생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전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고, 몇 번의 사고로 다리가 골절된 뒤 성장이 멈춰버렸다. 오로지 어머니의 사랑에 의지하며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낸 로트레크는 결국 예술에서 안식을 찾는다. 그림을 그릴 때 그는 현실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로트레크, 백작의 아들도 아니고 장애를 가진 청년도 아닌 로트레크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로트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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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많은 귀족의 아들에게 몽마르트르는 신천지이자 성지였다. 로트레크가 그린 그림이 매음굴과 서커스와 거리의 여인과 술 취한 사람들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가! 그 풍경을, 그 사람들을, 그들이 꼭꼭 감추고 있는 것들을 로트레크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소외된 여인의 상처를 로트레크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렸다. 로트레크가 그린 파리의 뒷모습은 벨 에포크의 뒷모습이다.

다른 화가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로트레크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로트레크의 집에서는 일요일 오후에 화가들의 모임이 열렸는데, 로트레크는 그 모임에 고흐를 초대했다. 몽마르트르의 여러 화가 사이로 무거운 캔버스를 들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 조용히 머물다 가던 붉은 머리의 화가를 쉬잔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무엇보다 고흐는 로트레크의 개성 강한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색채를 사용하는 방식과 대상을 포착하는 시선에도 영향을 받았다. 고흐가 화가들의 공동체를 구상한 것도 로트레크의 영향이었고, 그가 파리를 떠나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로 간 것도 로트레크가 그곳을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로트레크의 진가는 물랭루주의 포스터와 서커스 그림에서 나타났다. 포스터를 예술의 반열에 올린 화가, 그리고 서커스와 카바레의 여인들에게 애착을 보였던 화가. 로트레크는 쉬잔과 함께 서커스 장에 자주 나타났다. 몰리에르 서커스단과 페르난도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던 쉬잔이 관객으로서 바라보는 서커스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로트레크는 공중그네의 긴장감과 순간적 몰입 그리고 환호하는 관객이 있는 서커스에 매력을 느꼈고, 역동적인 순간을 포착한 작품을 여러 점 남겼다.

로트레크는 쉬잔을 여인으로서도 사랑했지만 예술가로서도 아꼈다. 쉬잔이 책 읽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자신이 읽던 책들을 빌려주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s)》 그리고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서 자주 낭송되던 보들레르의 시를 비롯한 시집들이 쉬잔에게로 건너갔다.

1886년, 로트레크는 쉬잔 발라동이 그린 드로잉을 우연히 발견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로트레크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쉬잔이 우연을 가장해서 자신의 그림을 발견하기 좋은 곳에 꺼내 놓았던 것이다. 로트레크는 ‘누구에게 배웠냐’고 물었고, 그녀는 혼자 습작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쉬잔의 그림에서 재능을 발견했다.

로트레크는 쉬잔의 그림을 가져다가 자신의 집 벽에 붙였다. 그런 다음 절친한 친구들을 불러, 누가 그렸는지 밝히지 않고 ‘이 그림 어때?’ 하고 물었다. 모두 ‘멋지다’고 말했다. 로트레크의 사랑법, 정말 멋지다!

로트레크는 그녀에게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남겼다. 그녀가 화가로서 우뚝 설 수 있도록 ‘쉬잔’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모델로 활동할 때는 주로 ‘마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그녀는 로트레크가 지어준 ‘쉬잔’이라는 이름을 좋아했다. 그 이름을 선물받기 전에 그린 그림에도 ‘쉬잔 발라동’이라고 서명을 다시 할 정도로. 1931년, 예순여섯 살의 그녀는 호적까지 완벽하게 ‘쉬잔 발라동’으로 바꾸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는 이름을 통해 사랑의 낙인을 새긴다. 루 살로메가 ‘루이즈’에서 ‘루’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그녀의 첫사랑 길로트 목사 때문이었고, 릴케가 르네 마리아 릴케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루의 사랑이 만든 일이었다. 로트레크도 그랬다. 그는 마리 클레망틴 발라동을 ‘쉬잔 발라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쉬잔은 로트레크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와 결혼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예술적 지평이 열린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녀가 어떻게든 귀족의 부인이 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녀는 태생의 상처를 지워줄 명예, 그 이전 세대로서는 꿈꾸기 어려웠던 신분 상승을 탐냈던 것일까? 그녀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는 로트레크였지만, 그는 결혼 자체를 거부했다. 쉬잔이 거짓 자살소동까지 일으켰지만 로트레크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쉬잔이 아들을 데리고 갈 곳이 없어 그의 집을 찾아오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받아들였고, 이따금 경제적 도움도 주었다.

로트레크가 그린 쉬잔 발라동은 세상만사에 심드렁한 여인, 얼핏 보면 모든 것을 초월한 여인 같기도 하다. 〈숙취〉라는 작품에는 쉬잔이 가진 수많은 이야기를 그려낸 로트레크의 시선이 보인다. 숱한 예술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독한 술 ‘압생트’를 앞에 놓고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여인, 한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는 너끈히 탄생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이다. 지금 이 순간은 지쳐 있지만 생에 대한 의지는 더욱 거세어질 것 같은 쉬잔이 그림 속에 있다. 르누아르의 작품 속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고단함과 일상의 많은 것을 초월한 모습이 동시에 그려진 쉬잔의 모습. 로트레크가 아니면 누가 쉬잔 발라동을 이렇게 그려낼 수 있을까? 로트레크가 그린 또 하나의 쉬잔, 〈화장분〉도 탁월하다. 이 작품은 고흐의 동생이자 화상이던 테오가 구입했다.

숙취

로트레크,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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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 쉬잔의 스승이 되다

쉬잔의 인생에서 가장 고맙고 가장 독특한 인물은 에드가 드가였다. 주로 발레리나를 그린 드가는 얼핏 여성 예찬론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드가는 여성 혐오론자에 가까웠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토록 많은 여성을 그렸다니!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인 드가는 초기에 역사적인 인물을 그렸다. 하지만 1862년 롱샹 경마장의 말과 기수, 관중을 그린 이후로 작품세계에 뚜렷한 변화가 보였다. 움직이는 사람, 무대에 선 사람의 순간적인 움직임을 포착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발레는 중산층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고, 발레리나는 요즘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1840년대에 상용화된 사진도 발레리나의 인기를 부추겼다. 발레리나의 사진첩이나 그림책이 불티나게 팔리자 화가들도 움직임에 관심을 보였다. 드가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작품이 독특한 구도를 가진 것은 사진의 영향이다. 발레리나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드가의 화폭에 담긴 것도 역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쉬잔이 그림에 재능을 가진 것을 알게 된 로트레크는 그녀를 드가에게 보냈다. 모델로서는 수없이 화가들 앞에 섰던 쉬잔이지만, 그림을 들고 화가를 만나는 일은 처음이어서 무척 긴장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드로잉 몇 점을 드가에게 보여 주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드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쉬잔도 우리 중 하나가 되었군!’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드가는 쉬잔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쉬잔의 그림을 세 점이나 구입했고, 식사할 때 바라보는 벽에 쉬잔의 그림을 걸어놓기도 했다.

쉬잔은 드가를 만난 그날을 ‘내가 날개를 달던 날’이라고 표현했다. 서커스단의 소녀에서 모델을 거쳐 이제는 화가로서 당당히 세상에 등장한 쉬잔. 그녀는 자신을 화가로 만들어준 드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또 했다. 드가는 ‘왜 쉬잔은 나를 볼 때마다 고맙다고 하지?’라고 의아하게 여겼다.

드가와 로트레크의 격려를 받으며 쉬잔은 화가가 되었지만 퓌비 드 샤반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지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드가는 쉬잔이 새로운 그림을 가지고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좀처럼 새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드가는 주저하는 쉬잔을 격려하고 기다려 주었다. 드가는 아마도 쉬잔의 육체에 관심이 없었던 유일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녀를 모델로 삼은 적도 없었고, 오로지 드가 자신처럼 그림을 그리는 동료 화가로 대우했다.

1891년, 쉬잔은 드가의 주선으로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1895년과 1896년에는 볼라르 화랑에서 누드를 그린 동판화 12점을 전시하게 된다. 쉬잔의 그림 몇 점이 예상보다 훨씬 높은 값에 팔린 적이 있는데 수집가들은 그 작품이 드가의 작품인 줄 알고 높은 가격을 지불했다고 한다. 드가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쉬잔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 어떤 여성과도 좋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던 드가였지만 쉬잔 발라동과는 스승과 제자로서 멋진 관계를 이루었다.

몽마르트르의 눈물, 모리스 위트릴로

1883년 겨울, 열여덟의 쉬잔은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밝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쉬잔도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퓌비 드 샤반과 르누아르를 비롯해 몽마르트르의 예술가 여럿이 아이의 아버지로 거론되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모리스 발라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후에 미구엘 위트릴로가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주어서 ‘모리스 위트릴로’가 되었다.

몽마르트르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는 이름을 얻는 과정이 보여주듯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과장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흰색이 많이 들어간 위트릴로의 그림은 어쩌면 그가 눈물 어린 눈으로 몽마르트르의 골목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늘 부재 중인 엄마를 찾아 몽마르트르의 골목을 뒤지고 다니던 위트릴로는 어릴 때부터 술을 마셨다. 위트릴로가 아주 어릴 때 쉬잔은 생존을 위해 아들을 떼어 놓고 나와야 할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되기에는 너무 어렸던 그녀는 아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술과 남자에 취해 산 적이 더 많았다. 쉬잔이 부유한 주식거래인 폴 무시와 결혼하며 생활이 조금 안정된 뒤에도 그 습관은 고치지 못했다. 결국 위트릴로는 열여섯 살에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

쉬잔이 에릭 사티와 함께 살던 1893년, 위트릴로는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엄마를 빼앗긴 소년은 사티의 집 앞에 죽은 고양이를 가져다 놓을 정도로 세상 모든 존재에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티는 위트릴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도 어린 시절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이다.

위트릴로는 처음에 품은 증오심과는 달리 점점 사티를 좋아하게 되었다. 위트릴로에게 화가가 되려는 꿈이 있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았던 사람도 사티였고, ‘너는 20세기의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라고 격려해준 사람도 사티였다. 언젠가 사티가 위트릴로에게 새 모양의 조각품을 준 적이 있다. 삼촌한테 받은 소중한 조각품을 위트릴로에게 주며 사티가 말했다. ‘이 새가 어떻게 우는지 아니? 여기는 아니야, 어딘가 멀리! 여기는 아니야, 어딘가 멀리! 이렇게 운단다.’

두 사람 다 쉬잔 발라동을 그리워했고, 그녀에게서 어머니를 보았고,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갈구했고,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미워했다. 위트릴로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멀리 이사 간 사티를 찾아가 그의 방에 가만히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자신의 집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사티였지만 모리스 위트릴로만은 예외였다.

술주정꾼 위트릴로를 이해하고 친구가 되어준 또 한 사람은 화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였다. 이탈리아 출신의 모딜리아니는 1906년 몽마르트르에 나타났다. 르픽 가의 술집에서 모딜리아니와 위트릴로는 처음 만났다. 위트릴로는 이미 그 일대에서 유명한 난봉꾼이었다. ‘모모’라고 불리던 그는 술만 취하면 어머니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었다. ‘엄마는 그림을 그린다’, ‘엄마가 나를 술주정꾼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그림을 강요했지만 난 그림이 뭔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는 공중그네를 탔는데 엄마가 만약 계속 공중곡예를 했다면 나는 서커스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했겠지’. 위트릴로의 주정을 몽마르트르 사람들은 지겹도록 들었다.

모딜리아니는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위트릴로에게 연민을 느꼈다. 파리로 처음 올 때만 해도 가족들이 준 돈으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살던 모딜리아니는 그에게 이따금 술을 사주었다. 술꾼들답게 술병을 옆에 끼고 생 피에르 공원이나 테르트르 광장 같은 곳에서 취해 있거나 소란을 피우다가 파출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모딜리아니는 위트릴로를 진심으로 이해한 친구였다. 모두가 자신의 예술관을 목청 높여 이야기하고 모두가 위대한 천재처럼 행세하는 시대였지만, 위트릴로는 좀 달랐다. 그림을 그리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술이 깨면 다시 붓을 들었다. 모딜리아니는 그 모습을 좋아했다.

쉬잔 발라동과 모리스 위트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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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릴로의 백색시대

위트릴로가 알코올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쉬잔은 비로소 엄마다운 엄마가 되었다. 치료 요법의 하나로 병원에서 그림을 권하자 쉬잔은 아들에게 그림 도구를 선물해 주었고, 데생을 가르쳐 주었다.

사실 위트릴로는 예전부터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어머니와 같은 화실에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면 싫어할까 봐 그 꿈마저 감춰야 했다. 가엾은 위트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위트릴로는 삶의 출구를 찾았다. 캔버스 위에 색을 칠하고 또 칠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림은, 늘 취한 상태로 바라보던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그리는 것으로 발전했다. 위트릴로는 사람을 거의 그리지 않았고 풍경만 그렸다. 반면에 쉬잔은 풍경은 거의 그리지 않았고 사람만 그렸다. 쉬잔과 위트릴로를 이해하는 열쇠가 어쩐지 거기에 들어있을 것 같다.

위트릴로의 그림에는 유난히 흰색이 많이 쓰였다. 다른 화가들이 쓰는 흰색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그가 사용한 흰색은 회반죽과 아교를 흰색 물감에 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위트릴로는 그것을 ‘침묵의 색’이라고 불렀다. 하얗고, 하얗고, 또 하얀 위트릴로의 그림. 모르긴 해도 거기엔 눈물과 알코올도 적잖게 섞여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작품에서 시든 꽃내음이 풍겼으면 좋겠다. 황폐해진 사원의 꺼져버린 촛내음이 풍겼으면 좋겠다.”

위트릴로는 이렇게 말했다. 위트릴로의 그림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암호와 같다. 그가 그리는 교회는 대체로 작은 마을의 소박한 교회였다. 길을 그려도 평평하고 너른 길 대신 가파른 언덕이나 남들이 눈길을 두지 않을 작은 뒷골목만 그렸다. 그가 그린 거리 풍경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몽마르트르 예술가들의 아지트 ‘라팽 아질(Lapin Agile)’을 그린 작품에도 멀리 지나가는 행인만 보일 뿐 사람들의 흔적이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닫혀 있는 문, 부서진 창틀, 깨어진 유리창, 낡아서 결이 다 드러난 흰 벽 같은 것만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에게 세상은 그렇게 차갑고, 굳건히 닫힌 문처럼 단절되고, 깨어진 창문처럼 상처 많은 곳이었으리라.

흰 벽에 애착이 많던 위트릴로는, ‘만약 파리를 떠난다면 건물의 회벽 한 조각을 가지고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댈 벽이 없었던 그의 아픔이 헤아려진다.

위트릴로의 ‘백색시대’ 작품들은 인기가 높았다. 1913년 브로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백색시대를 결산하는 이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그 이후로 위트릴로의 작품에서는 흰빛이 점점 엷어졌다. 전에 없던 색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1년에는 어머니 쉬잔과 함께 2인전을 열어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화가로서 자리 잡으면서 위트릴로는 유년기의 상처를 조금씩 극복하기 시작했고, 어머니를 원망하던 마음도 점점 엷어졌다. 그 증거처럼 작품에도 사람이 하나씩 나타나고, 여인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조금씩 벗어나자 위트릴로의 그림은 힘을 잃었다. 외로움과 불행이 그의 붓이었고, 빛나는 물감이었고, 캔버스였던 것이다. 그 대신 위트릴로는 안정된 가정을 꾸렸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벗어났다. 쉬잔도 비로소 아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두유마을의 교회

모리스 위트릴로의 백색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위트릴로는 교회를 그리는 것을 기도하는 일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외롭게 성장한 위트릴로는 자신처럼 외로운 골목길과 이름 없는 시골 교회를 자주 그렸다. 화면에 가득 배어 있는 흰색은 마치 위트릴로의 외로움, 위트릴로의 눈물 같다.
위트릴로의 소년시절은 외로웠지만 말년은 풍요로웠다. 1922년에는 디아길레프의 발레를 위한 무대미술에도 참여했고, 1950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앙리 마티스와 더불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참가하기도 했으니, 그만하면 나쁘지 않은 삶이었을 것이다.
쉰 살이 되어서야 위트릴로는 결혼했다. 그리고 나머지 생을 비교적 행복하고 안정감 있게 살았다. 예순여덟 살의 엄마와 쉰 살의 아들은 비로소 안전하게 분리되었다. 위트릴로의 작품 중에 〈생 피에르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쉬잔 발라동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모리스 위트릴로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이 교회에 자주 왔고,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울다 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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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그리고 자화상

쉬잔 발라동을 흔히 후기인상파 화가로 규정하지만 그런 분류는 별로 의미 없는 일이다. 모델에서 화가가 된 드문 케이스이며, 여성이 그린 여성의 누드를 선보인 인상적인 화가로서도 쉬잔 발라동은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여성의 누드는 르네상스 이후로 예술가들이 즐겨 다룬 소재였다. 남성 화가가 그린 여성의 누드에서 음험한 시선을 완벽하게 제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성의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다루거나 사물처럼 비하하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쉬잔이 그린 누드는 탐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한 여인이 살아온 시간이 담담히 새겨진 이력서였다. 아름답지도 않고 만지고 싶지도 않지만, 그 몸에 새겨진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은 누드다. 여성을 잘 그리는 화가는 여성의 슬픔을 잘 아는 화가라는데, 쉬잔은 그녀 스스로 모델이었고 화가였으니 누구보다 여성을 잘 알았다. 몸에 새겨진 이력을 캔버스에 불러내는 능력도 탁월했다.

쉬잔이 그린 몇몇 자화상이 있다.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를 낳던 1883년에 그린 자화상이 최초였다. 짙은 눈썹, 커다란 눈망울,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그리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서 묶은 열여덟의 쉬잔 발라동이 담겨 있다. 1917년에 그린 자화상은 고갱의 그림처럼 강렬한 선으로 그려져 있다. 세상을 향해 스스로 가슴을 드러낸 이 자화상은 한편으론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당당함을 느끼게 하고 한편으론 애잔한 느낌을 준다.

쉬잔의 자화상에는 다른 화가와는 구별되는 자기 정체성이 나타난다. 아름다움에만 집착하지 않는 강단도 보이고, 나이든 육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대담함,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림 없는 자의식이 드러난다. 그녀의 작품에서 강렬한 선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고갱의 작품을 접한 뒤로 고갱의 강렬한 색채와 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도 좋아했다. 1922년에 그린 〈기대어 있는 여인의 누드〉에 그려진 얼굴은 마치 고갱이 그린 타히티 여성과 닮았다.

쉬잔은 세상을 떠나던 1938년에도 자화상을 그렸다. 처진 가슴을 드러낸 노쇠한 여인이지만 갈매기의 날개 같은 강렬한 눈썹과 초연한 눈빛은 여전히 생생하다.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자기 자신을 그린 여인, 쉬잔은 그만큼 강인하고 당당했다.

쉬잔의 작품 속 인물들은 눈빛이 살아 있다. 거친 물살을 헤치고 올라가야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그녀의 삶이 그랬듯이, 심지어 그녀가 그린 고양이의 눈빛마저도 두려울 정도로 강렬하다.

파렴치한 아담, 당당한 이브

1896년 쉬잔은 은행가 폴 무시와 결혼했다. 무시는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었고, 에릭 사티의 친구이기도 했다. 무시는 쉬잔을 예술가로서 존중하고 아꼈다. 쉬잔을 위해 시내 중심가의 화려한 아파트를 구해 이사했지만 그녀가 이따금 몽마르트르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안 뒤에는 다시 몽마르트르에 작업실을 만들어 주었다.

코르토 가 12번지, 쉬잔이 아들과 함께 머물던 작업실은 오래 전에는 르누아르의 화실이 있었고, 나중에는 화가 라울 뒤피의 화실이 된 곳이다. 지금은 몽마르트르 뮤지움이 되어서 쉬잔 발라동과 모리스 위트릴로, 그리고 쉬잔을 둘러싼 많은 예술가의 작품과 이야기를 품고 있다.

폴 무시와의 결혼생활에서 쉬잔은 정신적 안정을 찾았다. 남편이 제공하는 경제적 안정과 격려 속에서 그녀는 누드와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1908년, 쉬잔은 〈아담과 이브〉라는 역작에 도전한다. 이브의 모델은 그녀 자신이었지만 아담을 그리기 위한 모델이 필요했다. 아들의 친구이자 아직은 서투른 화가였던 앙드레 위테르가 모델이 되었다. 위테르를 그리는 동안 그녀는 아들보다 어린 모델과 사랑에 빠졌다. 쉬잔을 모델로 삼았던 남자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내심 많은 남편도 더 이상은 쉬잔을 포용하기 어려웠다. 13년 동안 이어진 첫 결혼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그린 이 그림은 그녀가 어떤 화가인지를 보여준다. 선악과를 따고 있는 이브의 표정에는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는 그녀의 손목에 겹쳐져 있는 아담의 손은 비겁하다. 아담의 손은 얼핏 보면 사과를 따는 이브를 말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빨리 따!’ 라고 선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원해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라 이브가 주었기 때문에 먹었다는 변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손이다. 그림 속의 이브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당당한데 아담은 부끄러워하며 가리고 있다. 쉬잔에게 남자란 그런 존재였을까? 그림 속 아담의 모델은 앙드레 위테르였지만, ‘아담’ 속엔 그녀가 만난 모든 남자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아담과 이브

쉬잔 발라동,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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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테르는 낮에는 변전소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그림을 그렸다. 저녁마다 몽마르트르에 나타났던 그는 작은 피카소처럼 행동했다. 피카소는 그 즈음에 배관공이 주로 입던 푸른색 작업복에 목수의 작업용 벨트를 두른 차림으로 몽마르트르를 활보했다. 어차피 작업복을 입어야 했던 위테르에게 피카소 풍의 옷차림은 아주 적절했다. 몽마르트르 예술가들이 모여 저녁을 보낼 때, 화가로서 특별한 입지가 없으면서도 위테르는 늘 참석했다. 피카소의 끈질긴 권유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지 않았던 모딜리아니와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위테르와 사랑에 빠진 쉬잔은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이전에는 자화상을 그릴 때나 작품 속에 자신을 등장시킬 때 한 번도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지만, 〈아담과 이브〉에 등장하는 ‘이브’는 아름답게 그렸다.

쉬잔의 새로운 사랑에는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험담에 초연한 쉬잔도 마음이 흔들렸다. 더 큰 문제는 어린 연인과 아들의 불화였다.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쉬잔과 위테르는 서로에게 모델이 되어주며 세상과 상관없이 살았다. 만난 지 5년 만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부부가 되었다. 쉬잔은 마흔아홉 살, 남편 앙드레 위테르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위테르는 쉬잔에게서 마음이 떠나버렸다. 늙은 아내의 권위와 명성은 여전히 필요했지만 그녀와 함께 늙어가려는 생각 같은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젊은 남편은 늘 돈이 필요하다며 그녀를 괴롭혔다. 나중에는 그녀의 그림까지 내다 팔았다. 그래도 쉬잔은 위테르의 패악을 견뎠다. 그녀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쉬잔은 두 번째 남편 앙드레 위테르와 이혼했다. 1928년의 일이었다.

반쯤 부서진 성 그리고 완전한 영광의 성

쉬잔 발라동은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한때 풍족하던 삶도 기울었고, 아들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났으며, 세상에는 날마다 놀랍고 새로운 것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녀는 서서히 잊혀졌다. 뜨겁고 화려하던 쉬잔 발라동은 시든 꽃처럼 말년을 보냈다. 반쯤은 외롭게, 반쯤은 평화롭게······.

쉬잔이 말년에 리옹 북쪽의 작은 마을에 있는 ‘반쯤 부서진 성’을 구입했다는 건 일종의 쓸쓸한 자기 확인이었는지도 모른다. 1923년 11월 14일, 쉬잔 발라동은 앙드레 위테르의 이름으로 세인트 버나드 성을 샀다. ‘저주받은 삼위일체’라는 모욕이 따라다니던 파리에서 벗어나 작업에 몰두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고, 아들 위트릴로의 정신적 안정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어쩌면 쉬잔을 따라다니던 근본적인 결핍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외쳐도 끝끝내 채울 수 없었던 그 무엇, 그녀가 유명한 예술가가 되어서도 채울 수 없었던 그 무엇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것을 단순히 귀족의 칭호라든지 명성, 혹은 기품 있는 삶에 대한 동경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쉬잔은 죽은 뒤에 ‘완전한 영광의 성’을 소유하게 되었다. 1938년 4월 19일, 영욕의 세월을 마감한 쉬잔은 몽마르트르에 살았던 유명한 예술가들이 묻히는 생 피에르 교회에 영원히 잠들었다. 훗날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 자크 드랭 같은 명사들도 그곳에 묻혔다. 쉬잔 발라동 장례식의 조사는 전 수상이던 에두아르 에리고가 했고, 파리의 유명 인사들이 모여들어 쉬잔 발라동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평생이 걸리기도 하고, 평생 찾지 못하기도 한다. 쉬잔은 자신을 잘 알았고, 자신의 욕망도 잘 알았으며, 자신의 결핍도 잘 알았다. 그녀가 그린 〈이브〉처럼 쉬잔은 자신을 향한 온갖 손가락질에도 꿋꿋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거리낌 없이 살았다. 그것이 파괴적일지라도 자신의 영혼을 충족시키는 것이면 움직였고, 그렇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편견으로 가득한 기득권층을 자신의 방식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고양이에게 캐비아를 먹이거나, 귀부인들이 화려한 보석으로 만든 브로치를 달 때 당근으로 만든 브로치를 다는 방식으로.

쉬잔 발라동은 맨발의 투사, 진흙탕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마침내 이긴 격투기의 승자 같다. 세상에 끊임없이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며 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투철하게 살아냈다. 어항에 갖힌 금붕어 같은 삶이 아니라, 천적인 메기와 더불어 실려 가는 청어처럼 세상에 함몰되지 않으려 했던 여인.

쉬잔이 벨 에포크의 파리, 몽마르트르에 살았던 것은 행운이었다. 벨 에포크는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이끌어주고 그 관계를 통해 서로가 아름답게 개화되던 시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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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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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라 집필자 소개

‘세상의 모든 음악’을 집필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방송작가. 지은 책으로는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오늘의 오프닝》, 《세상에 빛나지 않는 별은 없어》, 《위로》, 《나를 격려..펼쳐보기

출처

예술가의 지도
예술가의 지도 | 저자김미라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예술가들은 서로 영향을 받는다. 같은 시대 예술가들은 물론이고,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장소, 다른 공간에서도 예술가들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7명의 생애를 중..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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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쉬잔 발라동예술가의 지도, 김미라,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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