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

1840년대의 유럽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형국이었다.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고, 새로운 사상이 탄력을 받았으며, 변화에 대한 요구가 뜨거운 시대였다.

예술에도 커다란 변화와 진전이 있었다. 하나 된 독일인을 위한 음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이는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존경하는 작곡가 베버에게서 그 희망을 보았다. 열세 살 때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본 바그너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닫게 된다. 독일인에 의한 독일인의 음악을 작곡하고 지휘하는 미래의 자신을 그리게 된 것이다.

바그너의 꿈은 셰익스피어처럼 위대한 극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바이로이트에 자신만의 극장을 지은 바그너는 공연 중간에 관객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객석의 통로를 없앴다. 어두워서 나갈 수 없도록 조명까지도 꺼버렸다고 한다. 음악 속에서 자신의 제국을 건설한 독재자, 바그너는 위대한 음악가인 동시에 파렴치한 인물이었다. 훗날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차용한 것은 바그너에게서 음악적 독재자의 기질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드레스덴 극장의 음악감독이었던 바그너는 1848년 5월에 일어난 드레스덴 봉기에 적극 가담했다. 출구 없는 절망감에 갇힌 세대들을 지휘하며 바그너는 끝까지 바리케이드를 사수했다. 하지만 혁명을 주도한 세력에겐 미래에 대한 확신도, 작전도 없었다.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주동자였던 바그너도 드레스덴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했다. 12년간의 망명생활 동안 바그너는 생활고 속에서도 게르만의 고대 신화를 바탕으로 한 걸작들을 작곡했다.

바그너의 명성을 구축해 준 결정적 후원자는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였다. 루트비히 2세는 ‘신데렐라 성’으로 잘 알려진 노이 슈반스타인 성을 지은 왕이다. 예술적 감각이 탁월했던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뮌헨에 저택도 구해주었다. 노이 슈반스타인 성의 내부를 〈로엔그린〉과 〈탄호이저〉로 장식했을 정도로 바그너 마니아였다. 루트비히 2세가 아버지뻘 되는 바그너에게 동성애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의 경제적 후원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코지마 폰 뷜로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딸이자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였다. 결국 코지마는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 ‘코지마 바그너’가 되어 훗날 바그너가 남긴 바이로이트 극장을 정착시켰고, 바그너 음악을 계승하는 최고의 공헌자가 되었다.

바그너의 연인이 등장하자 루트비히 2세는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바이에른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예술적 취향에 재정을 탕진하는 루트비히 2세에 저항감을 갖기 시작했다. 여론은 바그너가 젊고 순진한 왕을 꼬드겼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결국 바그너를 추방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거세졌고,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와 결별하게 된다. 하지만 루트비히 2세의 바그너 사랑은 여전히 지극해서, 훗날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지을 때 거액을 희사하기도 했다. 노이 슈반스타인 성에서는 지금도 한여름이면 ‘바그너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루트비히 2세 다음에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바그너의 명성을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스위스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과 철학에 매료되었다. 니체는 바그너를 찬양하는 저서를 써서 바그너의 명성을 굳건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와 독재적 성향, 그리고 변장한 탐욕에 절망한 니체는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책을 쓴 뒤 바그너와 결별했다.

바그너에게서 베티나의 향기가 난다. 파렴치하며 동시에 위대한 예술가. 불멸에 대한 야망을 숨기지 않았고, 그것을 위해 주변의 사람들을 적극 활용하는 수완을 가졌고, 혁명적이었고, 개인으로서는 비난받을 일들이 많았으며,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남겼고, 새로운 유형의 예술작품들을 남겼으며, 비난과 찬사와 존경을 동시에 받았다는 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