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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상업성과 예술성을 조화시킨 감독의 표상
구로사와 아키라
黒澤明출생 | 19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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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8년 |
국적 | 일본 |
대표작 | 〈스가타 산시로〉, 〈가장 아름답게〉, 〈속 스가타 산시로〉,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내들〉, 〈라쇼몽〉, 〈이키루〉, 〈7인의 사무라이〉, 〈가게무샤〉 |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왜 그토록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존경을 바치느냐고 묻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영화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말이다. 이 찬사의 주인공인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계 영화계의 전설이 된 영화감독으로, 일본 영화는 그로 인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10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화가가 되려던 그는 18세 때 도슈사 미술학교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했으며, 국전에서 두 번이나 입선할 정도로 전도유망한 청년 화가였다. 그러나 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하여 좌익 활동을 하다 1928년 치안유지법에 걸려 도피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형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그는 변사였던 형의 영향으로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36년 PCL 영화제작소의 조감독으로 채용되면서 영화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32세에 〈적막〉과 〈눈(雪)〉으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입상했고, 34세 때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유도 영화 〈스가타 산시로〉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흥행에 성공한데다 작품성도 높다는 평가를 받으며 2년 후 속편이 제작되기에 이른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그는 〈가장 아름답게〉, 〈속 스가타 산시로〉,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내들〉 등 네 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전쟁이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 속에서 국수주의적 색채, 충(忠)과 의(義)라는 주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가장 아름답게>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선전 영화이며, 〈속 스가타 산시로〉에는 반미 감정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전쟁 장면 묘사 등 직접적인 전쟁 선전 수단이 되는 것을 피했고,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내들〉에서는 일본 전통극 형식인 노의 음악과 리듬을 도입하는 등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노와 가부키 같은 일본적인 극예술, 사무라이 등을 화려한 색채 감각과 독특한 영화적 리듬, 강렬한 콘트라스트 등 일본적인 소재와 정서, 예술 형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영화 기법을 구사한 구로사와만의 특징은 초기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그럼에도 구로사와는 당시 무력했던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서 "전쟁에 협력해 왔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는 물론,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도 책임이 있다."라고 후회했다. 그는 전후 일본 사회의 도덕성과 나약하고 부조리한 인간의 존재를 리얼리즘 영화로 그려 냄과 동시에 황폐하고 극한 환경을 이겨 내려는 인간의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
구로사와를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린 것은 1950년작 〈라쇼몽〉이다. 이 작품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라쇼몽〉과 〈덤불 속에서〉를 합쳐 만든 작품으로, 강간과 살인 사건에 대해 네 사람이 각기 다른 증언을 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구로사와는 '객관적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표현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야수성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단순화된 인물 구성, 엑스트라의 배제, 흑백의 강한 콘트라스트, 강한 부감의 사용 등 기존 영화 기법에서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영화 문법을 사용했는데, 이런 기법들은 뛰어난 연출과 리듬감 있는 편집 아래 조화롭게 사용되어 미학적 절정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에서 이 작품은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게다가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서구 예술 영화 같은 일본 영화를 만든다는 비판을 받으며 투자자에게 외면받았다. 〈라쇼몽〉의 시사회 때 제작사인 다이에이의 사장이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도중에 일어났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듬해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표현대로) '자고 있던 일본 영화계의 귀에 물을 퍼붓게' 된다. 구로사와는 1953년 〈이키루〉로 베를린 시정부 특별상, 1954년 〈7인의 사무라이〉로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영화계의 전설이 되었다. 이 작품은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과 더불어 세계 3대 걸작으로 꼽힌다. 이후 그는 〈요짐보>, 〈쓰바키 산주로> 등을 발표하면서 사무라이 검술 영화를 일본 영화계에 대유행시켰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이 이 영화들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7인의 사무라이〉는 〈황야의 7인〉, 〈요짐보〉는 〈황야의 무법자〉로 미국에서 재탄생되어 서부 영화의 황금기를 낳았다.
1960년대 일본 영화 산업 전체가 하향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구로사와는 외국 자본을 빌려 영화를 찍었다. 여기에는 다큐멘터리 기법을 사용한 〈도데스카덴〉, 진주만 습격을 소재로 한 〈도라도라도라〉 등이 흥행에서 실패한 이유도 있다. 일본 제작자들은 그의 영화에 들어가는 엄청난 제작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침체일로를 걷던 구로사와는 한때 자살까지 기도했다. 그러나 1980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의 도움으로 20세기 폭스와 도호가 공동 출자해 만든 대작 〈가게무샤〉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구로사와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완벽히 조화시킨 감독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하면서도 지나치게 철학적이거나 난해하게 설명하지 않고, 풍자와 유머, 극적 구성을 통해 쉽고 영화적으로 풀어 낸다. 그의 장기인 영상 미학 역시 스토리와 주제를 끌어올리고 영화적인 재미를 만들어 내는 요소로 사용되는데, 이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장 뤽 고다르의 실험적인 방식과는 차별된다. 그의 현대적인 감각과 영상미는 노년에 들어서도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구로사와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모든 이미지가 단아하게 짜임새를 갖추고 있으며, 역동적인 동시에 정靜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어 일본적인 정신과 서구의 영화 기법이 교차하는 본보기라고 평가된다. 1990년 여든 번째 생일날 그는 아카데미 특별 공로상을 받으며 세계 영화계에 미친 영향력을 입증했다. 구로사와는 8년 후인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여든여덟 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 1950년 : 새로운 영화 기법을 이용한 〈라쇼몽〉으로 미학적 절정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다.
· 1954년 : 〈7인의 사무라이〉로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하며 사무라이 영화를 유행시키다.
· 1980년 : 재기작 〈가게무샤〉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흥행에도 성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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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부터 인간의 시대까지, 100인의 인물로 관통하는 일본사! 일본사에 한 획을 그은 100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오늘날 일본과 일본인의 정신을 이룬 역사, 문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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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구로사와 아키라 –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양은경,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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