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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인 100
인 양명학의 주창자
나카에 도주
中江藤樹출생 | 16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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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48년 |
국적 | 일본 |
대표작 | 《옹문답(翁問答)》, 《효경계몽(孝經啓蒙)》, 《감초(鑑草)》, 《심학문집(心學文集)》, 《대학해(大學解)》 |
나카에 도주는 에도 시대 초기의 유학자로, 일본에서는 '양명학의 조(祖)'라고 일컬어진다.
나카에 도주는 1608년 비와 호 서쪽의 오미에서 농민인 나카에 요시쓰구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무렵 요나고(도토리 현)의 번사인 할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다. 무사의 지위를 세습하기 위해서였다.
무사의 자녀들이 대개 학문에 관심이 없던 데 비해 도주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남다른 총명함을 보였다. 그는 한시와 서예를 배우고, 열다섯 살 무렵 《대학》의 '천자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구절에 크게 감동받아 공자의 사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사가 학문을 하는 것은 큰 비웃음거리가 되던 시절이었던지라 남몰래 밤에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도주는 15세에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사의 지위를 상속받고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유학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22세 때 아버지가 죽자 도주는 어머니를 자신이 사는 곳으로 모셔오려고 했으나 어머니가 고향에 남기를 고집하여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사직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번을 이탈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번 이탈은 반역에 준하는 엄청난 죄였으나, 그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효를 다하는 것이 더욱 큰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주는 고향에서 술을 파는 행상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으며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했다.
1631년 24세의 도주는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막부의 관료로 일하면서 승려 복장을 하고 삭발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라잔은 합리적·현세적인 사상가로, 당시 세력이 약하던 유학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관행에 따르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주자학자로서 도주는 이 일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겼고 〈하야시 라잔이 삭발을 하고 승직을 받은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글을 지었다. 여기에서 도주는 '불교도 행색을 하는 유학자', '말 잘하는 앵무새'라며 실제 생활에 유학의 가르침을 적용하지 않는다며 라잔을 비판했다. 이렇듯 지식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태도는 그가 훗날 관념적인 주자학을 버리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중시하는 양명학을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28세 때 도주는 행상을 그만두고 마을에 사숙을 열었다. 이곳에서 그는 중국의 고전, 역사, 시작(詩作), 서예를 가르쳤다. 그는 평소 자신의 집에 있는 등나무 아래에서 강학하기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학생들은 그를 도주(藤樹, 등나무)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의 명성은 서서히 인근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어느 날 한 청년 무사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며 찾아왔다. 청년은 자신이 존경할 만한 성인을 찾아 전국을 떠돈 끝에 도주를 찾아왔다고 밝혔다. 어느 날 청년은 여숙에서 한 무사를 만났다. 무사는 주군의 명으로 수부로 가던 도중 수백 냥의 돈이 든 돈주머니를 말 안장에 묶어 둔 것을 깜빡 잊고 마부와 말을 돌려보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마부가 돈주머니를 들고 찾아왔다. 크게 감격한 무사는 사례를 하고자 했으나 마부는 한사코 거절했다. 무사는 마부에게 어떻게 그렇게 욕심이 없고 정직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마부는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인생의 목적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 인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받고 그를 따르며 살아갈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스승이 바로 나카에 도주였다.
청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찾아 헤매던 스승이 바로 도주라고 생각하여 마을에 찾아온 것이었다. 도주는 자신은 일개 시골 학당의 선생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청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의 명성이 부담스러웠던 도주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청년은 사흘 동안 도주의 집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가 되길 청했다. 결국 보다 못한 도주의 어머니가 청년을 제자로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효'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던 도주는 자신의 실천적 원칙에 따라 그를 받아들였다. 청년이 훗날 오카야마의 관리가 되어 도주의 양명학을 대성시키는 구마자와 반잔(態澤蕃山)이다.
나카에 도주 역시 당대 유학자들처럼 초기에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점차 분석적·이론적인 주자학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무사 관료로 생활했던 경험을 토대로 그는 지나치게 엄격한 봉공(奉公)의 의무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때문에 주자학이 막부의 신분 구조를 정당화시키고, 그에 수반된 의무들을 규정짓는 수단으로 사용되던 세태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주자학은 도덕적 완전성을 지향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며, 따라서 정욕에 물들기 쉬운 인간 본성을 도덕적 훈련을 통해 갈고 닦아 선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주자학은 오히려 사회적 행동 규범을 강요하고 있다는 데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이다.
- 1에도 시대의 학당
소녀들도 학당에 다닐 수 있었다.
- 2
에도 시대의 학당인 데라코야의 모습
그는 점차 지행합일을 중시하는 왕양명의 사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계기는 33세 때 읽은 《왕용계어록(王龍溪語錄)》이었다. 그리고 37세 때 《양명전집(陽明全集)》을 구해 읽고 양명학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그동안 주자학자로서 품고 있던 의문들을 해소할 수 있었다.
나카에 도주는 형식과 격식을 중시하며 틀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주자학자들을 비판했다. 행동에 있어 중요한 것은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을 구조화·계층화하고 주어진 역할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되며, 이는 때와 장소, 지위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제적으로 규정된 행동 규범에 순응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직관을 타고 태어났다'라는 양명학의 근본 가르침은 도주 그 자신의 생각이기도 했다.
도주는 양명학 역시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기로 유명했는데, 그에게 효는 단지 부모를 섬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천지 만물의 진리였다. 자신의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고, 부모의 몸은 천지에서 받은 것인데, 천지의 근본은 태허(太虛, 우주)이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공경(효)은 태허, 즉 우주 만물의 정신적 실체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았다. 또한 효는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존중하는 우주적인 법칙이라고 보았다. 태허의 상태에 도달하면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배양되는데, 이런 도덕적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매일 선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주는 이런 '효즉리(孝卽理)'를 바탕으로 한 양명학을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도주에게는 학문을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1648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후 도주의 양명학은 제자인 구마자와 반잔 등이 계승하여 미와 싯사이(三輪執齋),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등에 의해 발달한다. 도주가 남긴 저작으로는 《옹문답(翁問答)》, 《효경계몽(孝經啓蒙)》, 《감초(鑑草)》, 《심학문집(心學文集)》, 《대학해(大學解)》 등이 있다.
· 1612년 : 전국적으로 그리스도교 금지령이 반포되다.
· 1635년 : 막부의 다이묘 통제 수단으로 참근교대 제도가 제정되다.
· 1637년경 : 나카에 도주가 양명학을 주창하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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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부터 인간의 시대까지, 100인의 인물로 관통하는 일본사! 일본사에 한 획을 그은 100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오늘날 일본과 일본인의 정신을 이룬 역사, 문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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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나카에 도주 –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양은경,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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