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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사를 움
직인 100
신라 정토 계획을 세운 간웅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藤原仲麻呂
요약 테이블
출생 706년
사망 764년
국적 일본

나라 시대의 권신인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한국 고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는 고대 일본의 대신라 침공 계획, 바로 신라 정토 계획의 주인공이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706년 후지와라노 무치마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무치마로는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장자이다. 할아버지 후히토는 나라 시대에 후지와라 가문이 정계를 장악하는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후히토는 720년 요로 율령을 편찬하여 율령 국가 구축에 공헌했고, 694년 딸 미야코를 몬무 천황의 후궁으로 들여보내고 그 사이에서 난 오비토 황자(쇼무 천황)에게 딸 고묘시를 시집보내면서 후지와라씨를 조정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끌어올렸다.

후히토가 죽고 난 후 그의 네 아들 무치마로(武智麻呂), 후사사키(房前), 우마카이(宇合), 마로(麻呂)는 중궁 고묘시를 황후로 추대하여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가야 왕(長屋王)이 황족이 아닌 중궁을 황후로 추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방해했다. 나가야 왕은 덴무 천황의 손자이자 매제로, 당시 우대신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와라 가문의 힘은 이미 황실을 능가한 상태였다. 형제는 나가야에게 모반 혐의를 씌우고, 그의 저택으로 군대를 보냈다. 저택이 포위되자 나가야는 자살했고, 고묘시는 무사히 황후에 올랐다.

그런데 고묘시를 황후에 올린 지 4개월 만에 수도 전역에 천연두가 창궐했다. 이로 인해 조정 신료의 반이 사망했고 후지와라씨 4형제 역시 이때 죽었다. 이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 후지와라 가문은 그대로 몰락의 길을 걸을 뻔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바로 무치마로의 아들 나카마로였다.

나카마로는 어린 시절 대납언인 아베노 스쿠나마로(安倍宿奈麻呂)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일찍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성격이 솔직하고 총명했는데, 특히 산술(算術)에 정통했다고 한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중국 학문과 제도에 정통했고, 정치 감각도 뛰어났으며, 화술에도 능했다고 한다. 나카마로는 726년 귀족 자제 중에서 천황을 보좌하기 위해 선출한 내사인(內舍人)이 되어 쇼무 천황을 보필했고, 이후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후손으로 정6위하에 위계되었다. 734년에는 종5품직인 대학소윤이 되었다.

나카마로가 정계에서 급부상할 수 있었던 데는 고모인 고묘시 황후의 뒷받침이 작용했다. 749년 불교에 깊이 심취해 대불을 건립하는 데 주력하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던 쇼무 천황은 결국 딸인 아베 황녀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상황으로 물러났다. 당시 대귀족들은 황녀나 어린 황자가 천황으로 즉위하면 가문의 수장이나 자기 가문 출신의 황후를 섭정으로 세워 정권을 장악했다. 고묘시 황후 역시 딸 고켄 천황을 제치고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틀어쥐었다. 나카마로는 고묘시의 총애를 받으며 749년 대납언에 임명되어 정권과 군권을 거머쥐었다. 756년 쇼무 천황이 죽으면서 고켄 천황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듬해 나카마로는 쇼무 천황이 황태자로 지목한 후나도 왕을 폐위시키고, 덴무 천황의 손자로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무 세력이 없던 오이 왕(준닌 천황)을 황태자로 세웠다.

후지와라노 후히토

후지와라 가문의 전성기를 구축한 인물로, 후지와라 가문은 이후 대대로 외척 집안이 되어 중앙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해 나카마로의 가장 큰 라이벌이던 태정대신 다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가 조정에서 물러났다. 나카마로의 반대 세력은 위기를 느꼈다. 결국 이들은 모로에의 장남 나라마로를 중심으로 결집해 나카마로를 제거하고 새 천황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주모자 전원이 체포되고 관련자 433명이 처형되었다. 이제 나카마로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758년 나카마로는 고켄 천황을 상황으로 물러나게 하고, 꼭두각시 왕인 준닌 천황을 옹립하여 일인 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그러나 그는 정권을 한손에 움켜쥐고 전횡하기보다는 대정치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할아버지 후히토가 착수한 요로 율령을 시행하고, 부역을 경감시키고, 평준서(平準署)를 창설했으며, 당나라식으로 관직 제도를 정비하는 등 덕치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그는 황족 이외의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에 올랐다. 세 아들도 나란히 참의에 오르면서 나카마로의 권력은 정점에 달했다.

견당사

630년 1차 견당사를 파견한 이래 894년 폐지될 때까지 260년간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창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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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년 나카마로는 신라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권력을 독점하던 후지와라 가문에 대한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불만 세력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국가적 프로젝트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신라 정벌 계획이었을까? 먼저 일본에는 3세기경 히미코 여왕이 신라를 정벌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일본인은 한반도와 분쟁이 생기면 히미코 여왕을 모신 후쿠오카의 가시이 묘에 와서 한반도 정벌을 기원할 정도로 그 의미가 컸다.

여기에다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일본인은 신라가 일본을 침공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덴치 천황이 가네다 성, 오노 성, 다카야스 성을 축조해 방어선을 구축할 정도로 일본 조정의 위기의식도 컸다. 덴치 천황 시대에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면서 일본과 당-신라와의 관계는 크게 틀어졌는데, 이후 덴무 천황은 당과의 관계는 단절 상태로 두었지만 신라와는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외교 노선이 나라 시대각주1) 까지 이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났다. 당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자 일본 조정에서는 이것을 기회로 여기고 신라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거나 신라를 침공하여 위기의식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카마로는 여기에 주목했다.

그는 도카이도(東海道), 난카이도(南海道), 사이카이도(西海道)의 여러 국에서 4만 명에 달하는 병사를 동원하고 3년에 걸쳐 수송선단을 준비한다는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을 생각했을 때 다소 허황될 정도로 거창한 이 계획은 그가 신라 토벌을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는 단지 국내 여론을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을 뿐이었다. 대신라전은 나카마로가 실각한 762년 이후 흐지부지되었다.

760년 나카마로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고묘시 황후가 사망하자 뒤로 물러나 있던 고켄 상황이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고켄은 천황 중심의 전제 정치를 실시하고, 자신의 병을 고쳐 준 바 있는 법사 도쿄를 총애하여 그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 주었다. 도쿄는 특히 나카마로가 그의 영지인 오미국에 제2의 도시를 건설하고 정1위로 오른 것을 권력 독점이라고 비판하며 고켄 상황에게 정치적 실권을 되찾아오라고 부추겼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나카마로가 도쿄를 견제하면서 나카마로와 상황 사이는 크게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자국 세력만으로는 신라를 침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발해를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발해의 미온적인 태도로 신라 정벌 계획도 사실상 무산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고켄 상황이 국가와 대사, 상벌에 관한 일은 자신이 직접 관장한다는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나카마로의 꼭두각시 왕이었던 준닌 천황은 상황에게 정치적 실권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764년 고켄 상황은 나카마로의 꼭두각시였던 준닌 천황을 폐위시키고 유배 보낸 후 자신이 다시 천황(쇼토쿠 천황)의 자리를 차지했다.

위기를 느낀 나카마로는 결국 쿠데타라는 악수(惡手)를 두었다. 나카마로는 그동안 몰래 군사를 양성해 온 바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조정 측이 선수를 쳐 그에게 군대를 보냈다. 나카마로는 수도를 탈출해 오미국으로 도망쳤지만, 비와 호 서쪽 미오가사키에서 천황군과 대치 끝에 패배하고 참살되었다.

나라 시대 최고의 권신으로, 그를 언급하지 않고는 8세기의 일본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위업을 쌓았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그러나 결국 그는 후지와라씨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사를 농단하고 음모를 획책한 간웅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 710년 : 겐메이 천황이 나라로 천도하다.
· 720년 :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요로 율령을 편찬하여 율령 국가 구축의 토대를 닦다.
· 764년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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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경 집필자 소개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한 뒤 일본에서 유학했다. 일본어 전문 번역자 및 역사책 전문 기획자로 활동 중이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역사 교양 도서를 집필하고 있다. 저서로는 《역사를 달리는 세계..펼쳐보기

출처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양은경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신화의 시대부터 인간의 시대까지, 100인의 인물로 관통하는 일본사! 일본사에 한 획을 그은 100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오늘날 일본과 일본인의 정신을 이룬 역사, 문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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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세, 에도 막부와 평화의 시대 천하통일의 꿈, 오다 노부나가 천하를 손에 넣은 원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요시의 마지막 충신, 이시다 미쓰나리 차를 수행의 경지로 끌어올린, 센노 리큐 에도 막부 250년의 체제를 세우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쇼군으로 태어나 쇼군으로 죽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주자학으로 막부 체제를 세우다, 하야시 라잔 양명학의 주창자, 나카에 도주 에도를 풍미한 호색남의 일대기, 이하라 사이카쿠 동양의 셰익스피어, 지카마쓰 몬자에몬 조선과 일본의 가교가 되다, 아메노모리 호슈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방랑 시인, 마쓰오 바쇼 일본사를 편찬한 파격적인 명군, 미토 고몬 근면과 검약의 일본식 자본주의의 원류, 이시다 바이간 막부를 중흥시킨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해학과 낭만의 시인 화가, 요사 부손 뇌물과 측근 정치로 얼룩진 개혁가, 다누마 오키쓰구 간세이 개혁을 단행한 명군,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국학을 집대성하다, 모토오리 노리나가 파산 위기를 극복한 개혁주의자, 우에스기 요잔 근면한 일본인의 표상, 니노미야 손토쿠 우키요에의 황금시대를 열다, 스즈키 하루노부 그림에 미친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 고흐가 사랑한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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