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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야망과 좌절

백년 전쟁을 겪으면서 관료제와 상비군을 조성해 강력한 왕권의 기반을 다진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등은 16세기부터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탈리아 지역은 프랑스와 왕위 계승권으로 얽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문화적으로 앞선 지역이어서 프랑스 국왕들이 가장 욕심을 낸 지역이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전쟁의 원인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뒤 시칠리아 왕위가 프랑스 왕가로 넘어가면서 앙주 가가 시칠리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앙주 가의 지배는 '시칠리아의 만종'(1282년)이라는 민중 반란에 의해 종식되고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와 나폴리로 분열되었다. 나폴리는 여전히 앙주 가에 예속되었지만 시칠리아는 아라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442년 아라곤은 나폴리마저 점령하여 '양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왕위에 오른 샤를 8세(1483~1498년)는 아라곤에 빼앗긴 나폴리 왕위를 요구하며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그는 1494년 3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이듬해인 1495년에 피렌체에 입성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사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략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 의해 유도된 측면도 있었다. 그들이 프랑스를 이용해 나폴리의 아라곤 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것이다. 1495년 샤를 8세는 드디어 나폴리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마치 나폴리의 점령군처럼 행동하자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교황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에 맞섰다. 궁지에 몰린 결국 샤를 8세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샤를 8세의 원정은 비록 정치적 성과는 없었지만 이탈리아의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이탈리아 기술자들을 데려왔다. 이것은 프랑스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가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 문화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샤를 8세가 28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그의 종형인 오를레앙 가의 루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36세에 왕이 된 루이 12세(1498~1515년)는 샤를 8세의 왕비였던 안느에게 반해, 자신의 아내인 루이 11세의 딸 쟌느 드 프랑스와 이혼하고 안느와 재혼하였다.

1507년 루이 12세의 제노바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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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2세는 샤를 8세의 아내뿐만이 아니라 그의 이탈리아에 대한 야망도 이어받았다. 그는 1503년과 1513년 두 번에 걸쳐 밀라노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전혀 명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루이 12세는 스포르차에 의해 축출된 비스콘티 가문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밀라노 공국을 계승할 자격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반(反) 프랑스 동맹, 스페인과 교황의 배신 등으로 실패하였다.

이탈리아 원정 이후 루이 12세는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블루아 성에서 왕비 안느와 함께 보내다가 딸만 둘 남기고 1515년에 사망하였다.

루이 12세의 뒤를 이어 그의 사위이자 조카인 프랑수아 앙굴렘이 프랑수아 1세(1515~1547년)로 즉위하였다. 모험심 강한 그는 즉위하자마자 1515년 2만 6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재차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그는 마리냥 전투에서 밀라노 국경을 수비하는 스위스군을 물리치고 밀라노를 점령한 후 교황과 협상하여 볼로냐 협약을 맺었다. 이 일을 계기로 스위스 용병들이 연금을 받고 프랑스 왕실의 경비를 담당하는 관례가 생기게 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점령에 만족하지 않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려는 야심까지 품었다. 1519년 막시밀리안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손자 칼이 황제의 후보가 되었다. 그런데 칼이 황제가 되면 오스트리아와 부르고뉴, 스페인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프랑스의 안보가 위협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프랑수아 1세는 황제 선출권을 가진 독일 선제후들을 매수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려 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직위는 막시밀리안의 손자인 샤를 5세에게 돌아갔다. 이에 앙심을 품은 프랑수아 1세는 1519년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였다. 당시의 상황은 프랑수아 1세에 절대적으로 불리하였다. 전 유럽뿐만 아니라 프랑스 내의 샤를 드 부르봉마저 적과 내통하며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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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에서 대패하여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부르고뉴 지방을 양도하고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전쟁은 1529년 캉브레이 조약에 의해 종결되었다. 조약에 의해 프랑스는 두 왕자를 데려오기 위해 200만 에퀴를 오스트리아에 지불하였고,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의 누나인 33세의 과부 엘레아노르와 혼인하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치르던 적대관계에서 처남매부 관계로 바뀐 것이다. 그 외에도 캉브레이 조약에는 프랑스는 밀라노를 포기하고 오스트리아는 부르고뉴를 단념한다는 타협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후에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대한 복수를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를 제압하기 위해 독일의 신교도만이 아니라 터키의 이슬람교도와도 손을 잡았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자연스럽게 국내 가톨릭 신자들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프랑수아 1세의 누나 마르그리트가 신교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원성이 더욱 커졌다.

프랑수아 1세는 국민들의 원성을 무마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가톨릭 가문인 메디치 가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왕태자를 혼인시켰다. 이렇게 하여 자신과 가톨릭과의 유대를 증명해 보였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의 정치문제와 종교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고, 그것은 멀게는 위그노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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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하고 못생긴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왕태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앙리 2세로 즉위한 왕태자는 죽을 때까지 18살 연상의 디아느만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왕태자가 어릴 때부터 좋아한 여인으로 궁정 주방장의 미망인이었다. 디아느는 왕의 연인으로 한때 귀족 작위까지 받았으나 왕이 사망하자 카트린의 모진 학대를 받기도 하였다. 카트린은 왕의 사랑을 받진 못했지만 왕자를 넷이나 낳아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고상한 취미와 예술을 프랑스 궁정에 도입하였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프랑스에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앙리 2세(1547~1559년)는 선왕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에 대한 야망을 접고 라인 강 유역과 로렌 지방을 프랑스 영토에 귀속시키는데 전력하였다.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영국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앙리 2세는 자신의 큰아들과 스코틀랜드의 어린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결혼시켰다. 또 독일 내의 신교파 제후들과도 손을 잡았다. 하지만 독일 신교파 제후들의 배신으로 메츠에서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 황제 카를 5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가 황제의 칭호를 계승하였고 카를 5세의 아들인 필립 2세는 스페인을 비롯한 제국의 영토를 상속받았다. 이에 앙리 2세는 1559년 필립 2세와 카토 캉브레시 조약을 체결하여 오랜 적대 관계를 해소하였다. 이 조약에 의해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사부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메츠와 투르, 베르덩 지역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야망을 완전히 접는 대가로 프랑스 지역의 영토적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카토 캉브레시 조약에는 이 외에도 앞으로의 유대 강화를 위해 앙리 2세의 장녀 엘리자베드 드 프랑스와 필립 2세의 결혼 조항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결혼식날 앙리 2세는 마상 시합 도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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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자 집필자 소개

서양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저술 활동 중이다. 현재는 전근대 사회의 샤리바리와 군주의 입성식을 비롯해 19세기 정치적 축제(기념제) 등을 연구중이며 고려대, 순천향대, 충북대 등에서 서양..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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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프랑스사
이야기 프랑스사 | 저자윤선자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프랑스의 역사를 살펴본다. 프랑스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면서, 어느 한 분야에 치중하지 않고 역사의 다양한 모습..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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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야망과 좌절이야기 프랑스사, 윤선자,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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