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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
Acropolis in Greece그리스 신전은 오늘날에도 건축 중 으뜸으로 칭송되며 유럽 문화 자체로 여겨질 정도이다. 기원전 660년경 그리스인들은 목재와 점토 대신 돌로 신전을 지었다. 최초의 신전 건축 이후 150년이 지난 뒤 파르테논신전이 아크로폴리스에 건설되면서 그리스 신전은 고전적인 모습을 확립했다.
아크로폴리스의 대표적 문화유산은 뭐니 뭐니 해도 파르테논신전이다. 파르테논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신이자 지혜 · 전쟁 · 기술의 신인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신 아테나)’를 모시던 신전으로,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 문명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이다. 유네스코의 마크가 바로 이 신전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이 신전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직접 찾아가본 사람은 물론이고 가보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에도 그 모습이 뚜렷이 박혀 있는 이 신전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이다. 지금은 기둥과 보만 남아 있지만 원래 그 건축적, 조형적 완성도가 빼어나서 서양 건축사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에 우뚝 솟은 파르테논신전은 아테네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데 멀리서 보면 공중에 가볍게 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웅장하다.
아테네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당대의 강자 페르시아를 물리치면서 강력한 실세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아테네에 결정적인 위기가 온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기원전 519~465)가 15만 명의 병력과 400~500척의 함선[헤로도토스(Herodotos)는 보병 170만, 기병 8만, 함선 1200척 및 근로인원을 포함하여 총 500만이라고 기록]이라는 사상 최대의 군사력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략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파죽지세로 그리스 본토를 휩쓸면서 들어왔을 때 아테네인들은 델포이신전의 신탁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신탁은 놀랍게도 강력한 적과 싸우지 말고 도망가라고 했다. 이는 아테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켜온 도시를 포기하라는 것을 뜻하므로 아테네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아테네인들은 또다시 델포이신전으로 가서 보다 더 믿음직한 신탁을 내려달라고 했다. 아테네인들의 간청을 받아들인 델포이신전 신탁소는 이번에는 무조건 도망가라는 말을 철회하고 나무로 된 성벽에 의존하라고 했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기원전 528~462)는 이 신탁을 따라 철수하지 않고 선박을 제조한 후 페르시아와의 전투(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보호 동맹(아티카 해상 동맹 또는 델로스 동맹)을 맺었다. 동맹국의 시민들이 엄청난 세금을 내는 대가로 아테네가 군사적 위협을 당하는 모든 동맹국을 보호한다는 내용이었다. 동맹본부와 기금금고는 이오니아인의 성지 델로스 섬에 설치했다.
기원전 454년 아테네는 델로스에 있던 동맹본부와 기금금고를 아테네로 옮겼는데 기금을 관리하고 동맹을 이끌 수 있는 거대한 신전이 필요했다. 명목상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아크로폴리스에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 파르테노스에게 바치는 파르테논신전을 건설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인들의 신전 건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파르테논신전 건설이 세속적인 명예심과 정치적인 계산 등 불경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동맹국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해군력 증강이 아니라 아테네의 신을 숭배하기 위해 거대한 기념물을 짓는다는 것을 탐탁하게 여길 수 없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는 건축위원회의 의장 자리를 맡아서 신전 건축을 강행했다. 그는 ‘돈은 내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것이다. 약속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며 반대자들을 달랬다. 건축가 익티노스와 공사 전체를 감독한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페리클레스를 도왔다. 페리클레스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시 건축 중이던 옛날 파르테논신전을 헐어내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모든 면에서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신전을 건설하려고 했다. 우선 풍부한 건축 비용(약 5톤의 은)을 바탕으로 조각상과 거대한 신전을 구상했다. 건축은 기원전 447년에 시작되었고 당시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인 15년 만에 완공되었다.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는 언덕 오른쪽(서쪽) 끝에 있다. 이곳으로 가는 길목에 아레오파구스(Areopagus)라고 불리는 조그만 바위산이 있는데 고대 아테네의 재판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성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기독교를 설교했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프로필라이아(propylaea)는 건축가 므네시클레스(Mnesicles)가 파르테논과 ‘비교’되어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이 건물을 바라볼 때 시선이 자연히 ‘아래를 향하게’ 설계했다. 가파른 계단과 좌우 날개에 있는 건물 그리고 줄을 맞춰 서 있는 기둥들의 우아함은 아크로폴리스라는 신성한 공간을 강조한다.
프로필라이아 옆의 보루 위에 세워진 아테나-니케신전(일명 ‘날개 없는 승리의 여신’)은 기원전 424년에 완성된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전투에서 승리의 여신의 가호로 항상 승리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승리의 여신이 아무 데도 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없앴다.
이곳을 통과하면 그리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파르테논신전이 위용을 드러낸다.
그리스 신전의 겉모습을 보면 수직선과 수평선의 구조가 뚜렷하며 주로 직선의 형태를 많이 드러내고 있다. 건물은 밑에서부터 건물을 받치는 기단, 일정하게 배열된 기둥(열주), 기둥이 받치고 있는 엔타블러처(entablature), 박공 양식의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주는 도리스식 · 이오니아식 · 코린트식의 세 가지 양식으로 표현됐다. 지붕은 양 옆으로 비스듬히 경사진 八자 형태로 우리나라의 맞배지붕 형식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목재로 지붕틀을 만들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으며 정면에서 봤을 때 가로와 세로(높이)의 비율이 7(혹은 8):1 정도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파르테논신전은 그리스의 신전 건축양식에 따라 정면 너비 31미터에 옆면 70미터인 기단 위에 정면은 여덟 개, 측면은 열일곱 개의 기둥이 들어선 신전 홀이 세워졌다. 새로운 신전은 옛 신전(구 파르테논)과 다소 달랐는데 그리스 초기시대 양식에서 고전양식으로의 변화를 상징한다. 구 파르테논신전은 정면 기둥 여섯 개와 측면 기둥 열여섯 개를 갖춤으로써 길고 좁은 형태를 지니는 그리스 초기시대 양식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새로 지은 신전은 이와 달리 고전양식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1 대 2(+1)였다.
기둥은 도리스양식으로 기둥받침대 없이 직접 기단 위에 세워졌다. 기둥들의 밑 부분 지름은 1.9미터, 높이는 정확하게 10.5미터이며 기둥 축 사이의 간격은 4.5미터이다. 건물 모퉁이에 세워진 기둥들은 약 5센티미터를 강화했고 기둥 축 간격은 60센티미터 정도를 더욱 좁혔다. 기둥 위에는 3.3미터 높이의 가로대를 설치하고 양쪽 정면부에 각기 삼각형 합각머리를 올렸다.
신전 건축보다 다소 늦은 기원전 432년에 완성된 조각품은 신전 건물만큼 중요하다. 신상 안치소에 황금과 상아로 된 10미터 높이의 아테나 여신상이 들어갔다. 그림이 들어가는 벽면인 92개의 메토프(metope, 그중 41개만 남아 있다)에는 신화의 장면들과 아테네와 연관된 역사적 전투장면들이 그려졌다. 올림포스 신들이 거인들과 싸우는 장면, 켄타우로스 전투, 트로이 전투, 마라톤 전투 등이다. 신상 안치소 바깥 벽면 위에 그려진 수평장식띠 벽면에는 아테나 여신 축제의 장면들을 묘사했다. 서쪽 합각머리에는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아티카 땅을 두고 벌이는 전투 장면이 그려졌고 신상 안치소 입구 위쪽에는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탄생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기원전 566년 이후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축제가 4년마다 열렸고 수많은 소녀상(코라이)들이 여신에게 봉헌되었다. 파르테논신전의 4면을 두르는 프리즈에 삽입된 아테나 여신 대축제 행렬 장면에는 등장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옷주름과, 보석 · 헤어스타일 · 얼굴 표정 · 사소한 몸동작까지 자세히 묘사돼 있어 인물들의 심리상태까지 알 수 있다. 이들 조각은 페이디아스와 그의 작업실 생도들의 작품으로 알려지는데 그들이 인간의 육체와 심리를 그야말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축가 익티노스는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는 파르테논신전을 짓기 위해 각 부분의 수치를 측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비례를 분석했다. 결과는 기본공식인 1 대 2(+1)에 4를 곱한 4 대 9라는 공식에 따라 기단과 신상 안치소 면적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지붕을 뺀 신전 정면부의 단면도에도 9 대 4라는 비율이 나타난다.
인간의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아테네인들의 건축 솜씨는 놀랄 만하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우뚝 솟은 파르테논신전을 얼핏 보면 동일한 굵기의 기둥이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된 직사각형의 ‘반듯한’ 건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매우 다르다.
우선 가장자리 기둥은 가운데 기둥보다 좁은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가장자리는 180센티미터, 가운데는 240센티미터 간격이다. 이처럼 불균형하게 건설한 이유는 동일한 굵기로 만든 기둥을 동일한 간격으로 세우면 건물이 직사각형이 아니라 위나 옆으로 퍼져 보이기 때문이다. 63빌딩 앞에서 꼭대기를 쳐다볼 때 건물이 넘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비슷하다. 숭례문이나 궁전도 이러한 구도로 건설되었다.
31×70미터의 기단은 살짝 올려 가벼운 아치 형태로 만들었는데 긴 변의 가운데가 모서리보다 11센티미터, 정면부 중앙이 모서리보다 6센티미터 높다.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건설된 수평선은 실제로는 중앙 부분이 처진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거대한 돌들을 맞추어 나가면서 중앙부를 약간 들어 올린 것이다. 파르테논신전에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수평선이나 수직선이 전혀 없다. 당연히 정확한 직각도 없다.
기둥들은 7센티미터, 코너에서는 10센티미터씩 수직선을 벗어나 가운데 쪽으로 기우는데 이 굴곡이 가로대까지 그대로 전달된다. 기둥은 위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바닥 부분의 지름은 약 180센티미터이지만 꼭대기 부분의 지름은 120센티미터밖에 안 된다.
파르테논신전은 총 23만 톤의 돌을 사용해 15년에 걸쳐 완공했다. 이와 같은 건물을 단기간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분업이 이뤄져야 했다. 매일 70톤(기둥 하나의 무게) 이상의 석재들을 채석장에서 옮겨야 하고(하루에 옮길 수 있는 거리) 이들을 거중기를 사용해 적소에 배치해야 했다. 학자들은 파르테논 현장에서 기둥 하나를 설치하는 데 28명이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총체적으로 9~14개의 수레, 300마리의 당나귀, 250명의 운반팀, 18~28명의 석공이 동원되었는데 이들 숫자에는 최소한 수백 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채석장 인부들과 아크로폴리스까지 운반하는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프로필라이아에서 보이는 파르테논신전은 뒤쪽의 모습이고 정문은 동쪽에 있다. 원래 프로필라이아를 동쪽에 건설했어야 하나 동쪽이 높은 절벽이므로 서쪽에 세웠다고 한다. 아테나 여신상도 동쪽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신전 북쪽에 에레크테이온신전이 있다. 이오니아양식의 에레크테이온신전은 페리클레스 시대에 세워졌으나 설계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포세이돈과 헤파이스토스 신에게 제사지내던 이 신전은 기둥 대신 카리아티드(Caryatid)라고 부르는 여섯 개의 처녀상이 무거운 돌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처녀단(處女壇)으로 유명하다. 처녀상을 만든 사람은 페이디아스의 제자 알카메네스로 추정한다. 오늘날 아크로폴리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제 처녀상이고 원작은 대기 오염으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유적지 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건축물들이 있었다. 파르테논신전 옆의 구 파르테논신전, 아르테미스-브라우로니아신전, 하르코티키, 아테나 프로마코스의 상,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의 묘, 제우스-폴리에우스신전 등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는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그 주위에서 발견된 선사시대부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현재 남아 있지 않은 구 파르테논신전의 유물도 있어 구 신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남쪽으로는 이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디오니소스 극장(로마시대에 개축), 아스클레오피오스의 선전터 등이 있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연극의 신으로, 매년 이 극장을 중심으로 ‘디오니소스축제’가 열렸다.
아테네 멸망 이후에도 아크로폴리스에 대한 사랑은 계속되었다. 로마인들에게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의 철학 · 정치 · 미학을 배울 수 있는 학교였고 모범이었다. 파르테논신전은 기독교 교회, 이슬람 사원 등 다른 종교의 신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거의 손상 없이 암흑기를 지나왔다. 그런데 1678년 베네치아 함대가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해, 아테네를 지배하던 오스만 터키가 화약고로 사용하던 파르테논신전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건물 중심부가 파괴되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인 화가 제임스 스튜어트와 건축가 니콜라스 레베트에 의해 파르테논신전이 재발견된 이후 파르테논신전은 약탈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1800년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대사 엘긴(Elgin)이 페이디아스가 조각한 박공부(옛날에는 조각과 건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었다)의 대부분을 떼어내어 영국으로 가져갔다. ‘엘긴 마블(엘긴의 대리석)’이라고 불리는 이 조각들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스를 사랑한 시인 바이런(Baron Byron, 1788~1824)은 엘긴을 약탈자이며 신전 모독자라고 비난했다.
- 1파르테논신전을 장식했던 엘긴 마블
아테네 전성기에 정치에선 페리클레스가 있었다면 예술에선 페이디아스가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칭송받는 그는 페리클레스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페이디아스와 그의 뛰어난 문하생들은 파르테논신전을 최고의 조각품으로 장식했다. 파르테논신전 외벽의 상부 4면에만 길이 163미터에 이르는 프리즈 장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대사 엘긴이 파르테논신전을 장식하던 많은 조각들을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이들 걸작품들은 엘긴 마블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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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그리스 문명의 탄생》, 피에르 레베크, 시공사, 1997
- ・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생각의나무, 2006
- ・ 《그리스와 에게해의 섬들》, 중앙M&B, 1997
- ・ 《서양건축사》, 윤정근 외, 기문당, 2003
- ・ 《클락시커 50 서양건축》, 롤프 H. 요한젠, 해냄, 2004
- ・ 《세상을 바꾼 건축》, 클라우스 라이홀트 외, 예담, 2006
글
출처
인간의 열정이 남긴 불멸의 흔적을 따라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여행을 떠난다! 필론이 선택한 세계 7대 불가사의부터 최근 선정된 세계 신 7대 불가사의, 그리고 그 후보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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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크로폴리스 – 세계 불가사의 여행, 현암사 편집부,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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