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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여행 사막에 새겨진 장밋빛 도시
페트라
Petra in Jordan1812년 8월 스위스 육군 대령의 아들인 스물일곱 살의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이집트 카이로로 가는 한 무리의 아랍인들과 함께 동요르단 지방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행하던 아랍인이 근처 산에 장엄한 유적지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잊힌 채로 방치된 유적들을 탐험하는 것을 아주 멋지고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발굴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일행에서 이탈해 폐허를 찾겠다고 한다면 곤욕을 치룰 수도 있었다.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일행이 지나는 길 근처에 아론(모세의 형,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죽은 자리에 그의 묘가 만들어졌다고 함)의 묘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부르크하르트는 일행의 대장에게 자신도 아론의 묘를 참배하고 싶다고 했다. 대장의 허락을 받아 그는 험한 협곡을 지나 산 정상에 올랐는데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붉은빛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도시가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그는 ‘붉은 장밋빛 도시’의 발견자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이 도시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 된, 장밋빛처럼 붉은 도시.”
사해와 아카바만(灣) 중간에 위치한 페트라는 기원전 400년경에 아라비아반도에 정착한 유목민족 나바테아인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수도였다. 페트라를 건설한 나바테아인들은 고대 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던 알로에 · 계피 · 유향 등을 남아라비아와 인도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운반했고 기원전 4세기부터 전설적인 유향로(乳香路)의 북부를 장악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컸다. 척박한 지역이었지만 물이 있는 장소를 알고 사막의 모래바람을 피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발 950미터에 위치한 은닉처 페트라는 그 주위로 높고 가파른 암벽들이 어두운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어서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다. 로마도 무력으로는 페트라(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를 정복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2세기 초 페트라의 로마 합병에 대해 학자들은 로마가 페트라를 정복한 게 아니라 페트라가 합병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좁은 협곡 시크(Siq)는 도시로 진입하는 통로로, 밖에서는 그 입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입구부터 높이 100미터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사암 절벽이 1킬로미터나 좁은 길을 덮칠 듯이 이어져 있다. 페트라는 이러한 길을 지나야 나온다. 도시 길이는 8킬로미터에 달하며 시가지 입구는 동쪽의 시크, 남쪽의 투그라, 북쪽의 투르크 마니에라라는 세 개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바테아인들은 지중해 연안까지 여러 대상로를 장악했는데 그중에는 모세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 땅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하면서 지났다고 하는 ‘왕의 길’도 있다. 대상들은 페트라를 통해 이집트의 기자 · 지중해 · 시리아 등으로 여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페트라 도시민들은 통행요금 징수와 아스팔트 무역의 수입으로 아주 부유했다.
페트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누렸는데 당시 페트라의 인구는 3만 명을 넘었다. 페트라는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포장도로 · 목욕탕 · 상점 · 극장 · 장터 · 궁전 · 체육관 · 계단식 정원 · 테라코타로 만든 정교한 배수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다.
페트라에서는 골짜기가 워낙 좁아 큰 규모의 건물을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도시민들은 그들이 받들던 신 · 망자들과 함께 바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위를 깎아 무덤과 주거지를 만든 것이다. 다행히도 페트라의 암석은 파거나 조각하기 쉬운 사암이었다. 현재까지 페트라에서는 800개의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페트라의 수많은 건축물과 조각 중에서도 단연 방문객들을 감탄케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장밋빛 사암을 깎아 만든 신전이자 무덤인 카즈네피라움(Khazneh Fir’awn, 파라오의 보물)이다. 이 기념비적인 건물은 시크를 통과하자마자 나타난다. 높이 40미터, 너비 28미터의 정면 모습은 웅장하고 예술적으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이 건축물은 헬레니즘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건축 전통을 따르고 있다.
앞에 넓은 광장을 거느리고 있는 카즈네피라움의 정면 모습은 기둥과 지붕, 여러 조각상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정면 중앙에는 대좌가 있고 그 위에 항아리가 있는데 베두인들은 그 안에 파라오의 보물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파라오의 보물창고가 아니라 나바테아왕 하리스 4세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국의 고고학자 레오너드 울리(Leonard Wooley)는 페트라의 이런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바테아의 건축가들은 고전적인 건축물을 세밀히 분해하여 여러 조각을 낸 다음 처음 설계도와는 전혀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결합시켰다.”
카즈네피라움에서 협곡을 따라가면 기둥들이 늘어선 대로의 서쪽 끝에 있는 신전 카스르알빈트피라움[Qasr al Bint Fir’awn, 파라오 딸의 성(城)이란 뜻]이 있다. 바위를 깎아 만들지 않은 유일한 건물로, 이 도시의 주신(主神)인 두샤라를 모셨던 곳이다. 높이 23미터의 본전은 열주랑 · 전실(前室) · 지성소로 이루어져 있고 신전 앞뜰에는 야외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처음에 돌기둥 모양이었던 두샤라 신은 나중에 인물 모양으로 만들어져 숭배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나바테아의 통치자의 신분이 족장에서 전제군주로 바뀌는 정치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두샤라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신과 동일시되었다.
학자들은 페트라의 많은 건물들이 회로 칠해진 후 그 위에 그림이 그려졌다고 추정한다. 지금은 바람과 모래 등 자연 침해에 의해 회벽이 사라지고 바위만 남아 처음 설계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분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카즈네피라움 오른쪽에는 2세기 초 나바테아인들이 건설하고 로마인들이 확충한 너비 40미터의, 33개 계단으로 된 극장 유적이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 약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극장 왼쪽에 있는 로마시대의 시가지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 · 신전 · 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도시 서쪽 끝에 있는,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장례사원인 앗데이르(ad-Dayr) 유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카즈네피라움과 마찬가지로 암벽을 깎아서 만든 2층 건축물이지만 높이 50미터, 길이 45미터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1세기말 오보다스(Obodas)왕에게 바쳐진 신전 또는 무덤으로 추정하며 4세기부터 비잔틴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 계단 길은 좌우에 무덤과 제물을 봉헌하는 벽감(두꺼운 벽을 파서 그 위에 물건을 얹어놓을 수 있도록 만든 대)들이 줄지어 있어 ‘성스러운 길’이라 불린다. ‘유골함이 있는 무덤(Tomb of the Um)’을 비롯해 페트라의 많은 무덤이나 장례 후 연회가 펼쳐졌던 석조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의자가 3면에 달린 식탁이 있는 식당)의 계단 장식은 아시리아 건축양식이다. 이렇게 수많은 조각과 건축물이 있는 페트라에서 잠시 벗어나 정상에 서면 이스라엘 땅과 사해(四海)가 보인다.
106년 로마에 정복된 후 페트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쇠락의 길을 피하지 못했다. 다른 대상 무역로가 발견되어 기원 3세기부터 그 중요성을 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페트라는 십자군 전쟁 때 유럽인들에게 잠깐 알려졌다가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발견하기 전까지 700년 동안 긴 잠을 자고 있었다. 그동안 유적은 수많은 지진에도 파괴되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는 자신이 발견한 잊힌 도시를 《시리아와 성지순례(Travels in Syria and the Holy land)》라는 책에 기록했는데 이 책을 읽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는 페트라를 방문했다. 그는 페트라를 스케치해 영국으로 돌아온 후 당대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풍경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의 화집이 출간되면서 페트라는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다.
영국의 레이야드(A. H. Layard)는 1887년 이곳을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썼다. “물 등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없는 사막의 경계 지역에서 바위에 극장 · 신전 · 공공기관 · 무덤 · 개인용 건물 등을 끈질긴 노동으로 건설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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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불가사의 세계문화유산의 비밀》, 허용선, 예림당, 2005
-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텔스만, 2003
- ・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생각의나무, 2006
- ・ 〈2000년 된 고도 페트라 유적지〉, 《나비뉴스》, 2007. 5. 17
- ・ 《지중해》, 김성호 외, 에오스여행사출판부, 2007
- ・ 《세상을 바꾼 건축》, 클라우스 라이홀트 외, 예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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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열정이 남긴 불멸의 흔적을 따라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여행을 떠난다! 필론이 선택한 세계 7대 불가사의부터 최근 선정된 세계 신 7대 불가사의, 그리고 그 후보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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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페트라 – 세계 불가사의 여행, 현암사 편집부,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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