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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여 년 전 세워진 건물의 흔적 앞에 서서 21세기의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내는 파도를 보고 있자니 몸과 눈이 다른 시대에 선 듯도 하다. 옛 건물과 새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이 공간 사이에 흘렀을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움직임의 물결 속에서 나도 함께 일렁이는 느낌이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올라가니, 서울시 신청사 지하에 있는 서울시민청 입구가 보인다. 입구 옆 선큰가든에는 햇빛이 쏟아지고, 위에는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우산이 경쾌하게 공중에 떠 있다. 시민들의 우산이 되겠다는 공무원들의 다짐을 표현한, 이경호 작가의 〈Dear me〉라는 작품이다. 시민청의 ‘청’ 자도 ‘관청 청’(廳)이 아니라 ‘들을 청’(聽)이다. 시민과 ‘통’(通)하는 공간을 같이 만들어가겠다는 뜻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내부에는 다른 관공서에 없는 것이 많다. 다양한 갤러리와 카페, 책방과 공정무역 가게, 시민발언대도 있다. 널찍한 시민플라자에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때로는 장터로 때로는 전시장으로 때로는 공연장으로 변하는,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옆에는 계단식 휴식 공간인 ‘활짝라운지’가 있다. 무지개색 공간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쉬는 사람들의 모습이 살아 있는 예술 작품 같다. 공간 중앙에 있는 큼지막한 창을 통해 아래층 하얀 공간이 보인다. 옛 시청의 태평홀을 지하에 옮겨 복원해놓았다. 마침 태평홀에서 결혼식이 진행 중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한 쌍씩 이곳에서 백년가약을 맺는다. 신부의 하얀 웨딩드레스가 하얀색 공간과 하나가 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창 아래 펼쳐지는 아름다운 결혼식을 축하해준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커플처럼, 시청과 시민 역시 새로운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둥근 유리에 둘러싸인 책방을 지나니 ‘군기시 유적 전시실’이 나타난다. 조선 초기 청계천 물길을 따라 석축이 쌓여 있고, 칸칸이 옛 집터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유리 바닥을 걸으며 마을을 가로지르니, 15~16세기 조선에 온 것 같다.
‘군기시’(軍器寺)는 조선시대 무기 제조 기관이다. 신청사를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중 발견한 ‘군기시’ 유구(遺構)를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해놓았다. 유구는 집터나 고분 등 옛 구조물을 일컫는 말이다. 발굴 당시 발견된, 무기 제조 과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유물들도 같이 전시되어 있다. 열과 압력에 의해 엉겨 붙은 총통과 활촉 덩어리도 있는데, 나중에 무기 제작에 재활용된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굴되어 보물 제861-2호로 지정된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도 있다. 불랑기자포는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子砲)로, 불랑기모포(佛狼機母砲)에 끼워 사용한다. ‘불랑기국’은 15세기 유럽을 일컫는 말로, 불랑기포는 유럽에서 들어온 대포를 의미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무기 하나하나마다 제작 연도와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것을 만들고 이름을 새긴 얼굴 모를 장인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둥그런 계단을 타고 시청 1층 로비로 오르니, 녹색의 거대한 수직 정원과 커튼월을 지지하는 ‘기둥의 숲’이 천장 끝까지 솟구쳐 오른다. 둥그렇게 돌아가는 전면 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햇볕에 거대한 녹색의 물결이 반짝이고, 설치미술가 전수천의 〈메타서사-서벌〉이 구름처럼 부유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수직 정원 때문인지 처마처럼 튀어나온 건물의 형태 때문인지 다른 공공 청사와 다르게 서울시 청사의 로비는 상큼한 느낌마저 든다. 마침 로비에는 을지로를 다룬 학생 건축전이 진행 중이고, 시민들은 여기저기 앉아 쉬고 있다. 위압적인 관공서의 느낌은 어디에도 없다.
녹색 물결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을 가로지르는 유선형의 물체 몇 개가 눈에 들어온다. 우주선 같기도 하고 미지의 생명체 같기도 하다. 유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주변 공간이 좁아지며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문이 열리고 9층 하늘광장에 들어서자, 시원하게 열린 복층의 하얀 공간에 빛이 가득하다. 하늘광장은 시민을 위한 휴식 공간 겸 전시 공간으로 8층부터 10층까지 모두 세 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8층은 전시장, 9~10층은 카페다. 전시장에서는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의 정감 있는 옛 마을을 다룬 전시회가 한창이다. 가운데 긴 공간에는 홍대 앞 ‘서교365’의 모형이 있고, 기울어진 안쪽 벽에는 건축가의 맛깔 나는 스케치가 걸려 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공간은 시원하다.
유리로 덮인 아트리움에서는, 온실효과와 굴뚝효과로 인해 데워진 공기가 공간 상부에 모일 수밖에 없는데, 하늘광장을 감싸고 있는 이중 외피가 효과적으로 열을 차단하는 것 같다. 아트리움 내부 온도가 일정 이상 오르면, 시원한 외부 공기를 유입하는 아래쪽 창이 열리고, 내부의 더운 공기는 상부의 창을 통해 밖으로 배출된다고 한다. 한여름에도 와봐야겠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받아 창 쪽에 앉으니 푸른 서울광장이 보인다. 공기막 구조로 인해 덜 투명한 것이 조금 아쉽다. 건너편 프라자호텔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다.
서울시 신청사에 대해 말이 많다. 거대한 쓰나미 같은 전면 유리벽이 서울 시청 본관을 덮칠 듯 너무 위압적이라거나, 고전적인 형태의 옛 서울 시청 본관과 유리 건물인 신청사가 따로 논다거나, 외계 물체가 착륙한 것 같다며 주변 도시 문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다른 호화 청사들과 비교하며 아직도 저런 유리 온실 건물을 짓냐며, 여름과 겨울 냉난방비는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형태와 외관에 관한 지적이다. 말들이 많아서였을까. 한 일간지와 건축 잡지는 서울시 신청사를 한국 현대 건축물 중 ‘최악의 건물’로 선정하였다. 이런 반응들을 보거나 듣고 있노라면 만약 지금의 13층짜리 ‘쓰나미’ 건물이 아니라 원래 안대로 건물이 지어졌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왔을지 궁금해진다.
원래 당선안은 거대한 항아리 모양의 21층 건물이었다. 또한 지금의 신청사가 태극 문양, 회오리, 성냥갑의 말도 안 되는 형태를 강요한, 상식을 벗어난 과정을 거쳐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서울시 신청사는 ‘최악의 건물’이 아니라 ‘최악의 과정’이라고 해야 맞다. 서울시 청사의 근본적인 문제는 형태적인 것도 아니고 친환경적이냐 아니냐도 아닌, 시 청사가 만들어진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 신청사가 지어지는 과정은 시작부터 불안했다. 건축업계에서 흔히 쓰는 말 가운데 ‘턴키’(turn key)라는 용어가 있다. ‘열쇠를 돌린다’는 뜻으로,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면 건축주가 열쇠만 열고 들어가서 바로 살 수 있도록 시공업자가 설계에서 인테리어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해서 넘기는 방식을 말한다. 턴키 방식은 해외 플랜트 건설이나 대규모 공사처럼 시공업체가 책임지고 예산과 일정을 맞춰야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많이 사용한다.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울시 신청사를 새로 짓는 것은 효율성만 따질 일이 아니다. 수백 년의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는 자리에 세워질 건물이자,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이면서, 대한민국 최대 도시의 구성원인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건물을 짓는 프로젝트인만큼 효율성보다는 더 챙겨야 할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서울시 역시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턴키 방식으로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끌어내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예상한 서울시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2005년에 시행된 공모는 1단계 아이디어 공모전과 2단계 턴키 입찰 방식의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에서 당선된 팀들이 대형 건설사와 각각 짝을 지어 2차 경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유도하면서 턴키 방식의 효율성도 동시에 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우선 1단계 공모전에 서른세 개 회사만 출품을 했다. 게다가 최우수상으로 선정된 일곱 개 회사는 대부분 대형 설계 회사였다.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은 턴키 방식의 문제점을 직감하고 아예 출품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2단계도 마찬가지였다. 턴키 입찰 방식 단계에서는 최우수상 일곱 개 작품 중 다섯 개 회사만 대형 건설사와 팀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고, 그중 네 개 회사만 출품을 했다. 출품 후 상황이 더 문제였다. 1단계에서 아이디어를 공모한 취지가 무색하게도, 2단계에 출품한 설계안은 한 개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 원안에서 크게 달라져 있었다. 턴키 방식을 전제로, 건축가가 건설사와 팀을 구성하는 순간부터 주도권은 건설사가 쥐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건축가가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애초에 2단계 턴키 입찰 단계에서 1단계 아이디어가 뒤집힐 것을 예상하고, 일단 그림만 만들어 제출한 뒤 오히려 로비에 열을 올린 이들도 있다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 4월, 출품작 가운데 쪼개진 ‘항아리’ 안이 최종 선정되었다. 그런데 두 달 뒤인 6월에 열린 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 ‘항아리’ 안은 부결되었다. 건물 형태가 가까이에 있는 덕수궁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 뒤에 전개된 상황은 그야말로 황당하다. 같은 해 10월에 열린 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 갑자기 이전 형태와 전혀 다른, 회오리 모양으로 감아 올라가는 듯한 ‘태극 문양’ 형태의 수정안이 제출되었다. 문화재심의위원회는 역시 비슷한 이유로 수정안을 다시 한 번 부결시켰고, 한 달 후에 층수를 한 층 낮춰 수정한 새로운 안 역시 부결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3월에 다시 열린 심의에서 새롭게 수정하여 제출한 박스 형태의 ‘성냥갑’ 안이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덕수궁 쪽 앙각을 확대하고 기존 청사와 신청사 사이에 시민을 위한 공간을 대폭 확대하는 조건이었다.
이런 과정이라면 공모전을 왜 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주처는 공모전을 통해 좋은 설계안을 뽑겠다는 애초의 취지는 까맣게 잊은 듯 마치 설계 회사를 뽑는 자격시험처럼 공모전을 취급하고, 설계 회사는 한 술 더 떠 설계안보다는 로비에 더 힘을 쓰는 모양새를 보였다. 가까스로 최종안이 결정되었지만, 이번에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성냥갑’이냐 ‘토스트’냐, 하는 비난이 빗발쳤다. 가장 큰 지적은 서울 시청이라는 상징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또다시 그해 9월, ‘성냥갑’을 조금 비튼 안이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역시 랜드마크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여론의 질타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국 서울시는 전면적인 재설계를 선언하고, 그제야 비로소 문화재청과 건축 관련 단체들과 소통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7년 11월 건축 관련 단체들의 추천을 받아 유걸, 박승호, 류춘수, 조민석 등 국내 저명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초청 공모전을 열었고, 문화재청은 덕수궁 담벽으로부터 100미터까지만 적용하는 27도 앙각 규정을 확대 적용하고 시민 관련 시설을 30퍼센트까지 확대하는 조건으로 더 이상 설계 변경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열린 초청 공모전에서 건축가 유걸의 수평적인 건물이 다른 수직형 건물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벌써 여섯 번째 설계안이었다. 결과적으로 서울시가 시민 및 관련 단체들과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3년의 시간과 함께 시민의 소중한 세금까지 낭비한 셈이 되었다.
건축가 유걸의 안이 당선되었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차와 2차 공모를 통해 당선된 설계 회사와 시공사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초청 공모를 통해 당선된 건축가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관철시킬 수 있는 제도적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건축가 유걸은 아이디어만 제공한 꼴이 되고, 1차에서 당선된 설계 회사는 애초 선정된 설계가 아닌 초청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유걸의 아이디어로 다시 실시설계를 해야 하고, 시공사 역시 처음부터 다시 공사비에 맞는 시공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는 사이 내부의 다양한 공간을 외부로 표출하기 위한 유걸의 투명한 외피는 덜 투명한 이중 외피로 변했다. 온실효과를 우려한 시공사가 단열효과가 좋은 것으로 바꾼 것이다. 둥그런 볼륨의 다목적홀과 구조의 관계를 표현하려 했던 서측 입면은, 유리에 종이와 작대기를 잘라 붙여놓은 듯한 느낌이 되고 말았다. 신청사에서 서울광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던 조경 계획도 모두 사라졌다.
2009년에 완공할 예정이었던 건물은 3년이 지난 2012년에야 입주할 수 있었다. 처음 공사비 2,000억여 원은 거의 3,000억여 원으로 풍선처럼 불어났다. 적법하게 진행된 최초 공모전 결과를 발주처 스스로 무시함으로써, 모든 참여자를 희생자로 만들어버리고, 시간도 날리고, 돈도 허비하고, 제일 중요한 건물마저 망친 것이다. 사용자가 아닌 발주처의 편의를 위한 턴키 방식으로는 서울 시청의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요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음을 결과가 말해준 셈이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건축가 유걸은 “서울 시청 같은 중요 공공 건축물은 편하게, 검증된 것만으로 짓는 건물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많은 고민을 담아 지어야 하는데, 턴키 방식으로는 그런 미래 지향적인 가치를 담아내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그가 건물이 완공된 모습을 보고 어떻게 느꼈을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건축가 유걸의 설계안이 애초에 현실성 없는 무책임한 아이디어였다는 주장도 있다.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로 거론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무려 5,000억 원에 가까운 돈을 들여 원안대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시 건물로 돌아와 투명한 구름다리를 건너면 도서관 쪽으로 갈 수 있다. 외계에서 착륙한 우주선 같은 공간에서 갑자기 하얀색 대리석으로 마감한 고풍스러운 공간으로 이동한다.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스타게이트를 통과한 후 도착하는 흰색 방이 떠오른다.
도서관은 옛 서울 시청 본관으로, 1926년에 일제가 경성부 청사로 지은 건물이다. 어둡고 무거운 느낌의 옛 서울 시청 건물이 시민들을 위한 밝은 도서관으로 재탄생했다. 각 층마다 다양한 테마의 도서관으로 꾸며졌는가 하면 3층 시장실, 접견실, 회의실은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옛 회의실에는 역대 서울시장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고, 세운상가와 한강개발사업 등 서울시의 중요 사업 문건들이 회의 책상 위에 전시되어 있다. 회의실을 한 바퀴 돌면 서울 시정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시장실은 가구도 작고, 의외로 단출하다. 의자에 앉아보지만, 왠지 불편하다. 지어진 지 90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경성부 청사였을 때나 서울시 청사였을 때나 공간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옛 접견실 카펫 밑에서 1926년 6월 6일자 〈아사히 신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경성부 청사는 원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덕수궁 바로 앞으로 거대한 청사를 지어 옮겨온 것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3·1운동이 거세었던 덕수궁 앞에 청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의 독립의식을 꺾으려는 의도도 반영되었다. 경성부 청사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본’(本) 자의 형상으로, 북악산의 ‘대’(大) 자 형태와 경복궁 앞에 있던 조선총독부의 ‘일’(日) 자를 합쳐 ‘대일본’(大日本)이 완성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건물을 우리는 광복 후에도, 그리고 최근까지 서울시 청사로 사용해왔다. 이제 이곳은 서울 시민들이 애용하는 도서관이 되었다. 좋든 싫든 옛 시청 건물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제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건물의 중앙홀에 서니 위에서 빛이 쏟아진다. 옛 구리 돔을 유리로 바꾼 것이다. 유리 돔을 통해 푸른 하늘이 보인다. 서울광장 쪽에서 보면 옛 청사 모습 그대로인 것 같지만, 사실 옛 건물에서 보존된 것은 중앙홀 부분과 서울광장 쪽 전면 벽체뿐이다. 중앙홀 아래 땅속에 깊은 파일을 박아서 기존 구조를 띄우고, 그 아래로 파들어가 지하 시민청 공간을 만들어 넣었다.
도서관 열람실 공간 역시 새로 지어졌다. 옛 시청의 전면 벽체 뒤에 철골 구조를 삽입하여 기존 벽체를 세우고, 나머지 내부 슬래브는 모두 잘라낸 후 지하 시민청 위로 열람실을 지어올렸다. 옛 건물을 이렇게 전면적으로 리모델링한 것에 대해 역사적인 건물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정기를 훼손하기 위해 일제가 의도적으로 지어놓은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이 역사적인 맥락을 존중하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보존된 부분은 리모델링하기 전에도 시민의 것이었다. 중앙홀은 시민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공용 로비 공간이었고, 전면의 벽체는 건물의 벽체이기 이전에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 가로의 도시적인 입면이었다. 특정한 용무가 있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나머지 공간 역시 도서관으로 거듭나면서 이곳은 온전히 시민을 위한 공간이 된 것이다.
내친 김에 옥상 정원까지 올라가본다. 꼭대기층으로 올라가니 옛 청사의 유적이 전시되어 있다. 문짝과 창문, 테라코타 장식, 경첩과 손잡이, 심지어 유리 돔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잘라낸 철골 구조와 철근 콘크리트 구조 일부분도 남아 있다. 새로 마감한 하얀 벽체들 사이에 허름한 벽체 하나가 서 있다. 옛 벽체다. 오랜 시간 덧댄 마감을 모두 벗겨낸 벽체에서 90여 년 전 그것을 세운 이름 모를 장인의 손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창밖으로는 푸른 옥상 정원이 펼쳐져 있고, 신청사의 커튼월은 검푸른 파도가 되어 넘실거린다. 90여 년 전 세워진 건물의 흔적 앞에 서서 21세기의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내는 파도를 보고 있자니 몸과 눈이 다른 시대에 선 듯도 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 건물은 지금 우리 곁에 서 있다. 옛 건물과 새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이 공간 사이에 흘렀을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움직임의 물결 속에서 나도 함께 일렁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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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3년 지금까지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우리가 사는 집, 집들이 모인 동네, 나아가 우리의 고향인 도시라는 공간에는 온갖 의미와 작동 원리가 숨어 있다. 사소한 것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편적인 것에서 구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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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서울시 청사 –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조한,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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