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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언제로 가느냐는 이곳을 찾는 수많은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렇게 이곳은 열린 시간의 공간이다. 나는 지금 어느 시간에 서 있는 것일까.
어린이대공원은 나에게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어릴 적에 미술대회나 발명대회로 어린이대공원을 참 많이 찾았다. 한번은 어린이대공원 입구에서 희고 네모난 강정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신나서 발로 밟아 박살을 냈는데, 지나가던 할아버지에게 엄청 꾸중을 듣고 강정 부스러기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렸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회관에서 여는 과학교실에 왔다가 오락실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남아 있던 동전마저 하수구에 실수로 빠뜨려서 도봉구에 있는 집까지 반나절 걸려 걸어갔던 기억도 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러 사건들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나이가 든 후에는 별로 갈 일이 없었다.
최근에 가보니 내가 기억하던 놀이공원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직도 식물원이나 동물원 같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시설이 많이 남아 있지만, 2006년 10월부터 무료 개장한 후에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동네 분들이 산책하거나 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공원이 되었다.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으니 과거의 추억이 솔솔 떠오르는 듯했다.
어린이대공원에는 굴곡 많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최근에 리모델링한 ‘꿈마루’라는 건물이다. 공원 정문으로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음악분수 오른쪽 뒤편에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다. 원래는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던 서울컨트리클럽(서울CC)을 위해 1970년에 클럽하우스로 지어졌다. 그런데 특권층을 위한 골프장이 서울 시내에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박정희 대통령이 경기도 고양으로 골프장을 이전시키고, 육영수 여사의 제안으로 골프장이 있던 당시 70만 제곱미터의 부지에 어린이대공원을 만들었다.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 어린이대공원으로 다시 문을 열자, 클럽하우스 건물은 제대로 사용되지도 못하고 어린이대공원 교양관으로 용도가 바뀌었고, 이후 거의 40년간 전시장과 식당과 관리사무소로 사용되는 운명을 걷게 된다.
원래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 민씨의 능이 있던 곳이다.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때문에 민씨의 능은 처음에는 유강원(裕康園)으로 불렸다. 1907년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민씨는 순명효황후로 추증되었고, 능도 유릉(裕陵)으로 승격되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洪陵, 사적 제207호) 옆으로 유릉을 이장하여 순종을 같이 합장하면서 지금 이곳의 주인은 없어진 셈이다. 지금도 어린이대공원 정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열린무대’ 뒤편에 당시 석조물(순명비 유강원 석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4호)들이 남아 있다. 가운데 능이 있던 빈자리를 석조물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아직도 떠난 임을 기다리는 듯한 측은한 모습이다.
능 자리는 웬일인지 골프장이 되었다. 순종이 승하한 바로 다음해인 1927년의 일이다. 골프광으로 유명했던 영친왕이 능이 있던 군자리 일대 100만 제곱미터의 부지를 무상으로 임대해주고, 심지어 골프장 건설비로 당시 돈 2만 원을 쓰고, 이후 3년간 매년 5,000원씩 보조금을 지불하면서 전장 6,500야드 18홀 코스의 군자리 골프장을 만들게 했다. 영친왕은 이미 1924년에 서울 효창공원 안에 9홀 코스를 만들고,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클럽인 ‘경성골프구락부’도 결성했으며, 많은 시간을 골프장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을 두고 혹자는 나라 잃은 슬픔, 허수아비 왕으로 사는 자신의 처지를 잊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하는데 그의 속마음은 알 길이 없다. 이전에 이미 원산과 청량리 일대에 골프장이 있었지만, 주로 외국인들이 사용했던 점을 감안하면, 1927년에 조성된 군자리 골프장이 우리나라 골프장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골퍼이자 1941년에 한국인 최초로 일본 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연덕춘(1916~2004) 선수가 골프에 입문한 곳도 군자리 골프장이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는 시즌 평균 최저 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덕춘상을 수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골퍼인 연덕춘 선수를 기리기 위함이다. 골프장의 운명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비상용 비행장 활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영친왕이 사랑했던 군자리 골프장뿐만 아니라 다른 골프장들도 모두 폐쇄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골프장들은 황폐화되거나 농경지화되었다. 1954년이 되어서야 군자리 골프장은 서울컨트리클럽으로 이름을 바꿔 개장하였다. 그러다가 1973년 박정희 정권 때 어린이대공원으로 탈바꿈을 했다.
황후의 능에서 일제강점기에는 ‘최초의 골프장’이 되어 왕의 사랑을 받다가, 전쟁으로 폐쇄된 뒤 다시 개장했다가 이번에는 최초의 어린이공원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이곳은 굴곡진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에 완공된 클럽하우스는 그런 맥락에서 골프장에서 어린이대공원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는 중요한 건물이기도 하다.
원래 어린이대공원 측은 노후한 교양관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을 예정이었다. 골프장 클럽하우스 용도로 만들어진 공간은 관리사무소로 사용하기에 너무 거대했고, 전시관이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벽을 세우고 지붕을 씌우고 페인트를 덕지덕지 칠하면서 원형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상태였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공원 측에서도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에서 어린이대공원 교양관으로의 변화를 버텨낸 이 건물의 생명력도 참 대단하다.
2009년 초에 신축을 위한 설계 용역을 추진하는 과정 중 디자인 심의에서 건물을 알아본 어느 심사위원이 신축보다 리모델링을 조언했고, 담당 공무원은 심사위원과 함께 선유도공원으로 유명한 성균관대 석좌교수인 건축가 조성룡에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두 쌍의 거대한 콘크리트 사각 기둥이 짝지어 있는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본 조성룡이 자세히 알아본 결과,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설계한 우리나라 최초의 클럽하우스 건물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건축가 나상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2002년에 성균관대 이행철이 자신의 석사논문 「건축가 나상진과 그의 작품에 관한 연구」에서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를 사례로 다룬 것을 보면, 역사의 굴곡을 견뎌내며 철거를 피하는 이 건물의 ‘곡예술’도 한 편의 서사 드라마 같다.
건축가 김중업이나 김수근과 달리 건축가 나상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상진은 김중업보다 한 살 어리고 김수근보다 여덟 살 많은 동시대 건축가로서, 1950~197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건축가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 건축계가 김중업과 김수근의 계보로 양분되면서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김중업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김수근이 일본에서 교육받은 것과 달리 국내에서만 교육받고 활동한 나상진은 한국의 풍토와 기술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건축을 시도한 토종 건축가다. 특히 공장에서 미리 콘크리트 부재를 제작하여 현장에서 조립하는 프리캐스트 콘크리트(precast concrete : PC) 공법을 활용하여 콘크리트 건물의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기술적 측면에서도 많은 실험을 시도했다. 어린이대공원 내에 있는 클럽하우스 외에도 인천에 있는 제일은행 지점 등 건축가 나상진의 건물들이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꿈마루는 나상진의 운명만큼이나 리모델링 방식도 아주 독특하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거대한 구조물을 리모델링하면서 공원 측에서는 작은 면적의 프로그램만 요구했다. 그렇지만 건축가 조성룡은 고려대학교 최춘웅 교수와 함께 기발한 방식으로 많은 부분을 비워내면서 건물이 내재한 다양한 ‘시간’들을 다시 살려냈다. 교양관으로 사용하면서 막혀 있던 벽과 지붕을 모두 걷어내고 원래 클럽하우스의 구조를 최대한 드러냄으로써 숨어 있던 ‘클럽하우스의 시간’을 살려내는가 하면, 새로 깔끔하게 마감을 하지 않고 수십 년간 건물의 벽과 천장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그대로 둠으로써, 교양관의 시간을 보존하고, 새로 들어가는 관리사무소와 전시 공간, 북카페는 기존 건물의 재료와 대비되는 투명한 유리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꿈마루의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는, 감동적인 ‘시간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건물과 마주하면 우선 전체적으로 얕은 동산에 수평으로 떠 있는 느낌이다. 콘크리트 사각 기둥이 두 개씩, 네 쌍의 기둥이 무려 25미터 간격으로 서서 거대한 2층과 3층 콘크리트 슬래브를 양쪽에서 잡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입구 위에 떠 있는 2~3층 슬래브는 비나 바람을 막아주는 캐노피 역할도 하는데 1970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스케일이 크다. 2층과 3층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푸른색 콘크리트 난간도 인상적이다. 바로 건축가 나상진이 PC공법으로 만든 콘크리트 화단이다. 건물 곳곳에 화단뿐 아니라 벽체 등 다양한 PC 콘크리트 부재를 많이 사용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 푸른색 페인트로 칠해진 PC 부재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거대한 콘크리트 캐노피 밑으로 지나, 오랜 시간 산화된 듯한 철재 창틀 사이로 걸어 들어가면 내부로 들어선 것 같지만, 슬래브가 잘려나가고 보만 남아 있는 상부 구조와 유리가 없는 창틀을 통해 바람이 불고 햇볕이 스며든다. 내부인지 외부인지 알 수 없는 이곳은, 옛날 클럽하우스에서 로비로 사용하던 공간이다. 방금 지나친, 유리가 없는 창틀은 교양관으로 사용할 때 세워졌던 벽과 창을 모두 걷어내고 클럽하우스에 있던 창틀을 복원한 것이다. 눈을 감고, 따뜻한 햇볕을 느끼며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를 듣고 있으니 꿈마루에 쌓여 있는 수많은 시간들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 같다. 나는 옛 클럽하우스의 내부에 서 있는 동시에, 바로 이 순간 꿈마루의 외부 공간에 서 있다.
유리가 없는 창틀은 과거를 추모하는 기념비이자 시간 여행의 문이다. 앞에는 꼭대기 천창으로 빛이 쏟아지는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서 있고, 오른쪽에는 1층에서 3층까지 올라가는 거대한 콘크리트 램프가, 오른편 창틀 밖에는 2층으로 곧바로 올라가는 또 다른 램프가 보인다. 요즘 규정에 맞게 최소한의 난간과 계단만 설치해놓은 램프에는 벗겨진 페인트와 낙서 자국 등 오랫동안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경사로를 타고 올라가니, 새로 깐 벽돌 바닥의 달각거리는 소리와 원래 콘크리트 벽의 거친 촉감이 과거와 현재를 묘하게 연결시킨다. 밖으로는 구불구불하게 휘어 내려가는 또 다른 램프가 있다. 구조적인 이유로 더 사용하지 않는 램프에는 무성하게 자란 수풀의 하늘거림이 옛사람들의 움직임을 대신하고 있다. 나무 계단을 깔아놓은 내부 램프를 타고 올라가니, 오목하게 휘어진 흰 벽에 한글 ‘ㅎ’자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그림을 만나게 된다. 안상수체로 유명한 홍익대 안상수 교수의 작품이다. 클럽하우스가 교양관으로 바뀔 적에 학생 신분으로 참여했던 안상수 교수가 자신만의 추억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순백의 하얀 벽에 그려진 ‘한글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역사적 시간을 벗어나 또 다른 ‘가상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가벼운 느낌의 목재 계단을 밟고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거칠고 무거운 콘크리트 벽면의 1층과, 산뜻하고 투명한 유리 마감의 2층, 정갈하지만 겸허한 붉은색 벽돌의 3층 공간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매끈함에서 투박함으로, 따뜻함에서 차가움으로 온갖 시촉각적 느낌이 오고 간다. 나는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촉감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2층에 다다르자 어두운 복도 끝으로 밝은 공간이 보인다. 어두운 복도를 걸으니, 발밑에서 달각거리는 벽돌 바닥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가운데 네모난 연못이 있는 중정 공간에 도착한다. 중정 양쪽에는 야외 피크닉 공간이 있다. 나무 벤치와 군데군데 나무가 심어져 있는 피크닉 공간은 교양관에서는 전시관으로, 클럽하우스 시절에는 라커룸으로 사용되던 실내 공간인데, 콘크리트 지붕과 보(樑)를 잘라내고 야외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피크닉 공간 쪽으로 다가가니, 새로 깐 산뜻한 붉은 벽돌에서 이끼 낀 오래된 붉은 벽돌로, 다시 연한 핑크색 보도블록에서 막 자연에서 잘라온 듯한 나무 바닥으로, 내 발밑에서 공간이 끊임없이 변한다. 라커룸이 있던 벽에는 아직도 옛 라디에이터의 시커먼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붕이 사라진 곳에 남아 있는 잘려나간 보의 단면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바람에 속삭이는 나뭇가지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묘한 뭉클함이 느껴진다.
야외 피크닉 공간을 한 바퀴 돌고 3층으로 오르면 거대한 지붕과 3층 슬래브 사이로 주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슬래브를 잘라내 보와 보 사이로 아래층이 보이고,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뚫어낸 지붕으로는 하늘이 보인다. 창과 외벽이 없는 3층에는 바람과 빛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수직과 수평의 부재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3층을 걷고 있으면, 층과 층, 내부와 외부, 수평과 수직,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 서게 된다. 북카페 앞에는 시원하게 야외 데크가 펼쳐져 있다. 데크를 빙 두른 회색 난간을 따라가면, 바깥쪽으로 살짝 꺾여 내려가는 좁은 길을 만나게 된다. 클럽하우스를 지을 때 지붕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캣워크(catwalk)에 난간을 붙여 만든 산책길이다.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 야외 피크닉 공간을 위에서 내려다보게 된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면서 전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듯이, 꿈마루의 시간을 위에서 관조하는 것 같다. 선유도공원에서 옛 정수시설을 오르내리며 물이 되는 느낌이었다면, 꿈마루에서는 또 다른 시간의 흐름을 타보는 느낌이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야외 피크닉 공간을 빠져나와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본다. 뒤쪽 언덕에서 3층까지 곧바로 날아가는 날렵한 콘크리트 계단이 있다. 계단 주변에는 새로운 한국적 건축을 찾기 위한 나상진의 깊은 고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콘크리트 기둥이 위에서 넓어지며 거대한 노출 콘크리트 계단을 지지하는 모습에서는 전통 목구조의 공포 형태가 보이는가 하면, 수직으로 골이 파인 콘크리트 기둥과, 수직으로 붙어 있는 투박한 콘크리트 차양들은 1960년대 서양에서 유행하던 브루탈리즘 건축을 보는 것 같다. 그 옆에 둥그런 호박돌로 둘러싸인 2층짜리 원통 건물에서는 건축가 김중업의 서산부인과 건물과 지금은 사라진 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에서 보이던 원초적 생명력이 느껴진다면, 정갈하게 벽돌로 마감한 3층짜리 원통 건물에서는 건축가 김수근의 벽돌 건물이 보인다.
또한 공중에 부양한 거대한 콘크리트 슬래브에서는 미국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의 낙수장을, 건물 곳곳에 위치한 돌출한 콘크리트 물홈통과 원통형 건물 내부의 원추형 천창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연상시킨다. 마치 하나의 건물에 온갖 건축 양식이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건축 백과사전 같다고나 할까. 특히 꿈마루의 구축적 구성 방식과 거친 콘크리트 물성, 원형 평면과 원초적인 호박돌 마감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걸쳐 대한민국 건축계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으로, 꿈마루는 당시 세계 건축의 흐름과 한국 건축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지표가 될 수 있다. 나상진에게 건축은 원초적인 땅과 추상적인 하늘을 연결하는 매듭과 같은 것이었고, 클럽하우스의 수직과 수평, 원초적 재료와 추상적 형태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결구로서 건축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꿈마루를 둘러보고 나오니 어느새 석양 무렵이다. 건물을 둘러보는 내내 그 안에 갇혀 있던, 차갑게 얼어붙은 ‘시간’이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에 의해 되살아난 듯해 참 좋았다. 건물 밖에 서니 막 지기 시작한 붉은 태양빛이 차갑고 거친 콘크리트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꿈마루는 시간 여행을 떠나는 출입구다. 이곳을 찾으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의 유릉이 있던 시간으로 가볼 수 있고, 영친왕이 망국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골프를 치던 군자리 골프장의 시간으로도 가볼 수 있고, 박정희 대통령이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골프를 치던 서울컨트리클럽 클럽하우스의 시간으로도, 육영수 여사가 대한민국의 미래인 어린이들을 위해 개장한 어린이대공원의 시간으로도 갈 수 있다. 언제로 가느냐는 이곳을 찾는 수많은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렇게 이곳은 열린 시간의 공간이다. 나는 지금 어느 시간에 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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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3년 지금까지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우리가 사는 집, 집들이 모인 동네, 나아가 우리의 고향인 도시라는 공간에는 온갖 의미와 작동 원리가 숨어 있다. 사소한 것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편적인 것에서 구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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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조한,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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