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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에는 사랑이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며 ‘사랑의 사건’들이 매일매일 발생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사랑의 사건 속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대한제국의 운명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과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다. 왜 그런 말이 생겼을까. 왕의 성은(聖恩)을 받지 못한 덕수궁 후궁들의 질투가 연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말도 있고, 덕수궁 돌담길이 구름의 기운이 강해서 그 길을 같이 걸으면 앞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이 옛날에는 대법원과 함께 서울가정법원이었는데, 이혼하려는 부부가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가정법원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겨났다는 의견도 있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채워진 갑갑한 도심에서는 데이트할 곳이 마땅치 않은데, 고즈넉한 돌담에 넉넉한 가로수가 늘어선 조용한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은 예나 지금이나 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분위기다. 그렇다 보니 많은 연인들이 찾게 되었을 것이고, 그중에는 헤어지는 연인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생긴 게 아닐까.
보통 정동길이라 하면, 덕수궁 대한문 옆에서 시작되는 길을 말한다. 인사동이나 대학로처럼 번잡한 상가가 늘어서지 않아 연인들이 서로에게 집중하기 좋고, 서울시립미술관이나 정동교회 또는 정동극장쯤 가서 벤치에 앉으면 딱 사랑을 고백할 타이밍과도 얼추 맞을 듯하다.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가로수가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고, 오래된 돌담의 습한 냄새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천천히 흘러가는 전돌 바닥을 연인과 함께 또각또각 걷고 있으면 사랑하는 이의 체취와 숨소리에 온몸의 세포가 반응하게 되고,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자신의 심장 소리에 사랑을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이 위치한 정동(貞洞)은 탄생부터 절절한 남녀의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정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묘인 정릉(貞陵)이 이곳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이성계와 후일 신덕왕후가 되는 강씨의 첫 만남에 얽힌 일화도 로맨틱하다.
황해도 신류산 아래 용연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근처 마을에 살던 강씨가 연못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이성계는 더위에 지쳐 물을 찾아 헤매다 연못을 발견하고 황급히 말에서 내려 물을 마시려 했다. 그때 강씨가 만류하면서 손수 물을 바가지에 떠주며 버들잎 몇 개를 띄웠다. 이성계가 왜 마실 물에 버들잎을 띄우냐고 역정을 내자, 강씨는 찬물도 너무 급히 마시면 탈이 날 수 있으니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수줍게 말했다. 이에 크게 감복한 이성계는 본처 한씨와의 사이에 이미 장성한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물한 살이나 어린 강씨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물론 고려 태조 왕건과 둘째 부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역시 버들잎을 띄운 물바가지 덕분에 만났다는 것을 보면, ‘물바가지에 버들잎’ 일화는 진위 여부에 상관없이 현명한 여인임을 보여주는 고전적 레퍼토리다.
현명한 데다 강건했던 강씨는 이성계와 함께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같이 군막 생활을 했고, 조선 개국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특히 이성계가 해주 지방에서 말을 타다 떨어져 크게 다쳐 거동하기가 힘들어지자, 정몽주가 이를 노려 이성계를 죽이려 하는 것을 미리 알고 이방원을 급히 보내 개성으로 불러낸 것도 강씨였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여 조선을 세우자, 강씨는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된다. 하지만 신덕왕후는 시름시름 앓게 되고, 백방으로 명약과 명의를 찾은 태조 이성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국 4년 만인 1396년에 젊은 나이로 눈을 감게 된다.
왕비의 죽음을 애통히 여긴 태조 이성계는 도성 안에 능묘를 둘 수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에서 보이는 황화방(皇華坊) 높은 곳에 정릉을 조성하고, 자신도 죽으면 신덕왕후 곁에 묻힐 수 있도록 옆에 수릉(壽陵,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해두는 임금의 능)을 미리 조성해놓게 했다. 또한 불심이 깊었던 신덕왕후를 위해 정릉 동쪽, 옛 경기여고 자리에 웅장하고 화려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다. 태조는 신덕왕후에게 재를 올리는 흥천사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침소에 들었고, 아침에는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목탁 소리를 들은 후에야 수라를 들 정도로 신덕왕후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는 변방의 장수였던 이성계가 권력을 위해 고려 권세가 강윤성(康允成)의 딸과 정략 결혼을 했다고 하지만, 이성계가 강씨를 극진히 사랑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신덕왕후와 같이 묻히려던 태조의 소망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처 한씨의 소생인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를 싫어했는데, 신덕왕후가 태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도전과 함께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계비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했다. 결국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408년 태상왕인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1409년에는 정릉을 도성 밖 양주 사을한록(沙乙閑麓),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시켰다. 태종 이방원 덕분에 또 하나의 ‘정동’이 생긴 것이다. 태종은 신덕왕후의 묘를 이장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는지, 묘의 봉분을 깎아 무덤의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고 명했고,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내 태평관 북루를 새로 짓는 데 사용하게 하였다. 게다가 홍수로 청계천 광통교가 유실되자, 정릉의 병풍석을 포함한 석물을 광통교 석축을 복원하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외견상 백성들이 신덕왕후를 밟고 지나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정릉이 옮겨간 후, 신덕왕후를 위해 지은 흥천사는 점차 쇠퇴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화재와, 중종 5년(1510)에 유생들이 지른 방화로, 절의 건물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종만 남았다. 이 종의 운명이 참 처연하고 흥미롭다. 덩그러니 버려져 있던 흥천사 종은 한동안 동대문 문루에 걸려 새벽과 저녁에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고종 대에 이르러 경복궁이 낙성되고 광화문이 새로 신축되자 광화문 문루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멀쩡하게 걸려 있던 흥천사 종을 황당하게도 일본 골동품상이 떼어다가 거금을 받고 이왕가박물관에 팔아버렸고, 그 뒤에는 창경궁 명정전 뒤편 회랑에 진열되는 신세가 되었다.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은 1938년 덕수궁으로 이전하면서 이왕가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되었으며, 1969년에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되었다. 이러한 이름의 변천을 겪으며 흥천사의 종 역시 창경궁에서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1972년 모든 소장품이 경복궁 안에 있던 국립박물관으로 이사를 가는 와중에도 흥천사 종은 덕수궁에 그대로 남았다. 현재 흥천사 종은 덕수궁 광명문(옛 함녕전 정문) 안에 보루각 자격루(국보 제229호)와 신기전화차 사이에 놓여 있다. 큰 범종을 옮기기 힘들어 덕수궁에 그대로 둔 것인지, 아니면 원래 흥천사가 있던 곳으로 돌아오려는 특별한 힘 때문인지, 아니면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애틋한 사랑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흥천사 종을 옛 정릉이 있던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어쩐지 종의 운명인 듯도 하여 볼 때마다 애잔하다.
600년 전 조선을 개국한 왕과 왕비의 사랑으로 시작된 땅이라 그런지 정동에는 사랑 이야기가 많다. 그 중심에는 정동 중앙에 우뚝 솟은 붉은 벽돌의 정동교회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 벧엘예배당은 1897년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세웠다. 이 건물을 사이에 두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학교이자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역시 아펜젤러가 세운 것으로 1885년에 지어졌다. 배재학당 동관은 현재 역사박물관이자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언덕 건너편에 자리 잡은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여성 교육기관으로, 1886년 감리교회 해외여성 선교회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 1832~1909)이 설립했다. 지금은 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으로 불리며,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학교 모두 기독교 학교라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가까이에 있는 정동교회를 많이 찾았다.
당시 남녀 유별을 중시하는 조선의 풍습을 감안하여 예배당 가운데 휘장을 치고, 남쪽 문으로는 배재학당 학생들과 남자 신도들이 들어와 왼쪽에 앉고, 북쪽 문으로는 이화학당 여학생들과 여자 신도들이 들어와 오른쪽에 앉았다. 비록 휘장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한 지붕 아래 남녀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풍경이었고, 휘장 위로 수많은 연애편지들이 넘나들었다고 한다. 남녀가 한자리에 함께 있을 곳이 드물었던 그 시절, 정동교회 예배당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사랑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곳에서 사귄 남녀들도 많았고, 때문에 19세기 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의 사랑의 장소로 애용된 탓에 정동교회는 심지어 ‘연애당’(戀愛堂)으로 불리기도 했다.
1890년에는 최초의 신식 결혼이 열렸고, 1892년에는 이화학당 여학생과 배재학당 남학생이 서양식으로 예복을 차려입고 결혼하는가 하면, 1899년 7월 14일에는 배재학당 남학생과 이화학당 여학생 두 쌍의 합동결혼식이 치러져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예배당이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정동 언덕 꼭대기에 있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구 러시아 공사관은 황후를 잃은 고종이 명성황후의 시중상궁이었던 엄비(순헌왕귀비)와 같이 공간을 공유하며 진정한 의미의 부부로서 사랑을 나누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을 잉태한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덕수궁 돌담길이 사랑의 길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정비석이 1954년에 쓴 소설 『자유부인』에 덕수궁 돌담길에 관한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대학교수 부인의 일탈과 애정행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자유부인』은 서울신문에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연재된 작품으로, 매회 신문이 매진될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사회적 도덕 관념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연재 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14만 부나 팔린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고, 1956년에서 1990년 사이에 여섯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옛날에는 덕수궁 담 뒤에 있는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 왔다. 영성문 언덕길은······ 한편에는 유서 깊은 덕수궁의 돌담이 드높이 싸여 있고, 다른 한편에는 미국 영사관, 지금의 대사관 돌담이 높다랗게 막힌 데다가, 좌우편 담 안에는 수목들이 담장 밖에까지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서, 영성문 언덕길은 마치 자연의 터널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이고자 영성문 언덕길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물정(物情)도 바뀌는 법인지, 오늘의 영성문 고개에서는 이미 옛날의 그윽하던 모습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영성문 고개가 사랑의 언덕길이었던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자유부인』 하권, 고려원, 1985
소설 『자유부인』의 화자는 오랫동안 젊은 남녀들에게 사랑받았던 ‘사랑의 언덕길’ 영성문(永城門) 고갯길에서 옛날의 ‘사랑의 운치’가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당시 20대 젊은이들이 더 이상 영성문 고갯길을 ‘사랑의 언덕길’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에서 추정하건대, 1930~1940년대에는 미국 대사관저 쪽에서 옛 경기여고 터 쪽으로 넘어가는 덕수궁 돌담길로 젊은 연인들이 몰려들었던 것 같다. 양쪽으로 높은 돌담이 늘어서 있고, 돌담 위로 넘어온 울창한 나무들이 마치 터널 같은 느낌을 만들어낸다는 소설의 묘사는 지금의 언덕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성문 고갯길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20년 일제에 의해서다.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의 원래 이름)의 북문인 영성문은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본격적으로 경운궁을 확장하면서 1900년에 세워졌다. 대한제국 당시 경운궁의 영역은 경희궁(慶熙宮)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정동 전체가 경운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순종에게 양위하고 고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이곳에 살게 되었고, 경운궁의 명칭 역시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덕수궁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일제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다음 해 덕수궁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뚫으면서 영성문도 헐어버리고, 잘려나간 북서쪽의 넓은 땅 역시 유지 관리가 어렵다는 핑계로 팔아버린다.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도 일제에 의해 헐려나가고 1922년 그 자리에 일본인 여학교인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길 건너편에는 경기여고의 전신인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가 들어왔고, 1926년 뒤쪽에는 경성방송국이 들어섰다. 1897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Afanasii Ivanovich Seredin-Sabatin, 1860~1921)이 황실 도서관으로 지은 중명전(重明殿) 역시 덕수궁에서 잘려나가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전락하게 된다. 중명전은 1904년 대화재로 덕수궁 전각들이 소실되었을 때 잠시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는데, 1905년에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된 안타까운 역사 현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일제 만행에 의해 덕수궁이 동서로 나눠지며 생긴 ‘영성문 고갯길’이 ‘사랑의 거리’ 덕수궁 돌담길의 시작이었고,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중명전에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 공사,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군사령관과 일본 헌병 수십 명이 오르내리던 덕수궁 앞길이 언제부터인가 사랑이 넘치는 ‘덕수궁 돌담길’이 되었다. 이루지 못한 근대 자주국가로서 대한제국의 처절한 상흔이 남은 곳에서 새로 사랑이 꽃핀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사랑은 정치, 수학, 과학과 함께 예측 불가능한 진리의 사건이 발생하는 네 가지 조건 중 하나로, 철학은 다른 영역에서 발생한 진리의 사건을 사유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덕수궁 돌담길에는 사랑이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며 ‘사랑의 사건’들이 매일매일 발생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사랑의 사건’ 속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대한제국의 운명이 겹쳐 보이는 것은 바디우가 주장했던 ‘진리의 사건’이 서로 관통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덕수궁 돌담길의 사랑과 정치의 사건은 어떤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것일지 궁금하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려거든 정동길을 걸어보자.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고백하고, 가슴 졸이며 상대방의 답을 기다리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결과에 상관없이 그 짜릿한 순간 때문에 우리는 고백하고 또 고백하는 것이다. 그 짜릿함을 경험하러 정동길로 나서보자. 머리 위를 스치는 가로수의 그늘과 호젓한 돌담길을 걸으면서 타이밍을 잘 잡아보자. 르네상스풍의 외관에 현대적인 내부 공간을 갖춘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연애당이라 불렸던 예배당의 이국적인 계단 앞에서도, 정동극장 앞에서도 아직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면, 노래하는 분수대에서 미국 대사관저 쪽 조용한 덕수궁 뒷담을 따라 걸어 올라가며 기회를 더 엿볼 수 있다. 행여나 사랑을 거절당하더라도 너무 낙심하지 말기 바란다. 덕수궁 돌담길이 오랜 친구처럼 의연하게 그 책임을 모두 받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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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3년 지금까지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우리가 사는 집, 집들이 모인 동네, 나아가 우리의 고향인 도시라는 공간에는 온갖 의미와 작동 원리가 숨어 있다. 사소한 것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편적인 것에서 구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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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정동길 –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조한,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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