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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골목길을 걷고 있노라면 걸음 하나하나마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일상에서 잊고 있던 우리 자신의 ‘시간의 감동’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해외에서 외국인 친구들이 찾아오면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을 추천해달라고 한다.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은 경복궁과 창덕궁 같은 고궁과,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종묘나 왕릉이다. 하지만 고궁과 왕릉 몇 군데를 추천해주면, 현재 사람이 사는 동네 중에 가볼 곳은 없냐고 물어본다. 고민하다, 인사동을 추천해준다. 특정한 시간에 정지되어 있는 박제화된 공간이 아니라, 조선 초기부터 현재까지 600여 년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 숨 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물길이었던 인사동길을 따라 걸으면, 번듯한 새 건물에 일제강점기부터 책을 사고팔던 고서점이 들어와 있고, 1960년대 지어진 허름한 1층 건물에 다기(茶器)와 도자기를 파는 전통 공방이 있고, 바로 옆 2000년대 지어진 노출 콘크리트 건물에는 최신 유행의 액세서리와 소품을 파는 현대적인 공방이 있다. 또한 낡고 색 바랜 타일의 1970년대, 붉은 벽돌의 1980년대 화랑과 표구사 건물들 사이에 방금 지어진 것 같은 철판과 유리로 만들어진 갤러리들이 서 있고, 전통적인 벽돌과 기와를 쌓아 지은 모던한 형태의 건물에는 전통 찻집과 커피숍이 같이 들어와 있다.
3~4층 건물이 늘어선 널찍한 인사동길에서 샛길로 들어가면, 갑자기 1층짜리 한옥들이 늘어선 좁은 골목길이 나타난다. 1930년대 서민들을 위해 지은 집장사집들이다. 한정식 집과 전통 찻집이 있는가 하면, 파스타와 피자집도 있다. 집 앞을 따라 놓인 작은 텃밭들이 정겨운 동네 풍경을 만들어낸다. 낮은 홑처마가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갑자기 높은 겹처마 집들이 나타난다. 미술관이나 카페로 사용되고 있는 옛날 대감 집들이다. 100년도 더 된 듯한 고택에서 보는 현대 미술은 또 다른 독특한 울림이 있다. 이렇게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으면, 인사동에 담긴 시간의 향과 맛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인사동은 경복궁과 인접해 있어서 예부터 고관과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다. 조선 전기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중종 때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도 근처에 살았고, 조선 말기 왕권을 좌지우지했던 안동 김씨 세력과 구한말 최고 권세를 자랑했던 민씨 집안의 대저택 역시 인근에 있었다. 철종의 사위이자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1884)을 주도한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집도 인사동 한복판에 있었는데, 장안에서 8대 양반가로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현재 경인미술관이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옥 건물이 바로 박영효 대저택의 일부다. 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화재로 훼손되고 버려진 대저택은 일본인에게 넘어가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대부분 헐리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안채에 경인미술관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원래 안채는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에 옮겨져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다른 호화 저택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1920~1930년대 서울이 근대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주택난이 심각해지자, 집장사들이 몰락한 권세가들의 집을 매입해서 허물어버리고, 큰 대지를 쪼개서 작은 도심형 한옥들을 지어 팔았다. 현재 한정식 집과 전통 찻집의 한옥들이 늘어선 뒷골목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흥미로운 주택도 있다. 경인미술관 뒤쪽에 있는 ‘민가다헌’(閔家茶軒)이라는 찻집 겸 레스토랑은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의 1938년 작품으로, 명성황후의 친척인 민익두 대감을 위해 지은 개량 한옥이다. 독특한 H자 형태의 평면과 내부에 화장실과 욕실을 갖춘 이 건물은, 전통 한옥에서 현대적인 공간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주거사적인 가치가 있다.
인사동이란 지명이 생긴 것은 1914년이다.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의 일환으로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을 하나로 합치면서, 각각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와 인사동(仁寺洞)을 만들었다. 대사동은 큰 사찰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에는 흥복사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1467년에 원각사를 세우기도 했다. 사찰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탑골공원 안에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터 10층 석탑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인사동을 대표하는 인사동길은 원래 삼청동 쪽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개천이었는데, 복개되어 길을 따라 골동품점과 고서점 등 상점들이 늘어서면서 하나의 거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한국을 떠나는 일본인들이 모아뒀던 골동품과 고서화를 처분하게 되었고, 이를 한국에 진주한 미군들이 다시 사들이면서 본격적으로 골동품 상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정부의 골동품 중과세 조치로 인해 많은 골동품 및 고미술 가게들이 청계천 쪽으로 떠나게 되는데, 그 빈자리에 그림을 사고파는 화랑들이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화랑거리가 만들어졌다. 특히 1970년 인사동에 문을 연 현대화랑은 최초의 상업 화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전의 개념도 없던 시절에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등 화가들의 개인전을 잇달아 열어 한국 미술계의 흐름을 선도했다.
1980년대 들어서 군사정권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창작 활동을 탄압하자, 이에 맞서 미술계는 민중미술운동을 통해 저항운동을 펼쳤는데, 민중미술운동의 신호탄격인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전이 1980년에 인사동 ‘동산방’ 화랑에서 열렸다. 또한 ‘그림마당 민’은 민중미술운동의 전용 전시장이자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회의장으로 활용되었는데, 1987년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기획전 〈반고문전〉 때는 종로경찰서 세 개 중대와 대치하는 등 민중미술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이러한 1980년대의 사회의식은 인사동 찻집의 풍경까지 바꿔놓았다. 커피숍이 다방을 대체하기 시작하자, 우리의 차(茶)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전통 찻집과 다기를 다루는 전통 공방들이 인사동에 생겨났다. 1985년에는 천상병 시인과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찻집 ‘귀천’(歸天)이 문을 열어, 문학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이렇게 인사동에 문화와 예술의 기운이 꿈틀대는 것은 조선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림을 관장하는 기관인 도화서(圖畵署)가 지금의 조계사 근처에 있었다. 과거시험 때가 되면 전국에서 화공(畵工)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종이와 붓, 물감을 파는 점포가 생기고, 고서와 그림을 사고파는 서점과 공방도 생겨났다. 지금도 그 영향으로 인사동에는 역사가 깊은 필방과 표구사뿐 아니라 고서점과 화랑이 많다. 인사동 네거리에서 우리은행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90년 역사의 ‘구하산방’이라는 필방에는 전서체로 유명한 서예가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 1914~2005) 선생이 쓴 ‘고순어용’(高純御用)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고종과 순종이 즐겨 사용했다는 뜻이다. 일본 본점의 서울 지점으로 1913년 명동에 자리 잡은 구하산방은 1960년대에 인사동으로 옮겨왔는데, 이상범, 김기창, 이응노, 박노수 등 당대 유명한 서화가들이 구하산방의 붓을 사용했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인사동길 입구 쪽에 있는 고서점 ‘통문관’(通文館)은 1934년 일본인이 운영하던 금항당(金港堂)을 인수하여 시작되었는데, 국어학자 이희승, 미술사학자 김원룡, 국립박물관장 최순우 등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1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들에게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창업자 산기 이겸로(山氣 李謙魯) 옹은 한국전쟁 때 가재도구 대신 고서를 짊어지고 피난길에 오를 정도로 고서 사랑이 대단했는데, 덕분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판 불교 서적인 『월인석보』(月印釋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등 국보급 도서들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사동의 수많은 골목길을 걸으면, 우리의 가슴 아픈 근현대사와 함께, 우리의 문화예술을 지키려 했던 선구자들의 노력을 가게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요사이 인사동길을 따라 걸어보면, 예전 같은 시간의 향기와 멋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인사동 네거리에서 남(南)인사 마당 사이에는 전통 찻집 대신 커피숍이 들어왔고, 전통적인 공방 대신 대형 화장품 브랜드숍들이 자리 잡았다. 북(北)인사 마당에서 인사동 네거리 사이의 기존 전통 공방 앞에는 전통 공예품 대신 값싼 중국제 기념품을 내놓은 가게가 많다. 심지어 서화나 동양화 하나 걸려 있지 않은 필방이나 표구사도 있다.
2002년 인사동이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땅값이 급격하게 오르자, 살인적인 임대료 상승을 견뎌내지 못한 옛 가게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 자리를 장소성이 전혀 없는 대형 화장품 브랜드숍이나 프랜차이즈 커피숍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2009년 문화지구 내 권장 시설 업종에 대한 재산세 감면 혜택이 없어진 것도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의 입주를 가속화한 원인 중 하나다. 근근이 버텨내는 필방이나 표구사 역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광객이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저렴한 기념품을 앞에 내다놓고 팔기 시작했고, 옛 간판만 유지한 채 기념품 가게로 전락한 곳도 많다. 우리만의 문화와 예술을 기대하고 인사동을 찾은 사람들에게, 값싼 중국제 기념품으로 넘쳐나는 인사동길은 당혹스러운 경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인사동을 찾으면, 인사동길 자체보다는 오픈몰인 ‘쌈지길’을 가기 위해 인사동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만의 존재감을 시끄럽게 외치는 건물들의 입면과, 외국인 관광객을 호객하는 광고들로 채워진 인사동길을 걸어가다, 버드나무와 함께 열두 개의 작은 가게들이 조용하게 늘어선 쌈지길 앞에 다다르면 마음이 참 편안해진다. 가게 지붕에는 풀이 무성하고, 바람에 살랑거리는 푸른 버드나무 뒤쪽으로 검은색 벽돌과 노출 콘크리트, 그리고 목재를 가볍게 덧댄 쌈지길의 본 건물이 보인다. 길을 따라 늘어선 필방과 표구사, 공방 등 열두 가게는 인사동길의 터줏대감들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쌈지길 앞에서 열두 가게가 인사동의 정취를 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1999년 (주)쌈지가 열두 가게 자리와 함께 뒤쪽에 화재로 훼손된 한옥을 매입하고 공예품 전문 쇼핑몰을 세우기로 계획하자, 오랫동안 이 거리를 지켜온 가게들이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가게 주인들은 삶의 터전을 보호해달라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서울시에 청원을 넣기도 했다. 근래 들어 급격한 상업화로 인해 인사동길의 운치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 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열두 가게 살리기 운동’을 펼쳤고, 결국 쌈지 측에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기존 가게들의 영업권을 보장해주기로 했다.
열두 개의 ‘터줏대감’ 사이로 들어서니, 작은 변화가 내 발을 통해 느껴진다. 내려다보니 점토를 구워 만든 전통 벽돌(전돌) 위에 서 있다. 검은색 전돌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내가 쌈지길에 들어와 있음을 촉감으로 알려준다.
위를 올려다보니 빛이 쏟아지는 널찍한 마당 주변을 층층이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다. 옛날 영빈가든이 있던 한옥 마당을 쌈지길의 마당으로 살려놓은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쌈지길 건물의 형태를 물어보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건물의 형태도 아니고, 파는 물건도 아니며, 빙글빙글 돌아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다. 쌈지길을 건물이 아닌 길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의 층수 역시 1층, 2층, 3층, 4층이 아니라, 제주도 오름의 이름을 따서 첫걸음길, 두오름길, 세오름길, 네오름길로 부르고 있다. 쌈지길은 이름처럼, 길 그 자체로서의 공간을 체험하게 해준다. 길을 따라 현대와 전통 공예 공방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 상품을 판매하는 점포가 무려 70여 개나 들어와 있다.
쌈지길을 디자인한 건축가 최문규(가와건축/연세대학교)는 장사가 골고루 잘되면서도 최대한 많은 가게가 입주할 수 있도록, 1층에서 옥상까지 연속적으로 연결된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보통 상가 건물의 경우 접근성이 좋은 1층을 제외하고는 위층은 임대를 주기도 힘든데, 쌈지길은 모든 층이 가로변 1층 상가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은 1층에서 2층으로,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1/25의 낮은 경사도를 따라 편안하게 상가 앞을 걷고 있다고 느낀다. 마치 500미터 길이의 인사동길을 수직으로 감아서 말아올린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쌈지길 폭이 1.8미터에서 2.7미터 사이로 인사동을 거미줄처럼 잇는 뒷골목의 폭과 비슷하고, 중앙 마당 건너편까지의 거리가 12미터 정도로 인사동길 폭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쌈지길에서 느끼는 편안함의 비밀도 이 스케일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자주 가는 일산의 두 오픈몰과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일산에는 라페스타와 웨스턴돔이라는 두 개의 오픈몰이 있는데, 나는 걸어 다니는 느낌이 편안한 웨스턴돔을 주로 찾는다. 일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상업 지역에 위치한 라페스타와 웨스턴돔의 차이는 내부 가로의 스케일에 있다. 90미터 대지에 두 개의 3층짜리 건물이 마주 보고 있는 라페스타는 중앙의 보행자용 가로가 광화문광장의 폭과 비슷한 25미터에 이르는 반면, 같은 폭의 대지에 얇은 세 개의 건물이 배치된 웨스턴돔은 가로 폭이 12미터로 라페스타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웨스턴돔은 가로 중앙에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어서 실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가로의 폭은 3미터밖에 안 되고, 옷이나 액세서리 등의 상품을 내다놓고 팔 경우 2미터까지 줄어든다. 라페스타의 넓은 중앙 가로가 길이 아닌 휑한 광장처럼 느껴진다면, 웨스턴돔의 좁은 가로는 친근한 골목길처럼 느껴진다. 또한 웨스턴돔의 가로는 12미터 뒤에 서 있는 건물과 중첩되면서 자연스럽게 다중적인 스케일의 도시 가로 풍경을 만들어낸다.
아기자기한 공예품에 취해 좁은 쌈지길을 걸을 때는 인사동 뒷골목의 편안함이 느껴진다면, 시원하게 트인 마당 너머로 바라볼 때는 인사동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면 같으면서도 다른 가로의 풍경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쌈지길의 다중적인 스케일은, 바닥과 공간을 채운 재료들의 물성의 변화와 함께, 우리 몸에 축적되어 있는 다양한 공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쌈지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마치 잔칫날 북적대는 우리 집 마당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가, 어느새 인사동길 옆을 걸으며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고, 가벼운 느낌의 시멘트 보드 바닥을 걸으며 윈도 쇼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가도, 다음 코너를 돌면 풀이 무성한 어린 시절의 시골길에 와 있다. 중정을 돌며 건물 내부에서 쇼핑을 하다가,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저 멀리 북악산이 눈에 들어오면 어린 시절 동네 뒷산에 오르던 기억이 떠오른다. 쌈지길을 걸으면 어릴 적 정겨운 우리 집 마당에서 관광객이 넘쳐나는 도심 가로변으로, 최신 유행으로 번쩍거리는 백화점에서 어린 시절 정든 시골 산책로로, 인위적인 소비의 공간에서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자연의 공간으로, 걸음 하나하나마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일상에서 잊고 있던 우리 자신의 ‘시간의 감동’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2006년 말 쌈지길에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쌈지길에 앤디 워홀 전시회를 하면서, 입장료 3,000원을 받으려 했다. 쌈지길 측에 따르면, 입장객 수를 어느 정도 조절하여 쾌적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입장 수익은 유명 예술가 유치 및 국내 작가 후원에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3,000원짜리 티켓은 쌈지길 내 매장에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입장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손해 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입구에서 돈을 내느니 마느니 실랑이가 벌어지는가 하면, 신문과 방송에서 이슈화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도 ‘돈독이 올랐다’는 등 입에 담기도 힘든 수위의 비난 댓글이 넘쳐났다. 결국 며칠 만에 ‘쌈지길의 유료화’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사실 쌈지길은 공공재가 아니라 사유 재산이다. 따라서 입장료를 받아도 법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유료화에 반발한 것은 쌈지길을 은연중에 공공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마치 인사동 어느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입장료를 받는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만약 쌈지길이 ‘공공’의 길이 아니라 ‘사유’의 건물로 느꼈다면, 유료화에 대한 반발이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쌈지길의 진정한 가치는 한국적인 건축이 무엇인지, 도심 건축의 공공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국적인 건축을 이야기할 때, 꼭 기와지붕이어야 하고, 가운데 중정이 있는 ㄷ자 평면이어야 한다는 등 형태나 공간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하지만 도시의 기억, 즉 시간성의 맥락에서 한국성은 형태나 공간이 아닌 골목길에 있다. 북촌과 서촌, 홍대 앞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바로 길을 걸으면서 장소의 시간과 우리 자신의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북촌과 서촌뿐 아니라, 정치가와 개발업자들이 슬럼가라고 주장하며 철거를 종용하는 세운상가 주변의 미로 같은 골목길 역시 역사적인 시간과 삶의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는 ‘시간 감동’의 보고다. 재개발을 통해 아파트 단지를 조성할 때도 오래된 골목길을 살릴 수 있다면, 극단적으로 사유화된 공간과 익명의 공공 공간으로 양극화되는 아파트 공간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소중한 골목길을 존중하도록 하는 법적인 장치가 절실하다.
서울의 하늘을 맘껏 품고 나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올라왔던 경사로를 타고 내려갈지, 계단을 타고 내려갈지 잠시 고민하다, 계단을 타기로 했다. 칙칙할 수 있는 천장과 벽에는 밝은 색상의 독특한 작품들이 매달려 있고, 빈 벽에는 사람들의 애정 어린 낙서가 가득했다. 중간 중간 계단참 나무의자에는 사람들이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쌈지길의 계단은 또 다른 수직 골목길이다. 1층으로 내려와 쌈지길 마당에 서니 또 다른 골목길로 이어지는 입구가 네 개 보인다. 각각의 입구는 또 다른 ‘시간의 골목길’로 들어가는 기억의 입구다.
다시 인사동길로 나오니 왠지 휑한 느낌이다. 2011년 ‘차 없는 거리’(오전 10시~오후 10시)를 실시하면서 노점상을 쫓아낸 거리는, 깨끗한 느낌보다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라페스타의 넓은 중앙 가로의 이미지가 교차된다. 2000년 ‘인사동길 역사 탐방로’를 조성하면서, 사람들이 앉을 수 있게 길에 갖다놓은 포천석 돌방석과 돌걸상, 물을 받아 수생식물을 키울 수 있는 물확화분이나 물확걸상은 덩그러니 버려진 돌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인사동의 역사를 담고 있는 옛날 가게와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북인사 마당이 다가오니 길은 더욱 넓어지고, 가로를 따라 지어진 밋밋한 새 건물들은 길을 걷는 사람만큼이나 활기가 없어 보인다. 길을 따라 심은 은행나무들 역시 가로의 풍경을 만들기보다는, 하나하나 화분에 따로 심어진 외로운 느낌이다.
오른쪽에 4층짜리 갤러리 이즈(Gallery IS) 건물이 보인다. 2003년 학고재 화랑으로 오픈했던 곳으로, 제주도 포도호텔과 방주교회로 유명한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룡)의 작품이다. 가벼운 느낌의 반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1층과 작게 수평으로 나눠진 적삼목 마감의 위층 볼륨에서, 인사동과 어울리는 스케일과 물성(物性)을 담아보려는 건축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오랜만에 전통 찻집 귀천을 들러볼까 해서 갤러리 이즈와 미호갤러리 사이 길(인사동 14길)로 들어선다. 문지방 역할을 하는 울퉁불퉁한 ‘골목 지방석’을 넘어서니, 작은 검은색 전돌들이 촘촘하게 깔려 있는 골목길이 펼쳐졌다. 조금씩 색깔이 다른 전돌들은 각각 다른 시간을 담고 있는 듯하고, 한 발 한 발 내려놓을 때마다 수많은 전돌들이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옛날 집장사 한옥이 늘어선 좁은 골목에는 한정식 집과 전통 찻집이 번갈아 있고, 현대적인 모텔 건물과 한옥 여관도 보인다. 동네 사람들의 애정이 느껴지는, 집 앞 화단을 가득 채운 푸른 화초들은 옛 골목길에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귀천이 있는 2층짜리 벽돌집에 도달했지만 골목은 끝나지 않았다. 세월의 무게에 처진 듯한 한옥 처마가 이어진 좁은 골목길 너머로, 붉은 벽돌의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둥근 탑이 보인다. 1930년대에 찍은 빛 바랜 사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든다. 그 느낌에 취해 조금 더 걸어가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바닥을 내려다보니 아스팔트였다. 골목길 앞쪽은 여전히 한옥이 늘어서 있지만, 느낌이 달랐다. 짙은 회색의 아스팔트길에서는 어떤 시간도 느낄 수 없었고, 길 전체를 메운 한 덩어리의 아스팔트 위에서 내 두 발은 그 길의 바닥과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었다. 1930년에 지어진 한옥들조차 짝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골목길을 되돌아 나와 인사동길에 다시 섰다. 이제야 인사동길이 왜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2000년 인사동길 역사 탐방로를 조성하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벽돌의 느낌을 살려 길에 깔아놓은 검은색 전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빈번한 차량 통행으로 인해 보행자용 전돌이 파손되고, 심지어 사람까지 걸려 넘어져 다치는 등 문제가 많아지자, 2009년부터 2010년까지 2년에 걸쳐 35억 원을 들여 회색 마천석으로 바닥재를 교체했다. 1997년 4월부터 주말에만 시행하던 인사동의 ‘차 없는 거리’를 주중까지 확대할 목적으로 2000년에 47억 원을 들여 전돌을 깔아놨지만, 정작 작품 운송을 위해 차량 통행이 필수적인 화랑과 갤러리의 반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닥재가 교체된 바로 다음 해인 2011년 11월부터 ‘차 없는 거리’가 주중에도 확대 시행되었다.
덩치가 큰 마천석이 깔린 길에서는 작은 전돌들과 맺었던 긴밀한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았고, 촘촘하게 박힌 검은색 전돌과 잘 어울렸던 흰색의 포천석 돌방석 · 돌걸상과 물확걸상 · 물확화분은, 미끈한 회색 마천석 바닥재 사이에서는 왠지 어색하고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중앙 찻길과 양옆의 인도를 구분하는 돌덩어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차가 다니지 않는 인사동길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찻길과 인도를 넘나들지만, 애매하게 겉도는 돌방석과 돌걸상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다.
인사동길을 따라 가게 앞에 만들어놓은 텃밭 역시 사라졌다. 임대료가 오르면서 인사동길을 지키고 가꾸던 터줏대감들이 떠나자, 주인의식이 사라진 가로에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버려진 텃밭 역시 마천석이 덮어버렸다. 또한 찻길과 인도 사이에 늘어서, 웨스턴돔의 경우처럼 다중적인 스케일의 가로 풍경을 만들어내던 노점상 역시 ‘차 없는 거리’ 시행으로 쫓겨나자, 인사동길은 스케일감을 상실한 큰길이 되어버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정처 없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가던 길을 되돌아 다시 검은색 전돌이 촘촘히 박힌 쌈지길의 마당에 서보았다. 울퉁불퉁한 검은색 전돌 위를 걸으려니, 온몸의 근육이 나 자신을 느끼게 해주고, 수많은 작은 전돌들은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내 몸 속에 축적되어 있는 다양한 공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자본에 의해 스케일감을 상실한 거리에 휩쓸려 잃어버린 나의 존재감, 나의 시간성을 다시 찾은 느낌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 지나친 다른 입구들이 보인다. 이번에는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고 또 다른 ‘시간의 골목길’을 찾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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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3년 지금까지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우리가 사는 집, 집들이 모인 동네, 나아가 우리의 고향인 도시라는 공간에는 온갖 의미와 작동 원리가 숨어 있다. 사소한 것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편적인 것에서 구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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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인사동 쌈지길 –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조한,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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