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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과 벽수산장

서울 한복판에서 찾은 나만의 소쇄원

소쇄원이 소쇄원일 수 있는 것은 주변의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덕영 가옥의 가치 역시 송석원 바위와 옥류천 사이, 바로 그 장소성에 있다. 남산 한옥마을에 가옥을 옮겨 짓고, 원래의 자리에 재개발을 추진하겠다는 발상은, 소쇄원을 담양 시내로 옮기고, 소쇄원 자리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발상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연구실보다 커피숍이나 공원이 더 좋다. 마치 연구를 강요하는 듯한 이름의 ‘연구실’보다는, 커피와 함께 자유롭게 사람들 사이에 앉아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커피숍이 참 좋다. 특정한 ‘저의’를 가지고 나를 찾아오는 연구실보다는, ‘저의’는커녕,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커피숍이 훨씬 자유롭게 느껴진다. 날씨 좋은 날,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캠퍼스를 방랑한다. 등을 데워줄 따사로운 햇볕과, 피부를 통해 나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줄 살랑거리는 바람이 있는,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새소리처럼 들리는, 그리고 속을 뒤집어놓는 담배 냄새를 피할 수 있는 그런 곳을 찾아 방랑하곤 한다. 세상을 잊고 자연과 하나 되어 나만의 공부를 할 수 있는 그런 곳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나만의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호)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나무로 유명한 담양에 있는 소쇄원은, 소쇄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스승 조광조가 정치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정치의 꿈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별서(別墅)이자 원림(園林)이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은거하여 생활하기 위해 지은 일종의 별장이다.

정원(庭園)이 집 안에 만들어진 인공적인 자연이라면, 원림은 자연 속에 들어가 겸허하게 집과 정자를 배치하는 선비적인 공간이다. 대나무 숲 사이로 걸어 올라가면, 대나무가 만들어내는 바람 소리가 시냇물 소리로 바뀌는 그곳에, 마치 오랫동안 이곳에 있던 돌과 나무처럼 냇가 옆 경사면을 안고 있는 소쇄원을 만나게 된다. 자연을 단지 재료로 삼아 자신만을 돋보이게 하려는 아마추어의 모습이 아니라, 아주 겸손하고 작은 터치로 자연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진정한 거장의 손길이 느껴진다. 한여름에 소쇄원 광풍각에 누워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살랑거리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있으면, 무릉도원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과 오감으로 하나 되는 이런 공간에서 공부를 한다면 예술적인 영감이 끊임없이 샘솟을 것 같다. 그곳에서 공부했을 선비들이 참으로 부러울 따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도 그런 공간이 참 많았다고 한다. 사대부들은 인왕산과 북악산 계곡에 정자나 별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것이 인왕산 기슭에 있는 송석원(松石園)이었다. 인왕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앞에는 시원한 옥류천이 졸졸졸 흐르고, 녹음이 푸르른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던 송석원은 지금의 서촌 옥인동 47번지 일대라고 하는데, 조선 중기부터 시작된 중인 중심의 시문학 활동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중심지였다. ‘위항’은 중인 계층을 뜻하는 말인데, 꼬불꼬불한 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북촌에 사대부가 모여 살았다면, 인왕산 밑 서촌에는 주로 역관과 아전 등 전문직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이런 중인들의 문학 모임을 시사(詩社)라고 하는데, 제일 유명한 시사 중 하나가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였다. 정조 말 중인 천수경(千壽慶)이 인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자신의 호를 따 지은 송석원을 중심으로 시작된 모임이다.

이 모임에서는 1년에 봄과 가을 두 번씩 시경연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수백 명의 시인들이 대회에 참가했는데, 하얀 종이를 펼치고 싸운다는 뜻으로 ‘백전’(白戰)이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사대부들은 이 대회의 심사를 위촉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추사 김정희 역시 크게 감복하여 손수 ‘송석원’(松石園)이라고 글씨를 써주었고, 이를 천수경이 집 뒤 큰 바위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1994년에 출간된 김영상의 『서울 六百年』에 따르면 1950년대까지도 송석원이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큰 바위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지금 그 자리에는 시냇물과 소나무 숲도 없고, 축대 위에는 100년도 더 된 한옥을 비롯하여 오래된 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어느 집 정원에서 송석원 바위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주민들도 있고, 한옥 축대 밑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도 혹시나 송석원 바위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곳에 갈 때마다, 차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기웃거려본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골목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다. 방향감 없이 중력에 몸을 맡기고 터덕터덕 걸어 내려오니, 경사가 완만해지고 길이 차츰 넓어진다. 별다른 소득 없이 골목길을 다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른쪽이 갑자기 열리고 입구에 돌장식이 서 있는 넓은 돌계단이 나타났다. 거대한 느티나무의 그늘을 뚫고 올라가는 계단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다. 스물한 개의 계단을 올라가니, 또 다른 돌장식이 나타나고, 오른쪽 위로 꺾여 열다섯 개의 계단을 올라가니 아주 오래된 한옥의 입구 앞에 서게 되었다.

이 집은 한때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친가로 알려져 있었다. 계단의 크기뿐 아니라 입구의 돌기둥에는 장식이 새겨져 있고, 기둥 위에는 구름 형태의 익공(翼工) 장식이 날개처럼 뻗어 나와 있고, 기둥머리를 묶어주는 창방(昌防)과 위쪽 장여 사이에는 이빨 모양의 작은 소로들이, 다시 장여와 위쪽 도리 사이에는 구름 형태의 운공(雲工) 장식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일반 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의 디테일을 보여준다. 왕족이나 귀족의 집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77년에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순정효황후의 친가’로서 서울시 문화재(민속자료 제18호)로 등록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의 날인을 강요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몰래 보고 있다가, 옥새를 치마에 감추고 도망가다 큰아버지 윤덕영에게 빼앗긴 일화로 유명한 분이다. 친일파였던 아버지 윤택영이나 큰아버지 윤덕영과는 다르게 강직한 분이었던 것 같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한 후에는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 지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 가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낙선재를 지키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이 집은 순정효황후의 친가가 아니라 큰아버지 윤덕영이 소유한 집으로 밝혀졌다. 원래 송석원 터였던 이곳에 윤덕영이 자신과 가족을 위한 초호화 별장 벽수산장과 한옥을 함께 지으면서 송석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육대 명예교수 윤평섭 교수의 논문 「송석원에 대한 연구」(1984)에 첨부된 배치도를 보면, 벽수산장 바로 뒤에 ㅁ자 한옥이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서른여섯 개 계단 위에 있던 한옥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순정효황후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고, 오히려 이곳에 윤덕영의 후처가 살았다는 주장이 있다. 1875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고, 벽수산장과 함께 1910년대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이외에도 이 집이 순정효황후의 친가라기보다 윤덕영의 집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여러 정황상 순정효황후의 친가나 생가가 아닌, ‘옥인동 윤씨 가’ 또는 ‘윤덕영 가’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다. 또 논문에 소개된 배치도 위쪽에는 아흔아홉 칸짜리 한옥이, 아래쪽 시내 건너편에는 2층 양옥이 그려져 있는데, 아흔아홉 칸짜리 한옥에서 윤덕영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쪽 2층 양옥은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현재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 ‘박노수 가옥’으로 등록되어 있다.

1950년대 서울의 풍경을 잘 보여주는 이용민 감독의 영화 〈서울의 휴일〉(1956)에도 벽수산장이 배경으로 나온다. 작은 집들로 빼곡한 서촌 위에 궁궐처럼 서 있는 프랑스 대저택의 모습이다. 벽수산장의 설계도는 원래 프랑스 공사로 있던 민영찬이 파리에서 사온 것인데, 거대한 별장을 지을 능력이 안 되어 그냥 가지고 있던 것을, 1910년 한일병합의 공으로 일본 왕에게 엄청난 은사금을 받은 윤덕영이 땅과 함께 설계도를 매입하여 공사 3년 만인 1917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건평 2,000제곱미터(600여 평)의 엄청난 규모와 호화스러운 장식으로 인해 당시 ‘한양의 아방궁’, ‘조선의 아방궁’이라고 비난을 받았는데, 이러한 여론이 부담스러웠는지 윤덕영은 ‘세계홍만자회 조선본부’(世界紅卍字會 朝鮮本部)라는 간판을 걸고 종교 건물로 위장하려 했다고 한다. 또 비난 여론이 두려워 윤덕영 자신도 벽수산장에서 못 살고 뒤편에 새로 한옥을 지어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옛날 벽수산장에서 바라보던 풍광은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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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벽수산장을 포함한 엄청난 규모의 송석원을 유지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윤덕영이 죽은 후에 벽수산장은 1941년 일본의 미쓰이 재벌(三井財閥)에 넘어갔다. 광복 후에는 잠시 덕수병원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중에는 유엔군 장교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1954년부터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 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가 사용했다. 그러다 1966년 4월 수리 중에 불이 나 벽수산장 2, 3층이 탄 채로 방치되다가, 1973년 6월 도로정비사업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송석원 내 다른 한옥의 운명도 순탄하지 않았다. 윤덕영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흔아홉 칸짜리 한옥은 광복과 전쟁을 겪으면서 버려지고 허물어졌다. 그 자리는 피난민들이 지은 무허가 주택으로 채워졌다. 그나마 계단 위 ‘윤덕영 가’는 전쟁 후 이 집에 무단으로 살고 있던 피난민들에게 불하되면서 다행히 허물어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서촌 주택가 곳곳에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당시 송석원과 벽수산장의 엄청난 위세를 보여주던 정문의 거대한 돌기둥들은, 근생 주차장 입구에 홀로 서 있는가 하면, 어떤 돌기둥은 아스팔트 도로에 박혀 있고, 심지어 어떤 돌기둥은 부조처럼 어느 집 벽체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화재 후 버려진 벽수산장의 석재들을 인근 집에서 가져다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버려진 돌기둥 주변의 주택가를 잘 살펴보면, ‘윤덕영의 송석원’ 흔적을 더 찾아볼 수 있다. 새로 지은 빌라 건물 뒤에는 당시 정문 관리인의 집으로 추정되는 아주 오래된 벽돌 구조물들이 남아 있고, 어떤 주택은 아예 오래된 돌기단과 벽돌 벽을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잘 살펴보면, 오래된 벽돌 아치의 일부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윤덕영 가 뒤쪽으로 올라가면, 골목골목 작은 집들이 아주 오래된 화강암 장대석 기단 위에 서 있는가 하면, 허름한 어느 집 입구 계단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진 소맷돌 장식이 옆에 붙어 있는데, 윤덕영이 살던 아흔아홉 칸짜리 한옥의 유구다. 이렇게 송석원의 흔적을 찾고 있으면 내가 마치 고고학자라도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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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서촌 주택가 곳곳에 송석원과 벽수산장의 ‘보물’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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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윤덕영 가에는 모두 일곱 가구가 살고 있다. 집 안팎 훼손이 심하고 비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 전체에 천막을 씌워놓았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지저분한 살림살이 사이사이를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허름한 판잣집으로 오해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 서울시 문화재쯤 되면 보수를 해주거나 최소한 유지할 수 있게 지원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1997년에 문화재 등록이 해제되었다. 애초에 서울시는 윤덕영 가를 남산 한옥마을로 옮기려 했으나, 붕괴 위험에 대한 민원이 들어올 만큼 심하게 훼손된 상태라 불가능했다고 한다. 지금 남산 한옥마을에 있는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는 옥인동에 있는 집을 본떠 만든 건물로 진품이 아니다. 심지어 옥인동 집이 윤덕영 가로 밝혀졌으니, 남산 한옥마을의 집은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도 아닌 것이다.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고 얼마 안 지난 2001년, 송석원이 있던 곳은 옥인 제1구역 주택재개발 지역으로 예정되었다. 30년 넘게 자연경관 지구로 묶여 있던 것도 2종 일반주거 지역으로 변경되었다. 100년 넘게 버텨온 윤덕영 가 역시 벽수산장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사실 서촌이 지금까지 옛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인근까지 들어온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문이다. 사건 이후 보안을 이유로 인왕산과 북악산 입산이 금지되었고, 서촌 일대 건물의 신축뿐 아니라 증개축까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통제 덕분에 서촌은 개발의 광풍을 피해갈 수 있었고,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오랜 도시 구조를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민정부 들어 도시개발 관련 규제가 완화되면서, 한옥이 있던 자리는 하나둘씩 다세대나 빌라가 대신하게 되고, 그동안 억눌렸던 욕구가 여기저기서 폭발하면서 옥인동뿐 아니라 인근 누상동, 체부동, 필운동, 누하동까지 주택재개발 예정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다행히 서촌 주민 모두가 개발에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서촌 주민이자 건축가인 김원은 무책임한 아파트 개발이 서촌의 아름다운 풍광을 파괴하는 것을 우려하여, 재개발 계획에 발벗고 나서게 되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고층 아파트가 아니라 5층 이하의 친환경 타운하우스형 아파트를 제안했다. 특히 윤덕영 가와 위쪽에 남아 있는 한옥 군락을 피해 아파트를 배치했다. 개발과 보존의 경계에서 상생의 해법을 찾으려는 건축가 김원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07년 옥인 제1구역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이 지정되고 이듬해 조합이 설립되면서, 갑자기 설계자가 건축가 김원이 아닌 다른 회사로 변경되었다. 공개 입찰에 의해 적법하게 선정되었다고 하지만 정황상 더 수익성이 좋은 계획을 원했던 조합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회사로 바뀐 후 조감도를 보면 윤덕영 가와 한옥 군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한 것은 서울시가 서촌 지역의 한옥을 보존하고 역사 문화 마을을 조성하기 위해 공고한 2008년 11월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 계획 수립 용역에서 옥인 제1구역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이 쏙 빠진 것이다. 2009년 11월에는 사업 시행 인가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또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2011년 11월 2일 서울시는 옥인동 재개발사업을 관리처분 단계에서 보류하면서, 윤덕영 가와 일대 한옥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재개발을 추진하라고 권고했다.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뉴타운과 재개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송석원 일대의 보존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던 서촌 주민과 많은 전문가들의 노력 덕분이다. 당연히 조합 측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조합 측은 벌써 주민의 30퍼센트 정도가 이주해서 많은 집들이 버려져 있고, 가스와 수도가 끊어져서 텐트 생활을 하는 세대가 많은 상황에서 재개발사업을 보류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전임 시장이 구역 내 한옥을 외부로 이전하기로 약속했다며, 시장이 바뀌었다고 전임 시장과 합의된 내용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담양 소쇄원의 가치는 단지 건축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소쇄원이 소쇄원일 수 있는 것은 주변의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소쇄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그 장소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윤덕영 가의 가치 역시 송석원 바위와 옥류천 사이, 바로 그 장소성에 있다. 남산 한옥마을에 짝퉁 가옥을 만들어놓고 문화재 등록을 해제하여 재개발을 추진하겠다는 발상은, 소쇄원을 담양 시내로 옮기고, 소쇄원 자리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발상과 무엇이 다를까.

이렇듯 사연 많은 윤덕영 가를 둘러보고 피곤한 다리를 잠시 쉬기 위해 계단에 앉는다. 느티나무 그늘이 나를 시원하게 감싸 안는다. 사진기에 찍힌 골목길과 한옥 사진들을 훑어보고 있으니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의 시간의 향기가 물씬 나는 것 같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바람에 물결치는 느티나무 가지 소리는 물소리로 들리고, 이끼를 머금은 오래된 돌계단에서 풍기는 습한 풀 냄새가 나를 편안하게 한다. 갑자기 내가 왜 이곳에서 디지털 사진이나 보고 있는지 의아해졌다.

가지고 있던 책을 꺼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앙리 르페브르(Henri Lefèbvre, 1901~1991)가 쓴 『리듬 분석』의 영문본(Rhythmanalysis : Space, Time and Everyday life, 2004)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도시 공간을 분석한 『공간의 생산』(La Production de L’espace, 1974)으로 유명한 르페브르는, 『리듬 분석』에서는 도시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리듬을 통해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윤덕영 가 계단에 앉아 있는 나는 지금 어떤 리듬을 느끼고 있을까. 잠시 눈을 감으니 귀로, 코로, 그리고 피부로 이곳에 내재한 다양한 시간의 리듬이 느껴졌다. 나만의 소쇄원을 찾은 것이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찾은 나만의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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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 집필자 소개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3년 지금까지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 저자조한 | cp명돌베개 도서 소개

우리가 사는 집, 집들이 모인 동네, 나아가 우리의 고향인 도시라는 공간에는 온갖 의미와 작동 원리가 숨어 있다. 사소한 것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편적인 것에서 구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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