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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피렌체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출생 | 14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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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10년 |
본명 |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andro di Mariano Filipepi) |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코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면,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았던 예술가는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andro di Mariano Filipepi)였다. 우리는 그를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4~1510)라는 이름으로 줄여서 기억한다. 염색공이었던 마라아노 필리페피(Mariano Filipepi)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 그의 출신 배경과 성장 과정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1470년대부터 화가로 활동했고, 마사초의 제자였던 프라 필리포 리피의 화실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전부다.
보티첼리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오니산티 성당을 위해 그린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이 작품은 기를란다요가 같은 성당을 위해 그린 〈성 제롬〉과 짝을 이루는 그림이다. 오니산티 성당은 기를란다요와 보티첼리 두 사람에게 초대교회의 중요한 두 신학자의 그림을 그리도록 경쟁시켰다. 보티첼리가 그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를란다요가 그린 〈성 제롬〉보다 좀 더 영적인 세계에 몰입해 있는 느낌이다. 원래 이 두 작품은 수도승들의 성가대실에 함께 전시되어 있으나 지금은 따로 독립해서 전시되어 있다. 보티첼리는 죽어서 자신에게 첫 명성을 안겨준 오니산티 성당에 묻혔다.
오니산티 성당에서 거둔 성공 이래 보티첼리는 메디치 가문에 발탁되었다.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팔라스와 켄타우로스〉는 로렌초를 위해 초기에 그린 작품이다. 식스투스 4세와 나폴리의 페란테 국왕 연합군이 피렌체를 침공했을 때, 용기와 지혜로 적을 물리쳤던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를 찬양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비교적 초기 작품에 속하는 〈동방박사의 경배〉는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들을 《성경》의 ‘동방박사’로 등장시키면서 노골적으로 후원자 가문을 찬양하고 있다. 작품의 중앙 상단에서 아기 예수께 예물을 바치는 인물은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다. 바사리는 〈동방박사의 경배〉에 그려진 코시모의 초상이 가장 실제 모습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작품은 원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안에 있는 라마(혹은 리미) 채플의 중앙 제단화로 그려졌지만 지금은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치가의 음모 이후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화해를 상징하고자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화를 제작할 때 보티첼리도 함께 로마에서 작업을 했다. 보티첼리는 시스티나 예배당 벽면에 〈유혹받는 그리스도〉, 〈이집트인을 죽이는 모세〉, 〈이드로의 딸로부터 물을 얻어 마시는 모세〉를 그렸다. 보티첼리의 작품에 감탄한 교황이 거액의 작품 대금을 하사했지만 로마에서 흥청망청 써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피렌체로 다시 돌아온 보티첼리는 메디치 가문을 위해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과 같은 대형 걸작을 완성한다. 이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많은 학자의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메디치 가문을 중심으로 퍼져가던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사상의 반영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메디치 가문의 소장 작품 수장고에서 출발했던 우피치 미술관을 대표하는 예술가가 바로 보티첼리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던 보티첼리는 작품 생활 전반기에는 대부분 메디치 가문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이 우피치 미술관의 첫 번째 진열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피치 미술관 2층으로 들어서면 치마부에와 조토의 르네상스 초기 그림 이후에 바로 보티첼리의 전시관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전시실에 역시 보티첼리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메디치 메달을 들고 있는 청년〉 등을 함께 전시하여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했던 보티첼리를 기념하고 있다.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더 이상 세속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화형식 이후에도 보티첼리는 계속해서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바사리의 정보는 왜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탄생〉은 1500년에 제작되었는데, 보티첼리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신념을 가진 것으로 작품 상단에 기록되어 있다.
최근 보티첼리가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베를린의 구거장 미술관(Gemäldergalerie)과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던 보티첼리의 드로잉들이 재평가되면서 장기 전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보티첼리는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여러 장면을 드로잉 작품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보티첼리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첼리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며 지칠 줄 모르는 탐구 정신을 가졌다고 한다. 피렌체의 인문학자들을 능가하는 학문적 소양을 가졌고, 단테의 《신곡》을 직접 해석한 책을 집필할 정도였다. 그의 대표작인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이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이 지배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티첼리는 미켈란젤로와 함께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다시 작품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전성기 르네상스의 첫 인물로 기억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보티첼리는 종교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그림 그리는 것을 중단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의 생애 후반이 매우 종교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듣고 재산을 모두 성당과 수도원에 기부하고 궁핍한 생활을 자처한다. 보티첼리의 예술성을 높이 칭송하던 로렌초가 생활비를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길거리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바사리는 기록한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때 단테는 《신곡》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기독교의 신앙을 결합시켰다.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면서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가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해석한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피렌체 인문주의 운동은 기독교 신앙의 초월성을 강조함으로써 르네상스 미학의 완결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그 마지막 르네상스의 길에 보티첼리가 있다. 1510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면서 보티첼리의 작품을 굽어보고 있을 동안, 보티첼리의 시신은 아르노 강가의 오니산티 성당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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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Vasari, The Lives of the Artists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p. 224, 227, 228.
글
출처
피렌체를 알면 인문학이 보인다! 단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메디치, 조토, 카라바조 등의 피렌체 천재들이 이뤄낸 르네상스 시대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창조 에너지의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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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산드로 보티첼리 –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김상근,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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