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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큰 도리란 곧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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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72년
사망 1528년
국적 중국

명나라 때의 사대부 사상가이자 교육가. 명필가 왕희지의 후예로 육상산의 학설을 발전시켜 이정 형제와 주자 계통의 성리학인 정주학(程朱學)에 대항했다. 육상산의 사상인 심학으로써 나라를 구하려 했고, 그를 맹자 이후 첫째가는 사람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조산아로 태어나 허약했던 까닭에 양생법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주자학에 심취했으나 신선술 공부를 하기도 했다. 훗날 주자의 이론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스스로 이론을 세워나갔으며, 양명학의 기초를 세웠다. 《전습록》은 왕양명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삶에 대한 어록과 편지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왕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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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산의 심학을 계승하다

육상산이 세상을 떠난 지 300여 년 만에 한 철인이 나타나 그와 마음을 같이하여 세상에 널리 펼쳤으니, 이 사람이 바로 왕양명이다. 왕양명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육상산에 대해 "상산의 학문은 간략하고 평이하며 거추장스럽지 않으니, 맹자 이후에 첫째가는 사람일세"라고 말했다. 그리고 격렬한 어조로 "나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의 책망을 무릅쓰고서라도 상산을 위해 한마디 하고자 하며, 또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누명을 쓴다고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네"라고 했다.

왕양명은 '송나라가 멸망의 지경에 이르게 된 까닭은 학술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학문에 대한 바른 길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선비들의 기풍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리게 됨으로써 나라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육상산이 주창한 심학각주1) 의 깃발을 계승하고 도로써 나라의 몰락을 구하려 했다.

왕양명의 이름은 수인(守仁)인데, 스스로 양명자(陽明子)라 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양명 선생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는 명나라 헌종 때에 저장성 위야오의 서운루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이 운(雲)이었으나 5세가 되도록 말을 하지 못하자 할아버지가 수인(守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왕양명은 명필 왕희지각주2) 의 후예였으며, 아버지 화(華)는 진사 시험에 장원급제하여 난징 이부상서를 지내기도 했다.

부엉이는 죽은 어머니의 혼

왕양명은 팔삭둥이로 태어난 탓에 몸이 약해 이미 청년기에 폐병에 걸려 피를 토하기도 했다. 10세 무렵 어머니가 죽고 새어머니가 들어왔는데, 그녀는 그를 매우 차갑게 대했다. 그가 하루는 부엉이 한 마리를 사서 계모 방에 집어넣었다. 깜짝 놀란 계모 앞에 이미 왕양명과 입을 맞춘 점쟁이 노파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그 부엉이는 죽은 양명 어미의 혼이오. 당신이 양명을 너무 괴롭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오. 그러니 또 그를 괴롭히면 당신이 죽고 말 것이오."

점쟁이가 돌아간 후로 계모는 그를 따뜻이 대했다고 한다. 왕양명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상이 범상치 않아 11세 때는 큰 잔치 자리에서도 시를 읊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큰 뜻에 걸맞은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 무능하고 부패한 선비들은 오히려 그의 의혹을 가중시키기만 했다. 한번은 그가 참다못해 서당 선생에게 이렇게 물었다.

"천하에서 제일가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에 선생은 참으로 엉뚱한 대답을 했다.

"책을 읽으면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지."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왕양명은 애써 좋게만 해석하려고 했다.

'아마 단순히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뜻은 아닐 거야. 독서를 열심히 하여 성인이 되라는 뜻이겠지.'

첫날밤을 독수공방한 신부

왕양명의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17세 되던 해 7월, 결혼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그는 혼자서 집 근처의 철주궁(일종의 도교 사원) 안으로 들어가다가 도사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그는 그 도사에게 물어보았다.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사는 방법, 즉 양생이 무엇입니까?"

그러고는 조용히 앉아서 그것을 배우느라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잊었다. 화려한 신방에서 아름다운 신부와 함께 달콤한 첫날밤을 보내야 할 신랑이 생면부지의 도사와 밤을 지새운 것이다. 어쨌거나 이날 밤의 인연으로 왕양명은 도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먼저 그는 주자의 학설을 연마한 다음, 격물각주3) 공부에 큰 흥미를 느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뜰 앞의 대나무를 마주하고 격물을 시작했다. 둘은 하루 종일 대나무를 대면하고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친구는 3일 만에 병이 나 누웠고, 왕양명 자신은 7일 만에 눕고 말았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대나무는 역시 대나무였고, 그는 그였다. 이에 왕양명은 "성현은 따로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학문을 버리고 입산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그가 입산하려고 한 데에는 다른 배경도 있다고 전한다. 즉, 왕양명은 20세에 제1차 과거시험 향시에 합격하고, 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4년 후에 응시하나 또 낙방했다. 자신의 재주만을 믿고 남을 가볍게 여긴 결과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폐병에 걸리자 산속에 들어가 양생법을 공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용천사에서 시 모임을 조직하고, 매일 시 읊는 데 도취했다. 2년째 되던 해에 서울로 돌아온 그는 나라의 변두리 지역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고 무술을 연마하는 한편, 병법에 관한 책을 두루 읽었다. 무인으로 크게 성공해볼까도 생각했던 왕양명은 결국 이 방면에서도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자 그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학문이나 문학에 대한 공부가 그의 웅지(雄志, 커다란 뜻)를 채워주지 못했고, 무예에서도 특출한 소질을 발휘하지 못하자,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임금에게 올린 주자의 글을 보게 되었다.

"독서의 근본은 거경각주4) 으로 뜻을 잘 보존하는 것이고, 독서의 방법은 순서에 따라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왕양명은 과거에 자신의 뜻이 너무 높고 먼 데에만 있어서 실제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는 방황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독서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28세 되던 해에는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몇 해 동안 왕양명은 정치에 대단한 열정을 쏟았는데, 임금에게 수천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폐단에 대한 시급한 조처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열렬한 충정이 효종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망한 나머지 점점 낙심해갔다.

그가 35세 되던 해였다. 명나라 제10대 황제 무종이 즉위하자 환관 유근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신하들이 임금에게 옳은 말을 하기만 하면 잡아다가 감옥에 넣었다. 왕양명은 충신들을 풀어주도록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유근은 도리어 그를 무고하게 끌어다가 곤장 40대를 때려 기절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근은 왕양명을 용장 지방의 역승[驛丞, 각 지방의 역(驛)에 있는 말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보는 외직] 자리로 내쫓아버렸다.

왕양명이 용장으로 길을 떠나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미행했다. 그는 화를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저장성 항에 이르러 투신자살을 가장하려고 강가에 옷을 벗어놓았다. 또 글까지 써두고 몰래 상선에 붙어서 그곳을 피했다.

그는 푸젠성에 도달하여 산중을 방황하다가 어떤 절을 찾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과거에 만나서 양생법을 배운 적이 있는 철주궁 도사가 그곳에 있었다. 깜짝 놀란 왕양명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몰래 숨어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도사는 "만일 그대가 몸을 감추어버리면 유근이 그대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문초할 것이 아닌가?"했다. 왕양명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부임지 용장으로 떠났다.

마음이 밝으니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용장은 구이저우성(중국의 서남부에 있는 평균 해발 1,000미터 정도의 고원지대)의 서북쪽에 있었는데, 첩첩이 쌓인 산과 우거진 산림으로 뒤덮인 곳이다. 독충이 우글거리고 질병이 퍼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랑캐들이 모여 사는 지방으로 말조차 통하지 않았다. 이런 곳으로 내몰리자 왕양명은 한순간에 자신의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그가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말없이 푸르른 하늘뿐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험악한 환경은 도리어 그를 깊은 사색으로 이끌었다. 왕양명은 숲속에 초막을 짓고 살다가 다시 암굴(바위굴)로 들어가 살았다. 그곳 야만족들은 한인(漢人)이 오면 여러 가지 꾀를 내어 죽이려 들었으나, 왕양명의 성실하고 인자한 성품에 감동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 왕양명은 원주민들을 다스리는 한편, 돌관을 만들어 그 위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리를 깨우치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깊은 밤, 그는 홀연히 격물치지(사물의 이치를 구명하여 자기의 지식을 확고하게 하는 일)의 도리를 깨닫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마치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일러주는 것 같았다. 어찌나 기뻤던지 소리치고 날뛰자 옆에서 자던 사람들까지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들은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왕양명이 대답하기를 "내가 이전에는 격물의 도리를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야 깨달았소"라고 했다.

이 순간의 깨달음을 기초로 하여 그의 모든 철학 체계가 확립되었다. 지난날 고민하며 가슴에 품어두었던 모순과 고통이 마치 얼음이 녹듯이 한꺼번에 녹아 달콤한 옛 추억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큰소리로 노래 불렀다.

"큰 도리란 곧 사람의 마음으로서, 이는 만고에 변한 적이 없다네. 금단각주5) 은 결코 밖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네. 내 잘못이어라! 삼십 년의 헛된 세월이여, 오늘에야 내가 비로소 후회하도다!"

용장 지방으로 쫓겨난 지 3년 만에 왕양명은 장시성 노릉의 지현[知縣, 현(縣)의 으뜸 벼슬]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환관 유근이 죽자 형부주사의 벼슬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정무를 보면서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장과 무예에 두루 능하던 그는 마침내 대군을 통솔하는 순무[반란이나 전시(戰時) 때에 군대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가 되었다. 소년 시절에 가졌던 호걸의 꿈이 이제야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10여 년 동안 왕양명은 적지 않게 큰 공을 세웠는데, 먼저 변두리 국경 지방에서 수십 년 동안 활개치던 도적 떼들을 말끔히 토벌했다. 그 이듬해에는 번개 같은 솜씨로 신호(宸濠)의 반란을 평정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출했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하는 사람이 왕에게 왕양명을 무고했다.

"왕양명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한번 시험 삼아 불러보십시오. 절대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정말로 왕양명을 불러보았다. 왕양명은 왕명을 받은 즉시 입궐을 서둘렀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다. 결국 왕양명은 구화산으로 들어가 암자에 숨었다. 얼마 뒤 무종각주6) 이 사람을 보내어 전후 사정을 알아본 다음, 그의 무고함을 알았다.

명세종이 즉위하여 왕양명의 공로를 알고 조정에 들어오게 하려 했으나 대신 양정화 등이 모함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얼마 후 왕양명은 신건백(新建白)에 봉해지고 세록(오늘날의 연봉) 1,000석을 세습하게 되었으나, 역시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 때문에 지급받지 못했다.

왕양명의 나이 56세 때 광시성의 전주에서 야만족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곳 총독이 이를 막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왕양명을 총독에 임명하여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 무렵 그는 폐병에 이질까지 겹쳐 간곡히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광시성으로 향했다. 왕양명이 그곳에 당도하자 반란군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란이 그곳 관리들의 악정(惡政) 탓임을 알게 된 왕양명은 태장각주7) 100대씩으로 다스려 그 죄를 면해주었다. 또한 그는 학교를 세워 교육과 교화에도 힘썼다.

그런데 날씨가 좋지 않은 데다 과로까지 겹쳐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도적 떼를 몇 번이나 토벌하고 난을 평정하는 동안 왕양명의 기력은 모두 소모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날 때부터 선병질각주8) 인 데다 더욱이 학문과 사색을 좋아했기 때문에 신체가 더욱 허약해져 결국 몸에서 피를 토하는 각혈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 제자가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무슨 유언이라도 남길 말씀이 없으십니까?"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 마음이 밝으니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철학 속으로

일찍이 육상산은 '하늘, 인간, 사물의 이치 모두가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마음이 유일한 실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육상산과 그의 제자들이 형성한 학파를 우리는 남송유학 또는 심학이라 부른다.

왕양명은 육상산의 심학을 바탕으로 하여 치양지설(致良知設)을 주장했다. 여기에서 양지(良知)란 사람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올바른 마음의 작용과 타고난 지혜를 말하는데, 양명학에서는 '마음의 본체'를 일컫는다. 이전의 정주학 또는 주자학의 주요 내용이었던 성즉리(性卽理)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모순을 극복하고 전통적 유교 도덕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도가의 철학자들은 '도(道)'로 세계를 설명하고, 또한 그것으로 우주의 통일성을 설명한다. 정주학자들은 '이(理)'를 우주적 통일성의 실체로 삼는다. 이와는 달리 육상산이나 왕양명 같은 심학 학자들은 '마음(心)'으로 우주를 설명하려 든다. 특히 왕양명은 밖에 있는 사물을 자신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여 그것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주관적 관념으로 객관적 세계를 구성함으로써 천지 만물, 삼라만상이 사람의 주관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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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집필자 소개

전남 영광 출생. 전남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북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내에서 윤리교육과 학과장, 학생생활연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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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 저자강성률 | cp명평단문화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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