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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의 프랑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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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48년의 2월혁명 후 과학이 사회적·지적 생활을 지배하자 문학에서도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의 시대이다.

당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1830~42)가 낳은 실증주의는 거의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에른스트 르낭(1823~92)은 종교 연구에도 실증주의적 방법을 적용했고, 이폴리트 (1828~93)은 실증주의적 분석을 계속하여 생물학적 결정론을 주장했는데, 에밀 졸라(1840~1902)의 자연주의 문학이론에 미친 텐의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시에서의 새로운 방향

이 시기의 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830년대말까지 낭만주의 시는 개인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과 동의어가 되었는데, 애초에 화가로서 낭만주의의 열렬한 투사였던 테오필 고티에(1811~72)가 그러한 낭만주의에 등을 돌렸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대상을 정확히 재현함으로써 '예술의 치환'을 행했다. 즉 그림이 주는 정확한 감각을 언어에 의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술의 본질을 형식 속에 있게 하고 일체의 도덕도 사상도 배제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는데, 그의 걸작 〈에나멜과 카메오 Émaux et camées〉(1852)가 그것을 예증하고 있다.

그리하여 프랑스 문학은 고티에를 축으로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방향을 돌리게 된 셈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대표자는 고답파(高踏派)의 거두 샤를 르콩트 드 릴(1818~94)이었다. 그의 작품 〈고대 시집 Poèmes antiques〉(1852)·〈야만 시집 Poémes barbares〉(1862) 등에서 그 시형은 완벽하고 조형적(造形的)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

1866년에 〈현대 고답 시집〉 제1권이 간행되었는데, 고티에, 르콩트 드 릴, 보들레르, 테오도르 드 방빌(1823~91), 쉴리 프리돔(1839~1908), 조제 마리아 드 에레디아(1842~1906), 프랑수아 코페(1842~1908) 등이 기고했다. '예술에 새로운 전율을 가져다준' 샤를 보들레르(1821~67)는 자기 생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담았다.

그의 시는 많은 낭만주의적 요소와 고답파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 강력한 암시력에 의해 상징주의를 예고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은 보통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의 시대로 규정되지만, 〈징벌 시집 Les Châiments〉(1853)·〈정관 시집 Les Contemplations〉(1856)·〈여러 세기의 전설 La Légende des siècles〉(1859, 1877, 1883) 등 위고의 거의 모든 주요 시작품들은 1851년 12월 쿠데타 후 그가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된 국외의 망명지에서 발표되었다.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1862)이 발표된 것도 이무렵이었는데, 시인·사상가로서 위고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1편의 방대한 산문 서사시이다.

사실주의 소설

사실주의, 즉 레알리슴이란 말은 본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1819~77)의 화풍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그것이 문학에 적용된 것이다.

사실주의 이론은 샹플뢰리(1821~89)에 의해 형성되었지만, 그 이론은 아주 다양하며, 흔히 자연주의란 말과도 동의어로 쓰인다. 그리하여 플로베르, 보들레르, 소(小)알렉상드르 뒤마, 알퐁스 도데, 모파상, 공쿠르 형제, 에밀 졸라 등은 모두 사실주의 작가이자 자연주의 작가이다. 샹플뢰리와 에드몽 뒤랑티(월간지 〈Réalisme〉[1856]의 창간자의 한 사람)와는 달리 에드몽 드 공쿠르(1822~96)와 쥘 드 공쿠르(1830~70) 형제는 지나치게 꾸민 세련된 인상주의적 문체로, 어떤 환경이나 병리상태를 상세히 기록한 것을 소재로 소설을 꾸몄는데, 〈르네 모프랭 Renée Mauprin〉(1864)·〈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1865)가 그것이다.

사실주의의 거장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80)에 있어 예술은 과학적 인식의 모든 성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예술은 예술가의 감정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야 하며, 따라서 예술은 몰개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플로베르의 성격은 복잡하여, 취미와 인간 형성 면에서는 낭만주의자이고 이성적인 면에서는 고전주의자이다.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그가 다룬 주제는 진부한 일상생활을 그린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1857)·〈감정 교육 L'Éducation sentimentale〉(1870)에서 각각 낭만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살랑보 Salammbô〉(1863)·〈성 앙투안의 유혹 La Tentation de Saint-Antoine〉(1874)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 연극

1843년 위고의 운문극 〈레 뷔르그라브 Les Burgraves〉의 실패가 낭만주의에 종지부를 찍은 뒤 무대를 차지한 것은 소알렉상드르 뒤마(1824~95)와 에밀 오지에(1820~89)의 희극이었다.

그들의 희극은 항상 당대의 풍속을 정확히 묘사하면서 도덕적인 주장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사실적(寫實的)이면서도 감동적이다. 뒤마는 매춘부를 등장시킨 〈춘희 La Dame aux camélias〉(1852)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오지에의 대표작은 매춘부의 명예회복에 반대하는 〈올랭프의 결혼 Le Mariage d'Olympe〉(1855), 신문과 금융계의 부패를 고발한 〈파렴치한들 Les Effrontés〉(1861) 등이다. 이 시대에는 소극도 유행했는데, 외젠 라비슈(1815~88)의 〈이탈리아 밀짚모자 Le Chapeau de paille d'Italie〉(1851)·〈페리숑 씨의 여행 Le Voyage de M. Perrichon〉(1860) 등이 유명하다.

자연주의

1880년에 단편집 〈메당의 저녁 Les Soirées de Médan〉(1권)이 간행되었다.

이는 자연주의(naturalisme)의 탄생을 알리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에밀 졸라(1840~1902), 위스망스(1848~1907), 앙리 세아르 등이 기고했는데, 모파상의 〈비곗덩어리 Boule de Suif〉도 실려 있었다. 이 유파의 중심인물인 졸라는 그의 논문 〈실험 소설 Le Roman expérimental〉(1880)에서 자연주의 이론을 전개했는데, 실증주의자 이폴리트 텐과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1813~78)의 영향을 받은 그는 소설가와 실험 과학자의 방법이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에 대한 육체의 영향, 운명에 미치는 유전과 환경의 결정론적 영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20권의 소설로 구성된 연작 〈루공 마카르 총서:제2제정 시대 어느 집안의 자연적·사회적 역사 Rougon-Macquart, Histoire naturelle et sociale d'une famille sous le second Empire〉를 썼다. 졸라의 대표작은 〈목로주점 L'Assommoir〉(1877)·〈나나 Nana〉(1880)·〈제르미날 Germinal〉(1885) 등이다. 기 드 모파상(1850~93)이 이름을 떨친 것은 단편 작가로서였지만, 300편의 단편 외에 6편의 장편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여자의 일생 Une Vie〉(1883)은 매우 널리 읽혀지고 있다.

알퐁스 도데(1840~97)는 자연주의 작가로서는 특이하게 객관적이면서도 전혀 몰개성적이 아닌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는데, 시정이 넘쳐 흐르는 〈방앗간 소식 Lettres de mon Moulin〉(1869) 이외에 〈자크 Jack〉(1876)·〈사포 Sapho〉(1884) 등 수많은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상징주의

1880년 이후 자연주의는 쇠퇴하고 상징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상징주의는 고답파 시의 딱딱하고 싸늘한 형식과 자연주의 산문의 사진적 수법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러나 상징주의 운동은 주로 시의 혁신운동이었는데, 이 시의 혁신은 3명의 선구자, 베를렌·랭보·말라르메에 의해 준비되었다.

베를렌(1844~96)은 처음에 고답파였으나 랭보의 영향으로 이 유파의 규율에서 해방되었다. 그리하여 〈말없는 연가(戀歌) Romances sans paroles〉(1874)·〈지혜 Sagesse〉(1888)에서는 독창성을 발휘해 자기 감수성의 가장 순간적인 상태를 음악적인 말로 표현했다.

아르튀르 랭보(1854~96)는 외관의 뒤에서, 보들레르에 의해 드러내어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인 '만물조응'(萬物照應)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시를 마술 수단처럼 사용하면서 초현실주의를 예고했다. 그는 50여 편의 운문시와 두 산문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1873)·〈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1886)을 남겼다. 스테판 말라르메(1842~99)는 언어의 연금술사로서, 말을 오로지 음악적·암시적 가치에 따라 결합함으로써 사물의 이상적인 관념을 암시할 것을 가르쳤는데, 그의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1876)는 유명하다.

이 선구자들과 이른바 상징주의자들과의 사이에 데카당파(Décadents)가 끼는데, 이들은 자유시를 보급시켰다. 그 대표적 인물은 쥘 라포르그(1860~87)이며, 그는 시집 〈애가 Complaintes〉(1885)를 남겼다.

1886년에 상징주의를 제창한 것은 장 모레아스(1856~1910)였다.

그는 〈피가로〉지에 발표한 상징주의 선언문 속에서, 말라르메의 이론에 따라, "자연 풍경, 인간행위 등, 모든 구체적인 현상들은…… 원초적인 관념과의 그들의 신비로운 유사관계를 나타내도록 운명지어진, 지각할 수 있는 단순한 외관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891년 이미 상징주의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작시법으로 돌아갔다. 상징주의 최대의 시인은 모레아스, 앙리 드 레니에(1864~1936), 에밀 베라랭(1855~1916) 등이다.

상징주의의 격동기는 짧았다(1886~98). 그러나 그 영향은 오래 계속되었으며, 그후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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