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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롱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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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프랑스 역사상 루이 14세의 미성년 시절에 발생했던 일련의 내란(1648~53).

프롱드의 난(프롱드란 말은 당시 파리의 어린이들이 관헌에 반항하여 돌을 던지는 놀이에서 사용한 '투석기'에서 유래)은 점증하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난이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국왕 루이 14세의 절대주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프롱드의 난은 1624~42년 루이 13세의 총리를 지낸 리슐리외 추기경이 귀족의 영향력과 파를망이라 불리던 고등법원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한데 대한 저항이었다.

이같은 특권 귀족층의 반왕정 운동을 루이 14세의 모후였던 오스트리아의 과 그녀가 임명한 이탈리아 출신 총리 마자랭 추기경의 '외국인' 섭정 통치가 시작된 1643년 이후 강력해졌다.

1648년 봄 파리 파를망이 정부의 재정안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프롱드 난의 첫 국면이 시작되었다(파를망의 프롱드 난). 파를망은 국왕의 칙령을 심의·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확고히 함으로써 왕권을 법적으로 제한하려 했다.

6월 30일부터 7월 12일까지 열린 파를망 회의는 앵탕당(지방에 파견되는 중앙행정관) 제도의 폐지, 세금 인하, 모든 신설세에 대한 파를망의 승인, 자의적 구속 금지 등을 포함한 27개항의 개혁안을 부분 승인했다. 그러나 승전보가 전해지자 8월 26일 안과 마자랭 추기경은 2명의 강경파 파를망 재판관을 구속했다. 이에 파리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며 구속된 재판관들은 2일 만에 풀려났다. 이러한 갈등은 1694년 1월 내전으로 발전했다.

정부는 파리를 봉쇄했으나 파리의 지도자층과 일부 고위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파를망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지방의 소요와 계속되는 외국과의 전쟁으로 정부는 '류얼 평화협정'(1649. 4. 1 비준)을 체결, 반란군에 대한 사면을 약속하고 파를망의 특권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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