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627. 5. 29, 프랑스 파리 |
---|---|
사망 | 1693. 4. 5,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귀족.
별칭은 La Grande Mademoiselle.
프롱드의 난과 루이 14세가 미성년인 동안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루이 14세의 삼촌인 가스통 드 프랑스 오를레앙 공작이 '므시외'란 칭호로 불렸기 때문에 그녀는 '마드무아젤'로 알려졌다.
어머니인 마리 드 부르봉 몽팡시에로부터 몽팡시에·외·동브 지역을 포함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늘씬하고 귀족적인 품위를 지닌 그녀는 명예와 지위를 높일 수 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결혼을 꿈꾸었지만, 프랑스 정부는 장차 루이 14세가 될 황태자와의 결혼도 약속하지 않았고(1638),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결혼(1647)할 시기에 맞춰 합스부르크 왕가와 미리 평화협상을 맺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추기경이자 정치가였던 쥘 마자랭이 처음 망명하고 있던 1651년 그녀는 아버지를 끌어들여 부르봉가(家)의 콩데 공(公) 루이 2세와 제휴하게 했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려는 제3차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자 그녀는 군대를 지휘해 1652년 3월 27일 허술한 저항을 뚫고 오를레앙을 점령했다. 마침내 그녀는 포부르생앙투안 전투(1652. 7. 2)에서 바스티유 포병부대에게 국왕군을 향해 발포하도록 명령해 콩데 군대가 전멸되는 것을 막았다.
루이 14세가 파리로 돌아오자(1652. 10), 그녀는 망명했다가 1657년 돌아왔으나 포르투갈의 아폰수 6세와의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1662~64년 다시 궁정에서 추방되었다. 1670년 12월 15일 그녀는 루이 14세에게 왕실경비대 소속 장교인 낮은 신분의 로죙 백작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했고, 왕은 이를 받아들여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격노한 신하들의 압력으로 생각을 바꾼 루이는 로죙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녀는 1680년 로죙을 석방시켰으며 그 대가로 상당한 재산을 루이의 서자인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에게 양도했다. 그녀는 1681년(또는 1682) 로죙과 은밀히 결혼했지만 불행하게 살다가 1684년 헤어졌다.
그녀는 1688년까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회고록 Mémoires〉과, 2편의 단편소설, 그리고 〈초상화 portraits〉라는 글을 남겼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