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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보복·미행·수색·압거 등을 피하여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이후 1940년까지 8년 동안 자싱[嘉興]·항저우[杭州]·쑤저우[蘇州]·전장[鎭江]·난징[南京]·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구이린[桂林]·치장[F江] 등 10여 곳을 전전하며 남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의 의거로 장제스 국민정부로부터 물심양면으로의 실질적 지원을 받게 되었고, 한국 독립에 대한 여론을 중국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환기시킬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933년 5월 김구와 장제스는 난징의 정상회담에서 중국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하여 11월 5일부터 한인특별반을 설치·운영했다. 당시 임시정부요인들은 하루 1끼로 겨우 연명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하루도 임시정부의 간판을 내린 일이 없었으며 중국 국민정부를 따라서 이동해가면서도 수반 이동녕·김구·조소앙 등의 30여 명은 5당·7당 통합의 열의를 보였으며, 좌우익 진영의 통일에 대한 노력을 버리지 않았다. 1932년 항저우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의정원 비상회의를 개최하여 무정부 상태의 임시정부 기구를 재정비·강화했고, 1935년 애국단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같은 해 전장으로 간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 때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중일전쟁을 호재로 인식하여 직할군대의 양성을 준비하다가 창사·광저우를 지나 1939년 류저우에서 200명 내외 규모의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해 3월 10일 주석 이동녕이 중심이 되어 치장으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오늘날 상승가 27호를 거점으로 독립운동 투쟁사를 선전하기 위해 선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성환(曺成煥)·황학수(黃學秀) 등 6명을 군사특파원으로 시안[西安]에 파견, 화베이[華北] 진출의 예비공작으로 교포의 초모(招募)공작을 추진했다.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1940년 5월 한국광복진영의 3당이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기도 했다. 이는 1940년 3월 13일 치장 현 타만 임시정부 청사 2층에서 72세로 서거한 주석 이동녕의 유언에 따라 대동단결의 평생의거를 실현시킨 것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동하던 8년 동안의 어려운 시기에도 부단히 광복정책을 수행해나갔으며,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함으로써 27년 중 마지막 5년의 광복정책을 국제적 상황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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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시대(1932~40)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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