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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유일당운동

다른 표기 언어 民族唯一黨運動

요약 1920년대 후반 중국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 전개된 운동. 중국 관내에서는 1926년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조직되었으며, 다음해 상하이에서도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조직됐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과의 분열로 인해 상해촉성회가 해체 선언을 발표하면서 유일당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만주에서는 정의부가 앞장서 신민부·참의부와의 연합을 추진하며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회의를 개최되었으나, 유일당의 조직방법을 둘러싸고 협의회와 촉성회로 분열되었다. 촉성회는 세력을 모아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구성했고, 협의회는 국민부를 조직했다. 그러나 결국 두 단체를 하나로 통합시키지는 못함으로써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중국 관내 지역

중국 관내의 조선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1924년 1월 합작해 성공적으로 북벌혁명을 완수한 것에 자극을 받고 유일당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관내 각 세력이 유일당운동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우선 베이징[北京] 지역의 창조파계 인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불참세력들은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독자적인 활동방안을 모색했지만 독립운동의 구체적·현실적 방안을 갖고 이를 수행할 만한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으로써 유일당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임정계 인사의 경우, 임정은 1923년 이후 제 역할과 기능을 못했고 일부 임정옹호파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었으므로 분산된 독립운동세력을 결집시켜 이를 바탕으로 임정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유일당운동에 참여했다.

관내지역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자의 경우 아직 민족운동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던 단계였으므로 자신들이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해 민족유일당을 건설할 필요성이 있었다. 1925년 하반기부터 일부 독립운동자들은 파벌 극복과 전선 통일을 위한 대동단결론을 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은 개조파 인물 안창호(安昌浩)였다.

그는 1926년 7월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창조파 인물 원세훈(元世勳)과 만나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먼저 각 지역에 촉성회를 조직할 것 등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0월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조직되었다. 북경촉성회는 당적 결합을 촉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장건상(張建相)·원세훈 등 7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했으며, 〈독립당촉성보〉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상하이[上海] 지역에서는 베이징에서 촉성회가 조직된 이후 촉성회조직운동이 일어나, 임정의 홍남표·홍진(洪震) 두 사람 이름으로 된 전민족적 독립당 건설을 위한 선언문이 발표되기에 이르렀고, 곧이어 촉성회 창립총회를 개최해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를 조직했다(1927. 4). 한편 광둥[廣東]과 우한[武漢] 등지에서 중국 국민혁명에 적극 참여하고 있던 의열단(義烈團)도 1927년 5월 "본단은 조선독립운동을 올바로 하려면 통일적 총지도 기관이 확립되어야만 할 것을 확신한다"고 밝히고 유일당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이 선언 발표 후 광둥·우한, 나아가 난징[南京]에서도 촉성회가 조직되었다. 이들 각 지역 촉성회 대표들은 1927년 11월 상하이에 모여 한국독립단관내촉성연합회를 결성하고 "유일독립당 성립을 촉성하는 각지 촉성회 조직준비회 성립에 노력할 것, 한국 독립에 필요한 전민족적 일체 혁명역량을 총집중하는 데 선구가 될 것"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처럼 연합회는 각지 촉성회를 토대로 하여 창당작업에 착수할 것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유일당운동은 추진되는 과정에서 혁명정당으로의 발전을 전망하는 사회주의 진영과, 이당치국(二黨治國)으로 임정의 강화를 꾀하는 민족주의 진영과의 노선 차이가 드러나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조짐은 1927년 7월 국공합작의 결렬, 12월 광주폭동으로 이어지는 국공의 격심한 대립이 관내 조선인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간격을 서로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넓혀놓음으로써 파탄으로 귀결되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1928년에 들어와 더이상 진전되지 못하다가, 1929년 11월 상해촉성회가 해체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유일당운동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던 상해촉성회가 해체되자, 각지 촉성회도 차례로 해체되었고 이에 따라 민족유일당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만주 지역

1920년대 후반 만주에서는 북만주의 신민부(新民府), 남만주의 정의부(正義府), 동만주의 참의부(參議府) 등 3개 단체가 교포사회를 3분해 통할하고 있었다.

관내지역 유일당운동의 전개는 이 3개 단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만주에서도 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이 운동에 나선 단체는 정의부였다. 정의부는 1927년 8월 제4회 중앙회의를 열어 신민부·참의부와의 연합을 도모하고 유일당 조직을 조속히 결성하기 위한 제반준비를 다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만주지역에서의 유일당운동이 적극 추진되어 1928년 5월 지린 성[吉林省]에서 좌우파 18개 단체대표가 모여 전민족유일당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는 유일당의 조직방법을 둘러싸고 단체본위 또는 단체 중심조직론을 주장하는 협의회측과 개인본위론을 주장하는 촉성회측으로 나누어져 격론이 벌어졌다. 양자는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결국 분열되고 말아 서로 다른 장소에서 회의를 가졌다.

촉성회측은 1928년 12월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의 일부, 신민부의 주력이 중심이 되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일명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구성했고, 협의회의 중심세력인 정의부는 참의부의 일부세력과 신민부의 민정파를 합쳐 국민부를 조직하고 정의부·참의부·신민부를 해체했다.

결국 1920년대 후반기 만주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은 3개 단체의 유일당재만책진회와 국민부 등 두 단체로의 통합은 이루었으나, 이들 두 단체를 하나로 통합시키지는 못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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