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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마크가

다른 표기 언어 Barmakids

요약 호라산 발흐 시(市) 출신의 이란계 성직자 가문.
(아). al-Barāmika/al-Barmak. Barmecides라고도 함.

개요

8세기초 아바스 왕조(칼리프)의 비서와 와지르로 명성을 얻었다.

이들의 선조는 바르마크였다. 바르마크는 불교 사원 나우바하르 사원의 고승(高僧) 칭호이다. 바르마크 가문은 문학·철학·과학을 장려하고 여러 가지 종교, 철학의 문제에 대해 포용력있는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운하·모스크·우편제도 등과 같은 공공사업을 발전시켰으나 반면에 티그리스 강변에 웅장한 궁전을 짓느라고 돈을 허비하기도 했다.

663년경 바르마크 가문의 본고장인 발흐가 아랍군에 함락되자 할리드 이븐 바르마크는 형제들과 함께 이라크의 요새도시 바스라로 이주해 그곳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할리드 이븐 바르마크

바르마크 가문에서 맨 처음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는 8세기 중반 아바스 왕조 칼리프제를 확립하려 한 혁명의 지지자로서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747년 아바스 군대가 이라크로 진격했을 때 할리드는 약탈 전리품을 분배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후 다이르쿤나에 파견되어 이 지역을 다스렸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의 통치 시기에 할리드는 아부 알 잠과 행정권한을 나누어 가졌으며 군대와 토지세 징수일을 맡아 했다.

할리드와 칼리프의 친분관계는 칼리프가 딸의 양육을 할리드에게 맡길 정도로 두터웠다.

알 만수르 통치시기에 할리드는 파르스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765년에는 이사 왕자의 칼리프 계승권 포기각서를 받으러 가는 사절단에 들기도 했다. 그뒤 할리드는 타바리스탄 총독에 임명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낸 767~771년에 할리드의 이름으로 주화를 만들기도 했다. 거기에서 할리드는 우스투나완드를 점령하고 만수라라는 도시를 건설해 명성을 떨쳤다. 775년 알 만수르는 정치적인 음해와 경쟁심리로 인해 할리드를 해임하고 무거운 벌금형을 내렸다.

알 마디 태자비 알 하이주란이 벌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곧이어 할리드는 모술에 파견되어 쿠르드족의 반란을 진압했고, 그의 아들 야히아는 아제르바이잔을 다스리게 되었다. 바르마크가는 알 마디 할리프의 통치 시기에 더 많은 특권을 누렸으며, 할리드는 아들 야히아의 도움을 받아 다시 파르스 총독에 임명되었다.

야히아

할리드는 781(또는 782)년에 죽었다.

야히아는 아버지의 철저한 훈련을 받았으며 이미 여러 공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778년 칼리프의 아들 하룬의 비서관이자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비서관으로서 그는 하룬의 칼리프 승계를 확실히 하는 역할을 했다. 779(또는 780)년 칼리프는 하룬에게 야히아와 함께 비잔틴 원정대를 이끌도록 명했다. 하룬은 원정에서 돌아와 서부지역 책임자가 되었고 야히아는 그의 고문이 되었다. 781년 하룬은 그의 형 무사 다음으로 칼리프가 된다는 제2계승권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알 하이주란과 야히아의 영향력 때문에 칼리프는 무사의 태자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죽었다. 하룬은 새 칼리프 무사 알 하디에 대한 어떠한 적대행위도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야히아의 조언에 따라 이러한 현명한 결정을 내린 덕분에 이슬람 제국은 내전을 면할 수 있었다. 알 하디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야히아와 하룬의 지위를 확실히 보장해주었다. 하지만 이는 전술적 실책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하디가 하룬이 아닌 자신의 아들을 칼리프 후계자로 지명했을 때 야히아만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하룬도 이에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야히아는 하디에게 그의 맹세를 어긴다면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하룬과 야히아는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바로 그무렵 하디는 원인모를 상황 속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러자 하룬 알 라시드(786~809)가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 알 하이주란과 야히아가 모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후 라시드가 야히아와 그 아들들에게 모든 행정을 일임하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야히아는 와지르라는 칭호를 얻었고 두 아들 알 파들과 자파르는 칼리프의 옥새관(玉璽官)이 되었다.

알 파들과 자파르

알 파들과 자파르 또한 와지르라는 칭호를 받았다.

동생인 자파르는 알 라시드가 총애하는 인물이었으며 달변가이고 환락과 향연을 좋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궁을 좀처럼 떠나지 않았으나 796년 칼리프가 시리아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그를 파견했을 때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우편·직물·조폐국 디완에 임명되었다. 조폐국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새긴 주화를 만들어 여러 지방에서 사용하게 했다. 알 파들은 동생과 달리 유능하고 진중했다. 792년 알리드 야히아 이븐 아브드 알라가 다일람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알 파들은 외교적인 수완과 타협술로 그를 설득해 항복시켰다.

793년 알 파들은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카불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다. 797년 알 파들은 메카에서 지내던 아버지 야히아에게서 중앙정부에 대한 행정권을 인계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알 라시드의 큰아들이며 후계자인 알 아민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바르마크가의 몰락

바르마크가의 영향력은 17년간 지속되었으나 권력과 행운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몰락했다.

803년 자파르는 겨우 36세의 나이로 처형되어 시체의 일부분이 바그다드의 다리에 내걸렸다. 바르마크가는 무하마드 이븐 할리드를 제외하고 모두 감옥에 갇혔으며 재산을 몰수당했다. 야히아와 알 파들은 각각 805년과 808년에 감옥에서 죽었고 수많은 바르마크가 지지자들이 이교도로 몰려 처형당했다.

바르마크가는 갑작스럽고 잔인하게 몰락당했다.

그들에게 붙여진 죄목은 많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첫째, 왕실과 국가통치, 사회에 대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 점이었다. 둘째, 그들은 모든 기회를 이용해 치부했다. 그들이 선심을 잘 썼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셋째, 이들은 다양한 종교나 정치 분파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허용해 칼리프의 권위를 위협했다. 그러나 비록 바르마크가는 몰락했지만 그들의 명성은 살아남았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었다. 과대평가와 편견에 손상되기도 하고 추앙되기도 하면서 전해진 서로 모순되는 전설들은 전승자들이 바르마크가의 성격을 찬양하거나 불신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때문에 바르마크가의 역사적 역할이 불명확해졌다. 후기 이슬람 문헌, 특히 페르시아 문헌 칼리프 통치사에서는 바르마크 시대를 이상적인 시기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전승들은 심지어 바르마크가를 조로아스터교도라고 이야기하면서 사산 왕조에까지 이 가문의 내력을 추적한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들의 몰락으로, 와지르가 행정의 수반일 뿐 아니라 정책 입안자도 된다는 방침에 종지부가 찍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몰락은 당시의 자유주의 경향에 대한 칼리프의 반동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르마크가의 잔치상'이라는 표현은 실속 없고 겉만 요란한 연회를 일컫는 말로서, 〈천일야화 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 가운데 〈이발사 형제 이야기〉에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한 바르마크가 사람은 배고픈 사람에게 빈 접시들만 주어 그의 유머 감각을 시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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