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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폴란드-리투아니아, 보헤미아, 헝가리의 왕조.
(영). Jagiellon.
15, 16세기 중동부 유럽에서 강력한 왕가였다.
이 왕가의 시조는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로서 1386년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해 폴란드 왕 부아디수아프 2세 야기에우오가 되었다. 이렇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군주의 결혼을 통해 통합되었다(그러나 그는 자기 대신 리투아니아를 통치할 대공을 곧 임명했음). 이 두 나라는 통합되면서 막강한 세력을 이루어 공동의 주요한 적인 튜튼 기사단을 타넨베르크 전투(1410. 7. 15)에서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왕조는 1430년 부아디수아프의 동생 스비드리기에우오가 사촌인 비타우투스(비톨트)를 대신해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지명된(1430) 이후 가문이 분열되어 두 나라의 연합이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비타우타스의 동생 지그문트가 스비드리기에우오를 물리치고 대공이 되면서 위기가 가라앉았다(1434). 그후부터 분열되기는커녕 오히려 세력을 확장해 1434년 아버지를 뒤이어 폴란드 왕이 된 부아디수아프 3세 바르네인치크는 1440년 헝가리 왕위까지(울라슬로 1세로서) 차지했다.
1444년 부아디수아프가 바르나 전투에서 투르크족과 싸우다 전사한 이후 폴란드인들은 암살당한 지그문트를 뒤이어 1440년 리투아니아 대공이 된 동생 카지미에슈 4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카지미에슈는 리투아니아의 자치요구에 대체로 동조하는 입장이었으며, 중앙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야기에우오 왕조 초기에 지배세력이었던 폴란드의 대지주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젠트리 계급에 폭넓은 배타적 특권을 부여해 자신의 적극적인 외교정책에 대해 젠트리의 정치적·재정적 지원을 얻어내고자 했다.
그결과 카지미에슈는 튜튼 기사단과의 13년전쟁(1454~66)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기사단이 차지했던 영토의 많은 부분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 부아디수아프를 보헤미아의 왕(블라디슬라프 2세, 1471)과 헝가리의 왕(울라슬로 2세, 1490)으로 앉혔다. 나아가 드네스트르 강과 도나우 강 하구를 장악함으로써 폴란드 왕국의 무역로를 차단하고 있던 투르크족과 맞서 싸울 수 있었다(1485~49). 그러나 카지미에슈의 아들인 얀 알베르트와 알렉산드르 1세 치세에 야기에우오 왕가는 폴란드에서 상당 정도의 권력을 귀족계급에게 빼앗겼으며(보헤미아와 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였음) 튜튼 기사단 및 리투아니아 영토를 잠식해 들어온 모스크바 공국의 침략을 받았다.
1506년 지그문트 1세가 형인 알렉산드르를 계승해 왕위에 올랐을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은 외세의 침략과 내정의 부패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지그문트는 젠트리 계급의 권력을 축소시키지는 않고 점차적으로 통치권을 강화해가면서 외교적 수단을 이용해 튜튼 기사단과 모스크바 공국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하라고 부추겨온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교분을 텄다. 그는 1514년 오르샤에서 모스크바 군대를 격파하고 튜튼 기사단에게도 승전을 거두었다.
튜튼 기사단은 1525년 기사단 영토가 프로이센의 세속 공작령이 되도록 하면서 동시에 폴란드의 한 봉토(封土)로 편입되도록 했다. 지그문트의 조카 로요슈(루드비크) 2세가 1516년 부아디수아프를 이어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으나 투르크족이 헝가리 왕국을 무너뜨린 모하치 전투(1526)에서 그가 죽음으로써 보헤미아와 헝가리에서의 야기에우오 왕조의 통치는 끝이 났다.
반면에 지그문트 1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정치적 안정을 더욱 높이고 마조비아를 자기 영토에 편입시켰으며(1526) 폴란드 르네상스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왕국은 지속적으로 귀족과 젠트리들에게 권력을 빼앗겼으며 이들은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분쟁을 일으켰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1548년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외부와의 분쟁을 피하는 아버지의 정책을 고수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귀족과 젠트리들 사이에서 책략을 부려야 했다.
그러나 리보니아가 모스크바로부터 벗어나 그의 보호를 청하고 폴란드의 영토에 편입되기를 원했을 때(1561) 그는 젠트리들과 동맹을 맺어 모스크바와의 대(大)전쟁을 위한 자금을 조달했으며 그 전쟁을 통해 리보니아와 발트 해안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했다(리보니아 전쟁). 리투아니아가 전쟁부담을 많이 질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연합을 더욱더 공고히 하는 데 노력을 쏟았다. 1569년 그는 두 나라가 루블린 합병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결성하도록 조치했다.
3년 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상속자 없이 죽었으며 그로 인해 야기에우오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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