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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83/84, 잉글랜드 서머싯 브리모어
사망 1643. 12. 8,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정치가.

개요

영국의회 의원(1621~43)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의회와 찰스 1세가 대립한 영국내란(청교도혁명, 1642~46) 초기에 의회파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19세기까지 지속된 영국의 조세제도 수립과 영국정부와 런던 시와의 밀접한 관계 유지에 공헌했다.

생애

핌의 아버지는 알렉산더 핌으로 그가 어렸을 때 죽었으며 어머니는 러셀가(家)의 가신인 베드퍼드 백작 앤소니 루스 경과 재혼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했으나 학위는 받지 못했고 미들 템플(영국의 법학원)에서도 공부했으나 변호사가 되지는 못했다. 의붓아버지 베드퍼드의 영향력으로 재무부의 지방공무원이 된 그는 1621년부터 죽을 때까지 의회생활을 했으며 주로 타비스톡의 러셀 선거구를 대표했다. 이내 가톨릭과 아르미니우스파(영국국교회의 고교회파) 고위성직자들의 적으로 알려졌으며, 유능한 재정가, 식민지문제 전문가, 의회 위원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극단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왕실과 의회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1630년부터 핌은 프로비던스아일랜드사(社)의 재정책임자가되었다. 이 회사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와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교역을 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1629~40년 왕이 의회를 배제하고 통치를 하자 이 회사는 주로 청교도들로 구성된 사람들을 규합했으며 이들은 1640년대 의회 정당을 이끌었다. 찰스 국왕이 영국 해군을 지원하기 위해 의회의 동의 없이 선박세를 부과하자 역시 이 회사 사람들이 반대세력을 조직했다. 1640년 8월 핌은 회사의 몇 사람과 함께 청원서를 작성했는데, 이 청원서는 12명의 귀족에 의해 의회에 제출되었다. 1640년 장기의회가 개원되었을 때 핌은 이른바 중간 그룹을 선도했으며 의회 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 이들은 하원을 장악했다.

핌의 정책은 그의 후원자 베드퍼드 백작의 정책과 노선을 같이했다. 즉 왕이 국가 재정을 승인하는 의회의 신임을 받는 정부를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요걸림돌은 찰스 국왕의 강경파 총신 스트래퍼드 백작 토머스 웬트워스였는데, 그는 1641년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국왕의 신임을 받는 총신을 반역자로 입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핌은 '왕국의 법을 전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대자연에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국왕도 반역을 범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1649년 국왕 찰스를 처형으로 이끈 혐의의 핵심을 보여준다. 런던에서는 스트래퍼드의 처형을 주장하는 대규모시위가 있었으며 핌은 그같은 시위를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핌은 찰스 국왕을 강요하여 의회의 동의 없이 의회 해산을 금지하는 법률을 승인하도록 했다. 이어 정부·재정을 사사로이 운용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제도를 폐지하는 법률도 통과시켰다. 찰스는 국왕이 의회를 통해 통치해야 한다는 점을 이론상으로는 인정했으나 실제로 받아들일 의도가 없었으므로 강제적으로 끌려가는 입장이었고, 군대의 통제권이 주요한 쟁점이 되었다.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발생했을때(1641. 10) 반란이 진압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러나 의회는 국왕에게 군대지휘권을 주었을 경우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하원은 찰스가 내각을 바꾸지 않으면 의회가 국왕을 배제하고 아일랜드에 대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혁명을 선언한 이같은 주장은 대간의서(大諫議書)에 의해 보강되었다.

대간의서는 왕정에 대한 불만사항, 의회의 내각불신임권 요구, 교회개혁을 위한 의회의 종교회의 지명권 요구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의회는 대간의서를 159 대 148로 통과시킨 뒤 인쇄하여 의회 밖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배포했다. 이에 반해 반대파들은 왕당파를 결성했다. 핌은 1642년 1월 찰스 국왕이 체포대상에 올린 5명의 의원 중 한 사람이었다. 체포대상 의원들은 런던(훗날의 금융사업 중심지)에 피난했다가 국왕이 런던을 떠나자 다시 런던으로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핌의 정치철학은 "나는 왕 개인에게 주권을 부여하는 방법은 알아도 국왕의 권력에 주권을 부여하는 방법은 모른다"라는 말에 함축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그는 왕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국왕 단독으로 통치해서는 안 되며 국왕과 의회 간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핌은 한 번은 "자유가 문서화되었으면서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것은 왕국에 대한 조롱거리일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핌은 결코 군주제의 폐지를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없으며 확실히 민주주의자는 아니었으나 목적 달성을 위해 대중의 압력을 이용했다. 영국이 내란에 돌입하자 그는 군대를 창설하고 군대를 통제할 기구를 만들었으며 소비세와 감정세(후의 토지세)를 신설하여 전쟁비용을 충당했다.

런던 시와의 밀접한 관계는 자금 동원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에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곳에서 17년 동안 국가를 운영했다. 전세가 어려워졌을 때 그는 자신이 바라는 이상으로 과격하게 나가는 장로교파에 양보를 하기보다는 스코틀랜드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현실적인 노선을 견지해 상원의 견제를 받을 때는 단독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다고 상원에 통보하기도 했다.

평가

핌은 주의주장에 얽매이지 않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시하는 열변가였다.

의회 전략가로서 그의 노련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과격주의자(공화파 일부도 포함)와 사회적 소요에 놀라 국왕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주려 한 평화주의자 간의 균형을 유지시켰다. 핌은 3년간이나 의회의 통일을 유지시켰다. 이 기간에 의회에는 어떠한 정당조직이나 규율·벌칙이 없었다. 이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뒤 그는 지쳤고 그가 죽었을 때는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었다. 그후 의회 지지파는 여러 파벌로 분열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핌은 의회 승리의 기초를 닦았으며 17세기 영국의 정치구도를 창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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