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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85. 12. 16, 프랑스 아미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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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68. 1. 10,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가구제조업자.
가장 혁신적인 가구제조업자로 18세기 유럽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에 있었으며,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가구로 여겨진다. 동명의 가구제조업자인 할아버지와 조각가인 아버지 프랑수아 크레상에게서 기술을 배운 그는 뛰어난 금속공예가이기도 했다.
1710년경에 파리에 간 듯하며, 처음에는 가구제조업자 앙드레 샤를 불의 스튜디오에서 일했고 곧 디자이너 질 마리 오프노르, 화가 프랑수아 바토 등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동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1715년 프랑스의 섭정 오를레앙 공작의 공인 가구제조업자로 임명되었으며, 1719년에는 생뤼크 아카데미의 가구제조업자로 선출됨으로써 중요한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포르투갈·바이에른 등 외국의 왕족과 퐁파두르 부인을 비롯한 부유한 프랑스 귀족을 위해서 가구를 제작했으나,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를 위해 가구를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섭정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에게는 그의 최고 걸작품으로 유명한 훈장 보관함(파리 국립도서관)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그는 미술 감정가로서 15,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인 라파엘로·티치아노와 15, 16세기 독일의 뒤러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훌륭한 예술품을 소장했다. 그러나 그는 거의 파산에 이르러 그 대부분을 팔아버리고 마지막 남은 것은 그의 가정부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루이 14세 양식을 따른 그의 최초의 작품들은 앙드레 샤를 불의 것과 유사하다. 1730~50년에 이르는 다음 시기에는 균형감과 우아한 힘을 갖게 되었으며, 과다한 로코코 장식은 피했다. 이 시기에 탁자의 모퉁이에 여성의 형상을 고정시킨 매혹적인 스페인 장식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양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에스파뇰레트). 그러나 1750년 이후에 그의 작품은 결국 복고풍으로 바뀌었다.
그는 모델을 디자인하고 가구를 손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구에 청동도금의 화려한 외장 장식을 조각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술은 당대의 거장 자크 카피에리의 기술과 비견할 만했다. 그러나 그런 비정통적인 총체성으로 인해 그가 길드와 충돌하고 금지사항을 위반했다 하여 1722년 청동제품 주물업자 및 조각사 길드에서는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섭정 오를레앙 공작의 중재로 구제되었는데, 공작의 아들은 1735, 1743년 2차례에 걸쳐서 크레상을 길드의 고소에서 보호해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크 양식에서 로코코 양식의 과도적인 단계인 레장스 양식의 대표적인 주창자가 되어 루이 왕조 초기의 웅장한 양식을 좀더 경쾌하고 유연한 커빌리니어 양식으로 대체시켰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서 오르몰루(금처럼 만든 놋쇠)가 입혀진 것은 18세기 프랑스 가구 디자인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로 상감세공 장식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닌다. 또한 그는 채색된 목재에 상감세공 기법을 도입하여 이전의 흑단과 흑단색을 칠한 목재를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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