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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살림살이에 필요한 기구류의 총칭.
공간별로 실내용과 실외용, 기능별로는 수납·작업·휴식용 등으로 분류되며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좁은 의미로는 실내용 수납장과 휴식용 집기를 주로 지칭한다. 가구 디자인의 목적은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
시계·거울·태피스트리·벽난로·패널화 등과 같이 실내를 돋보이게 하는 보완적 물품은 가구설비(accessory furnishings)라고 하며, 가로등의 기둥, 벤치, 음료수대 등은 스트리트 가구(street furniture)라고 하고, 커튼·쿠숀 및 그외 직물 제품들은 소프트 가구(soft furniture)라고 한다. 가구는 부엌이나 화장실에서 볼 수 있는 붙박이도 있지만 보통은 옮길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19세기 영국에서 휴대용 가방으로 디자인된 군인용 가구처럼 여행용 가구도 있다.
재료는 목재·금속·가죽·천을 비롯하여 석재도 부분적으로 쓰였으며 근래에는 플라스틱과 판유리 등도 흔히 사용되고 있다. 가구의 역사는 인류사의 출발과 궤를 같이 하며 생활환경 등 외적 조건에 따라 양식의 변화를 거듭하면서 발전하였다. 일반적으로 5,000년 전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오늘날 조립식 가구의 개념이 도입된 것을 제외하고는 가구의 기능적 조건과 특징은 고대와 현대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없다.
고대 서양가구
고대의 가구는 그 실상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철기의 사용 이후 공구의 발달과 목재의 가공기술이 축적되면서 건축기술과 더불어 점차 체계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고대 이집트 가구는 침대·걸상·옥좌·상자·스툴(stool)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현재 발견된 이집트의 가구류는 당시 사후세계관에 따라 절대왕권을 지닌 왕을 위해 조성했던 거대한 무덤의 부장품들이 대부분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특수한 분묘구조와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인해 유기질의 목재가구들이 거의 원형 그대로 발굴되었다. 그 대표적인 유물로는 BC 2600년경의 헤테페레스 여왕 묘의 부장품인 걸상·팔걸이의자·침대·천개(天蓋) 등의 가구와 BC 1300년대 중반기에 만든 투탕카멘 왕의 묘에서 발굴된 조립식 침대와 의자를 들 수 있다.
가구 중 의자가 특징적인데, 형태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각 부분에 사실적이고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손잡이 부분에 사자·황소·물새의 머리를 조각했다든지, 다리에 동물의 발 모양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 등이 그 예이다. 재료는 이집트가 원산지인 무화과나무와 대추야자나무 등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그 자체만으로는 고급 가구재로 부적당했기 때문에 보완작용을 해주는 베니어링(veneering) 기술과 상감기법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상감문양은 흑단·상아·색유리 등의 재료를 이용하여 순수성을 상징하는 팔메트·파피루스·나선형·파도형 등으로 시문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가구는 이집트처럼 침대·걸상·의자·상자 등이 남아 있는 부조(浮彫)들을 통해 확인되는데, 가구의 구조는 이집트와 비슷하지만 이집트 가구와 달리 가구의 다리부분이 육중하며 곡선을 많이 사용해 각 부분의 이음새가 조잡하다.
BC 1700년경부터 바빌로니아·아시리아·페르시아로 이어지는 통일국가를 배경으로 매우 수준높은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가구에서도 시대별로 독자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에서는 목재와 청동을 주재료로 하여 금·상아·자개를 상감하거나 화려한 모자이크 기법을 사용하여 악기나 상자 등을 제작하였다. 여기에 장식한 문양은 인면수신(人面獸身)의 신화적 소재와 기하학적인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아시리아에서는 바빌로니아의 전통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가구양식을 만들었다.
아샬바니발 향연의 그림에 나타난 의자처럼 다리에 날개가 달린 인물상이라든지 황소나 사자의 발을 조각하고 그 아래에는 소용돌이 문양을 넣어 장식적 효과를 높였다.
페르시아 가구는 앞의 두 나라보다 훨씬 장식적이고 화려한 것이 특징인데, 페르시아의 구셀쿠스 궁전에 조각된 등받이가 있는 올라앉는 의자는 평상의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의자로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는 아테네·스파르타와 같은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듯이 문화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습한 기후로 인해 목재가구류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대리석 건축의 부조와 도기화(陶器畵)의 내용을 통해 당시의 가구형식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의자·스툴·긴의자(couch)·테이블·상자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클리스모스(klismos)라는 의자는 균형잡힌 비례감각과 다리·등받침에서 세련된 선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의 가구형식을 대표한다.
이 의자의 초기 형태는 등받이 양쪽 끝이 둥글게 말리거나 백조의 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었으며, 때로는 앉는 부분을 천이나 동물가죽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긴의자는 낮에는 등받이나 안락의자로, 밤에는 침대로 사용했는데 그 구조나 양식은 이집트 침대와 유사했다.
의자의 다리는 역시 동물의 다리로 조각되었는데, BC 6세기부터는 이러한 다리가 긴의자의 위로 돌출되면서 머리받침과 발받침으로 변하였다. 가구에 붙어 있는 다리의 빼어난 곡선은 그리스 가구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된 특징이었다. 올리브나무에 금·은·상아·보석 등을 가공하여 장식효과를 높혔으며 금못을 사용한 결합방식·철판붙이기·기름마감 등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특히 새로 고안된 모서리 처리기법인 몰딩(molding)은 이후의 가구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헬레니즘적 요소에 의해서 그리스보다 더욱 화려하고 장식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폼페이와 헤르클레니움의 벽화, 로마의 묘비와 석관들을 토대로 재현한 당시의 가구들은 이와 같은 로마의 가구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긴의자·의자·스툴·테이블·서랍장·상자 등이 가구의 주종을 이루었으며 가장 기본적인 가구는 긴의자였다. 테이블은 둥근 형태와 직사각형이었으며 둥근 테이블의 경우는 3개의 동물다리가 받치고 있다.
가구의 다리를 동물의 다리처럼 만든 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적인 요소를 반영한 것이며, 사각의 다리에 각종 장식적인 조각을 하거나 동물의 다리에 전설 속의 날개 형상을 결합시킨 것 등은 앞 시기보다 훨씬 웅장하고 화려하게 변모되었다.
이와 같은 로마의 의자형식은 그뒤 유럽의 의자디자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목재는 단풍나무·흑단·비자나무 등이 사용되었으며 값비싼 재료도 식민지로부터 풍족하게 조달되었으나 선이나 형태의 세련미에서는 그리스를 따르지 못했으며 금·은·대모(玳瑁)·상아 등을 상감하여 장식효과에 치중했다. 그결과 가구는 형식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중세 서양가구
로마 제국이 붕괴되는 4,5세기에는 의자·스툴·긴의자·궤 등이 기본적인 가구로 사용되었는데 르네상스까지는 상대적으로 가구를 적게 만들었고, 목재라는 재료의 특성 때문에 거의 현존하는 것이 없다.
따라서 당시의 문학작품·필사본·로마네스크와 고딕 조각 등을 통해서 가구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8세기초 영문학 최초의 서사시 〈베오울프 Beowulf〉에서 옥좌와 의자 이외에 다른 가구가 없다고 한 것은 당시 유럽 가내경제의 일면을 보여준다.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동서의 중심에 위치해 정치·상업·종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주변국의 문화수용이 용이했다.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신봉했기 때문에 가구양식에서도 그리스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며 조형적인 면에서는 우아하고 정교한 곡선형태 대신 묵직하고 장중한 형태로 바뀌었다.
당시 가구는 주로 상아제품·벽화·모자이크 등에서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6세기초 막시밀리안(Maximilian)의 옥좌는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받침대는 튜브 형태이고, 등받이는 로마식으로 구부러져 있다. 이 옥좌에는 규칙적으로 배열된 잎이나 열매와 함께 새와 동물이 조각되어 있고, 정교하게 제작된 패널에는 예수와 세례 요한, 사도들의 생애가 새겨져 있다.
비잔틴의 가구는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한데 그 까닭은 정치와 종교가 밀착되어 있어 예술가나 공예가가 주로 교회의 장엄을 기리기 위해 제작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십자군 원정 이후 프랑스나 영국의 고딕 예술은 이러한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 탄생할 수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양식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한 후 로마와 이웃한 도시들에서 조성되었던 미술양식으로서, 7세기 성 그레고리우스 1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주요한 가구는 교회당에서 사용하는 것들로서 제단·설교단·의자·침대·테이블 등이었다.
의자는 로마의 것과 같이 장중하고 묵직하며, 직선형의 다리로 구성되었다. 등받이와 팔걸이로 내려오는 곡선은 당시 건축의 아치 곡선을 따랐으며, 로마에서 화려한 장식문양으로 빈틈없이 조각했던 것과는 달리 전체에 간결한 십자형의 투각 문양을 배치했다. 재료와 기법에서는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고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장엄한 면도 보여준다.
로마네스크는 이탈리아와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봉건제도가 형성되는 시기로서 5세기말 프랑크 왕국에서부터 12세기 고딕 양식 이전까지 해당된다.
이 시기의 가구로는 의자·침대·궤·탁자 등이 있다. 의자는 목재·석재·금속재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건축양식을 따른 위엄있는 옥좌도 있지만 X자형 스툴이 중세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샤를마뉴(Charlemagne)에서 출토된 다고베르트(Dagobert)의 옥좌를 들 수 있는데, 이는 9세기경 샤를마뉴 왕조 때 사용했던 도금 청동제의 접는 의자로 다리는 발톱이 달린 동물의 발로 표현되어 있으며 들것의 꼭대기에는 사자의 머리 깃이 달려 있다.
장식문양은 성서나 종교적 의장을 주로 사용했으며 바둑판 무늬나 산형 무늬 등을 부조로 표현하기도 했다.
12~16세기에 북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성립된 고딕 양식은 1096~1270년까지의 7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으로 비잔틴 양식 및 동방의 화려한 문화로부터 자극을 받아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가구 또한 주로 의자에 집중되었는데, 스툴·X자형의자·벤치·궤상의자나 등받이가 긴 의자 등 종류가 다양해졌다.
현재 전해져 오는 대표적인 의자로는 D. 애퐁소의 옥좌로 불리는 의식용 의자가 있다. 현재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는 이 의자는 1470년경 참나무로 제작한 것으로 등받이는 고딕식 맞배지붕이며 그 위에 첨두가 달려 있다. 팔걸이의 측면에는 첨두형 아치나 사엽형(四葉形)이 새겨져 있고, 다리부분에는 만들어 붙인 4마리의 사자조각이 있는 등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다. 15세기 프랑스 의자들도 등받이 판넬에 나뭇잎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고딕 가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건축적 요소인 첨두형 아치가 장식의장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 고딕 양식
근세 서양가구
14, 15세기 무렵에는 서랍이 달린 찬장, 구획된 상자, 다양한 종류의 책상 등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가구가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디자인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가구가 적었기 때문에 손님이 자기의 침대나 그밖에 필요한 것을 직접 가지고 다녔다. 따라서 가구는 옮기기 편한 조립식 테이블이나 침대, 접을 수 있는 의자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침대는 이집트 침대를 연상시키듯 머리부분이 높은 대각선 표면으로 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근세 문화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르네상스는 고대 로마의 중심 무대였던 이탈리아에서 14세기경 시작되어 프랑스·독일·영국 등으로 파급되었다.
14세기 말엽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의 원형인 고대 로마 문화를 기본으로 하면서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을 흡수해 개성있는 새로운 양식을 이룩하였다.
각 도시의 부호나 성당이 문화의 중심을 담당하면서 견고한 주택과 양질의 가구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가구는 튼튼하고 단단한 구조를 지향하면서도 로마의 가구처럼 용도보다는 형태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당시 화가나 조각가뿐만 아니라 건축가도 가구의 제작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가구의 세부에서 건축물과 상통하는 면이 보였으며 각 부분에 인물과 동물이 조각되고, 등받침에 상감기법뿐 아니라 심지어 템페라 기법의 회화까지 채택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는 1500년경 롬바르디아에서 제작한 X자형 의자인데, 그 형태는 사브나롤라와 단테스카 두 종류로 제작되었다. 의자 표면은 인타르시아(intarsia) 기법으로 상감했으며 문양을 조각한 경우도 적지 않다.
스가벨로(Sgabello) 의자의 경우도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상감기법이 주로 쓰였으나 후기에는 등받이와 지지대가 매우 우아하고 정교한 곡선 위주로 조각되었고, 문양 또한 고전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재료는 호두나무를 주로 사용했으며, 문양은 아칸서스잎·뇌문(雷紋)·천사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의장을 주로 채택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백년전쟁의 승리와 함께 고양된 국가의 힘과 야망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예술양식이 필요했다. 이러한 여건에서 15세기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양식이 프랑스의 고딕 양식에 수용되어 혼용되다가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프랑스의 독자적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정착·발전하였다.
프랑스 가구는 주로 궁전 및 귀족들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참나무와 호두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다.
특수한 용도의 의자는 신분을 상징하는 역할을 겸하기도 했으며 팔걸이에 숫양 머리 모양이 조각된 1590년경의 호두나무 의자는 경쾌하고 날씬하여 프랑스적인 성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앞 시기 의자의 팔걸이는 무늬가 부조된 패널로 막힌 데 반해서 시원하게 뚫려 있으며 단순한 직사각형의 다리도 눈에 띈다. 중간 높이의 등받이는 직물로 씌웠는데, 카케투아르(Caquetoire)라는 안락의자와 같이 매우 시원한 느낌을 준다.
영국은 북유럽의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프랑스보다 100년 늦은 16세기 중엽부터 재력을 갖춘 상인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이 영국 르네상스의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상인들이 축적된 재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주택과 가구의 수요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1530~40년경 엘리자베스 시대의 팔걸이 의자인 웨인스콧(Wainscot)은 참나무로 만들어졌는데 패널로 된 등받이가 있고, 뚫려 있는 팔걸이는 아래로 구부러져 있으며 다리는 곧게 되어 있다.
이 의자는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이며 통나무로 제작되어 육중하다. 팔걸이의 위를 반쪽의 해바라기로 장식하고 길로쉬 디자인으로 구성한 아치형에 둘러싸인 마름모꼴 안에 양식화된 꽃 무늬를 장식했다. 1640~50년경 웨인스콧 의자도 엘리자베스 시대의 의자와 디자인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등받이 패널 위의 소용돌이 무늬가 더욱 장식적인 경향을 띠었고, 팔걸이의 곡선이 보다 유연해졌다.
바로크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정연한 고전적 양식이 무너지고 불명확한 곡선의 연속과 유동적 분위기를 가진 새로운 양식의 문화로 1506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시작되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1650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루이 13·14세 때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스튜어트 왕조에서 크롬웰 혁명기로 접어들면서 르네상스적 고전미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말엽 이탈리아에서는 강력해진 교황제 아래 매우 장식적인 가구들이 제작되었다. 이 시대에는 가구를 공예가보다는 조각가들이 제작하게 되면서 구조적인 기능은 떨어지고 대신 하나의 조각작품을 연상시킬 만큼 장식적이 되었다.
가구가 전반적으로 육중해졌으며 나뭇잎 등의 소용돌이 장식과 그로테스크한 가면, 큐피트상이 서로 뒤엉켜 있고, 각종 문장도안이 소용돌이의 틈에 새겨져 있어 지나친 장식화의 경향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에서는 조각된 가구에 도금하는 것이 유행했으며, 놋·백랍·상아 등으로 상감했다.
목가구의 종류는 옷장인 카소네(cassone), 찬장인 크레덴차(cre-denza), 의자, 테이블 등 다양하지만 1730년 A. 코라디니가 디자인한 의자는 바로크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전체의 구조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물들의 조각과 아라베스크 문양, 불규칙하고 변화무쌍한 움직임은 의자라기보다는 하나의 조각품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바로크 양식이 이탈리아에서처럼 유행했는데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1643년부터 1715년 사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 무렵에 주로 사용된 나무는 흑단·호두나무·참나무·너도밤나무 등이며 상감세공과 도금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장식 소재로는 튤립, 아네모네, 새, 여인의 얼굴, 아칸서스잎 등이 사용되었지만 이탈리아처럼 지나친 장식은 억제되고 명확한 형태와 뛰어난 비례감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도 1660년 찰스 2세가 등장하면서 바로크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가구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675년경 왕정시대의 복고적 스타일인 팔걸이 의자와 돌고래 모티프의 의자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프랑스 바로크의 단순한 곡선미를 연상시키며, 한편으로는 보다 구불구불해지고 장식성이 강한 색다른 경향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시기의 가구 재료는 호두나무가 특히 즐겨 사용되었다.
로코코는 좌우 비대칭의 곡면장식을 특징으로 하며 바로크보다 더욱 율동적이며 새롭고 유려한 표현형식으로서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의 로코코 가구는 루이 왕조의 궁정생활과 부합되는 쾌락적이고 관능적인 취향을 보이면서 과다한 장식 경향을 띠었다.
로코코 양식의 전성기인 루이 15세 때에는 바로크 시대의 풍만한 양감이 경쾌하고 섬약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장식 소재는 야채·비둘기·풀·꽃·새·나비·천사 등과 같이 작고 연약한 것들로 바뀌었으며, 옅은 청색, 연녹색, 연분홍의 부드러운 색조로 처리되었다.
영국의 로코코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는데 이 시기에 특히 주거생활에 관심이 쏠리면서 영국식 가구의 전형이 형성되었다.
제작자에 따라 개성이 뚜렷해졌으며 재료는 호두나무와 마호가니가 즐겨 사용되었다. 전체적인 구조는 경쾌한 곡선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필요한 부분에 장식을 첨가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토머스 치펀데일은 실용적이며 경쾌한 로코코 양식과 중국의 고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구를 제작한 공예가로 주목된다. 그가 만든 가구의 특징은 나약한 듯하면서도 정교하게 상감되고 채색된 것이다.
신고전양식은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의 변덕스러움에 대항하여 나타난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 양식이라고도 한다.
공예가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 사상이 바탕이 되어 완성된 것으로 형태의 단순성과 균형성을 강조했다. 이는 가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완벽한 비례균형을 갖춘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가구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반면 목조가구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다. 즉 나약한 듯하면서도 정교하게 상감되고 채색된 가구가 주종을 이루었다.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을 바탕으로 시작된 리전시(Regency) 양식은 초기 프랑스 파리에서 제정양식으로 출발했다.
이 양식의 가구들은 장미목과 마호가니를 재료로 청동과 도금장식이 곁들여졌으며 금속상감과 마르케트리 기법도 사용되었다. 특히 이집트·로마·그리스의 전통양식에 새로운 장식기법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의자·탁자와 스핑크스 흉상을 조각한 가구 등은 특징적이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파파 비더마이어(Papa Biedermeier:유산계급의 안락함이라는 뜻) 양식이 생겨났는데 이는 한마디로 고전양식을 단순화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가구는 제정양식의 영향을 받아 의자에 굽어진 다리, 말린 팔걸이가 등장하였으며, 재료로는 마호가니·자작나무·잿나무 등이 사용되었다.
근대 서양가구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물질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위축된 인간의 가치와 거기에서 비롯된 기계제품의 범람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주창된 미술공예운동(Arts & Crafts Movement)은 존 러스킨의 사상과 윌리엄 모리스의 실천력을 바탕으로 일어난 운동이며 모든 분야의 공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세의 공예가 정신과 수공예의 부활이 미학적인 현대감각과 합쳐지면서 가구의 단순성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동양풍의 직선적이고 유기적인 형태와 디자인이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여러 가지 양식을 모방·혼합하여 복고적인 가구를 만들었던 만큼 미술공예운동의 가구는 신선한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으나 고딕 양식의 부활에 치중하여 새로운 양식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 운동 초기의 가구 경향은 장식보다 재질감에 치중했으며 점차 여러 경향의 디자인을 폭넓게 시도하면서 유럽 각국에 폭넓게 파급되었다.
공예상의 자연주의라고도 불리는 아르 누보(Art Nouveau) 양식은 식물·동물·곤충 등의 소재를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인 유선형의 유연한 곡선과 기하학적 원형으로 표현했으며, 특히 곡선들은 해초나 덩굴식물의 줄기와 같은 율동적인 흐름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대담함과 절대적인 전통적 요소의 혼합으로 루이 15세 당시의 로코코 재활을 위한 시도였다고도 볼 수 있다. 루이 15세의 책상, 루이 16세의 의자, 르네상스풍의 찬장 등을 선보였다.
유리나 주철과 같은 가소성 재료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목재가구에서는 대단한 수공과 재료의 손질을 감내해야 했다. 가구 제작기술의 수준이 높아지긴 했으나 장식이 지나치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 미술공예운동, 아르 누보
현대 서양가구
미술공예운동에서 빈 분리파에 이르는 공예의 흐름은 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산업공예와 수공예를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려 했던 바우하우스, 즉 초현대적인 가구와 좀더 수공예적인 측면을 강조한 아르 데코(Art deco), 즉 고전양식을 부활한 가구이다.
바우하우스와 아르 데코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나타난 입체주의·미래주의·구성주의·신조형주의(De stil)의 영향을 받아 작가마다 제작 이념과 방향은 각기 다르지만 회화의 조형 및 공예의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바우하우스는 무테지우스(Muthesius)의 독일공작연맹을 모델로 하여 수공예와 산업 디자인의 통합, 나아가 예술과 산업의 결합을 목표로 체계적인 디자인 교육의 한 모범을 보였다.
그로피우스(건축가), 클레, 칸딘스키(화가), 모호이노디(사진작가)를 포함하여 요세프 앨버스, 바이어, 스로이어 등의 공예가가 혼연일체가 되어 구성적 추상주의의 기하학적 형식을 새롭게 창출함으로써 그 이념과 함께 현대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 제작된 공예품과 가구들은 기능주의적 측면을 강조하고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제작되었다는 것이 특징으로 꼽힌다.
바우하우스에서 시도된 가구는 특히 의자 디자인에 집중되는데, 1925년 마르셀 브로이어는 강철 파이프 의자를 만들었다. 이는 20세기 산업재료를 최초로 가구에 활용하여 기계생산과 관련되도록 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이 의자는 오늘날에도 생산되고 있다.
바우하우스가 기계생산의 모형에 치중했던 반면에 아르 데코는 아르 누보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시에 유행한 미술사조를 받아들여 보다 수공예적 경향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이는 과거의 전통적 요소를 현대에 살리려고 한 것으로 목재가구의 형태를 보수적이면서도 단순한 구조로 마감했다. 이들 2가지의 공예적 흐름은 이후에 전개된 각국의 다양한 공예의 성격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바탕이 된다.
1930~40년대에 대량 생산된 상업용 가구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으며 번쩍거리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형태는 점차 조립식으로 바뀌었으며 금속이나 플라스틱 의자가 만들어지고, 빅토리아 양식의 선반 등이 부활되었다. 또한 소파나 침대겸용 가구, 가전제품 발달에 상응한 라디오나 텔레비전용 장식장이 대량 생산되고 있다. 서양가구는 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면서 가구의 새 장을 열었다. 즉 형태가 얄팍해지고 가벼워지고 있으며 기이하고 유행성이 높은 신가구들이 속출하고 있다.
동양의 가구
인도
근대 이전까지 독자적인 고유양식 위에 서유럽의 양식을 수용하고 이를 개량하여 토착화시킨 것이다.
19세기 이후에는 앞 시기에 비해 예술적 수준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가구양식에도 그러한 흐름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다만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면보다는 목재에 조각 또는 상감장식을 하는 수준이 뛰어났다.
중국
전국시대(BC 403~221)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가구양식을 발전시켰던 중국의 가구는 송대까지는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으나 선비들의 품격있는 생활을 강조했던 명대 이후에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나뭇결이 고운 자단목 등을 사용하여 뛰어난 구성미를 지닌 명대 이후의 목재가구는 중국 가구의 높은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건실한 목재 접합구조에 세밀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자단목 가구와 화려한 문양으로 시문된 옻칠 가구는 중국 가구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일본
화려하고 장식적인 문양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 가구는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특히 헤이안[平安] 시대에 일본풍의 가구가 정착되면서 점차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
마끼에[蒔繪]라는 독특한 옻칠 장식기법으로 목가구의 표면을 마감처리한 수공예적 고급가구는 일본 가구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의자생활을 하는 중국의 경우와 달리 다다미를 깔고 평좌생활을 하던 근대 이전의 시대에는 가구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한 편이다.
한국의 가구
우리나라의 가구는 선사시대로 소급되는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주거 및 생활환경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하여 시대에 따라 빼어난 전통을 수립하였다.
특히 단층 목조로 된 한옥의 건축구조와 독특한 난방형식인 온돌, 평좌식 생활습속 등은 주변국 문화와의 상호 긴밀한 영향관계 속에서도 뚜렷한 가구양식을 성립시켰다. 침대 대신 온돌과 판방(板房)을 갖추어 놓고 온기와 냉기의 장점을 계절에 따라 즐겼던 점이라든지 평좌의 위치에서 쓰고 바라보기 편한 나지막한 비례의 창출,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장기능의 발달, 남녀용 가구의 뚜렷한 차별화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목재를 주재료로 썼기 때문에 보존의 어려움으로 인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전래유물이 희박하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에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가구'라는 용어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며 본래는 '세간' 또는 '세간살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세간은 집안살림에 쓰이는 각종 기물을 뜻하며 넓게는 한 집안의 재물을 모두 포함해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 가구는 보통 실내에 놓이는 책상·의자·장·농·침대 등에 국한되고 있는데, 이것은 서양의 가구개념에 따른 것이다.
선사시대의 경우 제작용 도구 등 주변자료를 통해 가구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청동기시대에도 유물과 거푸집을 통해 확인된 바 있으며 특히 철기시대에는 목조 가옥구조의 정착과 더불어 벌목용 도끼가 발달했음을 감안할 때 일반 수장용 가구의 존재를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최근 다호리(茶戶里)에서 출토된 대바구니는 당시의 가구형식을 뒷받침해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왕실 등 지배계층에서 의자와 탁자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면서 보다 다양한 가구가 제작되었으며, 때로는 특수계층의 신분적 위계를 상징하는 기능을 갖기도 했다.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의 후실 벽에 피장자와 2명의 부인이 마족형의 의자에 걸터 앉아 있고, 그옆에 차탁과 음식이 진열된 식탁 등이 그려져 실내가구의 형식을 보여준다.
백제에서도 중앙관서 직제인 내관(內官)에 목부(木部)가 있었고, 무녕왕릉에서 금은장식의 칠관(漆棺)이 발견된 바 있다. 신라의 중앙관저 가운데 가구제작과 관련이 있는 궤개전(机槪典)·마전(磨典)·칠전(漆典)·양전(楊典)의 존재와 고분출토품인 느티나무궤, 목제말안장, 각종 칠기는 일상적인 가구의 제작과 형식을 짐작케 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나전칠기 기술을 바탕으로 귀족사회에 어울리는 정교한 가구들이 제작되었다. 현재 전하는 나전경함(螺鈿經函)·염주합·모자합(母子盒)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제품은 고려 나전칠기 제작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한 중국 왕실의 요청에 부응키 위해 임시로 설치했던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의 제작품들과 함께 고려시대 가구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조선시대 가구는 쓰임새는 물론 조형미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고유성을 갖춘 가구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엄격한 남녀유별의 유풍과 청렴·검소하면서도 격조있는 삶을 추구했던 당시의 숭문적(崇文的) 분위기가 가구양식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 전용 공간인 사랑방과 여성 중심의 공간인 안방 및 부엌에 놓인 가구는 종류와 쓰임새는 물론 조형 및 격조면에서도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사랑방 가구는 별도의 장식이 없이 나뭇결을 살린 간결한 구조를 통해 쾌적한 비례와 함께 수준높은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선비들의 수신과 교양, 친교의 공간이었던 사랑채의 분위기에 걸맞게 제작되었다.
책상·경상·문갑·사방탁자·의걸이·연상 등은 사랑방 가구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반면 은밀하고 폐쇄적인 특성과 의식주 생활의 중심 및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내실의 기능을 담당했던 안방의 가구는 나전이나 화각으로 십장생·문자·천도복숭아·구봉(九鳳) 등 길상적 의미를 띤 문양을 화려하게 시문함으로써 여성적 취향을 보여준다. 전통 수장가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장·농과 여성적인 맵시를 가꾸기 위한 경대·빗접·반짇고리 등은 안방가구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밖에 찬장·뒤주·소반 등 주방가구도 여성 공간의 연장으로서 기능성이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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