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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19. 8. 29, 프랑스 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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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83. 9. 6,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 시대의 재무장관(1665~)·해군장관(1668~).
개요
그가 실행한 경제 재건 계획은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젊은시절
콜베르는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양한 행정직을 거친 뒤, 1651년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국왕과 프랑스 고등법원의 반궁정파가 싸운 프롱드의 난(1648~53) 때, 파리 군중이 프랑스의 유력한 정치가이자 궁정파인 마자랭 추기경의 저택 유리창을 돌로 깬 사건이 일어나자, 1651년 마자랭은 파리를 떠나 지방 도시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에 남은 콜베르는 마자랭의 대리인이 되어 그에게 파리 소식을 전해 주고 개인적인 일을 돌보아주었다. 마자랭은 다시 권력을 잡은 뒤 콜베르를 개인 비서로 임명하고, 그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이익이 많이 남는 관직을 사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콜베르는 부자가 되었고, 세녤레 남작령도 취득했다. 마자랭은 임종하면서 루이 14세에게 콜베르를 추전했고, 루이 14세는 곧 콜베르를 신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콜베르는 왕의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라 프랑스 왕국의 행정 전반에 걸쳐 국왕에게 봉사하는 데 비상한 업무능력을 발휘했다.
푸케와의 투쟁
25년 동안 콜베르는 프랑스 경제 재건에 관여하게 되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의 지휘 밑에서 혼란에 빠져 있던 재무 행정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콜베르는 푸케의 회계 장부에 나타난 부정 행위를 폭로하고, 푸케가 회계 조작을 통해 사복을 채웠다고 비난함으로써 푸케에 대한 왕의 신임을 무너뜨렸다. 푸케가 보르비콩트에 있는 호화로운 성으로 왕을 영접했을 때,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푸케는 왕을 위해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가 국고를 빼돌려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는가를 보여주는 그 사치스러운 잔칫상을 받고 루이는 격분했다.
그후 왕은 푸케를 체포하게 했다. 그에 대한 형사 소송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대중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콜베르는 이 사건에서 공정한 입장에 있지 않았지만 푸케의 뒤를 이어 재무장관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재판에 개입해 그것을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만들었다. 재판 자체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푸케는 감옥으로 보내졌고 생애 마지막 1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재무장관 직은 새로 설치된 재정위원회가 대신하게 되었다. 콜베르는 1665년에 재무장관이 될 때까지 앵탕당이라는 직함을 갖고 재정위원회에서 가장 유력한 위원으로 일했다.
금융업자와 세금 징수권 보유자들은 국고에 돈을 빌려주거나 세금을 선불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콜베르는 그들이 이익 일부를 반환하도록 하는 재결기관을 설치했다. 여론은 이를 환영하고 재정 곤란은 모두 금융업자들 탓이라고 주장했다. 이 조치는 또한 공공 부채도 줄여주었다. 정부 공채 가운데 일부는 지불을 거부하고, 나머지는 이자 없이 원금만 상환하자 공공 부채는 더욱 줄어들었다.
사유 재산은 손해를 보았지만 어떤 소요도 일어나지 않았고 왕은 다시 신용을 얻었다.
재정 및 경제 문제
이어서 콜베르는 중세의 유산인 혼란스러운 과세 제도를 개혁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왕은 수입의 대부분을 인두세에서 얻었는데, 이 세금은 일부 지역에서는 개인에게 부과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땅과 사업체에 부과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왕의 관리들이 인두세를 할당하고 징수했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 지방의 대표자들이 투표로 결정했다. 성직자와 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인두세를 면제받았다. 콜베르는 당연히 인두세를 낼 의무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허위로 인두세를 면제받을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해 귀족 칭호를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세금을 좀더 공정하게 분배해 납세자의 부담을 줄이려고 애썼다. 그는 세금 총액을 줄이는 대신 합당한 기간 이내에 세금을 완납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세금 징수와 관련한 많은 악폐(세금 미납자의 재산 몰수, 농민의 가축이나 이부자리의 압류, 일정한 기간 내에 충분한 액수의 세금을 거두지 못한 징세관들의 투옥 등)를 폐지하려고 애썼다. 이런 개혁과 관련 공무원들에 대한 면밀한 감독을 통하여 많은 액수의 돈이 국고로 들어왔다.
그밖의 세금은 늘어났고 1664년에는 관세제도가 보호무역제도의 일부로 개정되었다. 여러 지방에 존재하던 특별 세금은 근절되지 않았지만 프랑스 중부 지역에서는 상당히 획일적인 과세 제도가 이루어졌다.
콜베르는 산업과 상업을 재건하는 일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의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프랑스가 국제 무역에서 차지하는 몫을 늘려야 하고, 특히 상업에서 네덜란드의 주도권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해외에서 외국 상품과 경쟁할 수 있는 품질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상품을 운반할 상선도 만들어야 했다.
콜베르는 외국 노동자들이 그들의 전문 기술을 프랑스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장려했다. 그는 수많은 민간 산업에 특권을 부여했고, 국영공장을 세웠다. 상품의 품질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제품에 대한 품질 규정을 만들었으며, 위조품이나 결함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칙(벌금과 형틀)을 부과했다. 그는 조선소 설립을 장려했고, 무역 회사를 세워 프랑스의 해외 무역을 독점하려고 애썼다. 1664년에 설립된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에 이어, 지중해 동부와 유럽 북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 회사들이 잇달아 설립되었다.
콜베르는 이들 무역회사를 교묘하게 선전했지만 충분한 자본을 끌어들이지는 못했고, 무역회사들의 존재는 불안정했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외국 상품에 관세를 부과해야 했고, 그러자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 상품에 관세를 매겨 여기에 대응했다. 이 관세 전쟁은 1672~78년의 네덜란드 전쟁을 초래한 주요원인 가운데 하나였다(중상주의).
콜베르의 통제 경제 체제는 무역업자들과 계약자들의 원한을 샀다.
이들은 행동의 자유를 지키고, 자기 자신한테만 책임을 지고 싶어했다. 게다가 신중하고 알뜰한 사람들은 산업에 투자하기보다는 여전히 옛날과 같은 투자 수단(토지·연금·고리대금)을 더 선호했다. 이 시기는 또한 전세계적으로 물가가 대체로 내림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따라서 콜베르의 성공은 그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을 고려하면 많은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제조업자들의 생산량을 늘리고, 무역을 확대했으며, 항구적인 산업을 새로이 확립하고, 프랑스를 관통하는 철도와 수로(미디 운하, 1666~81)로 교통을 발전시켰다.
콜베르와 해군
재무장관의 활동 영역은 계속 넓어졌다.
그는 재정 문제에서 국왕의 사생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1668년부터 해군장관을 겸하게 된 그는 프랑스를 해양 강국으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이것은 전함을 만들고, 왕의 배를 만들어 필요한 설비를 갖추고, 항구를 요새화하고, 상선을 장려하는 것을 의미했다. 대서양 함대는 범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지중해 함대는 노를 젓는 갤리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서양 함대에 인원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직업 선원들과 고용 계약을 맺어야 했다.
갤리선에 필요한 인원을 확보하기 위해 콜베르는 하급 판사들을 부추겨 상습 범죄자들에게 갤리선 근무를 선고하도록 했고, 그밖의 인력 자원(정치범, 신교도, 아프리카나 캐나다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프랑스 해군).
콜베르는 툴롱의 조선소와 무기고를 재건했고, 로슈포르에 항구와 무기고를 세웠으며, 로슈포르와 디에프 및 생말로에 해군 학교를 세웠다.
칼레·됭케르크·브레스트 및 르아브르는 요새화했다. 군함 건조의 필요성은 왕실 영지 가운데 가장 잘못 관리되고 있는 숲에 대해 콜베르가 지나칠 만큼 신경을 쓰고 경계한 이유를 설명해준다(수자원 및 임야 보전법, 1669). 그는 프랑스 군함이 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도록 피에르 퓌제 같은 뛰어난 예술가를 고용해 군함을 장식하게 했다. 또한 국내에서 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장려금을 주고 해외에서 배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부과해 상선 건조도 장려했다.
프랑스 숙련공의 해외 이주가 금지되었으므로, 프랑스 선원도 외국인에게 봉사하면 죽음을 당했다.
예술에 대한 후원
1669년에 왕은 콜베르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해 프랑스의 예술 및 지적 생활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콜베르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었다.
그는 예술에도 프랑스의 힘과 명성을 높인다는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다. 프랑스 학술원 회원인 콜베르는 왕의 승리를 기념하는 훈장과 기념비에 새길 명문을 선정하기 위해서 '금석학 및 문학 아카데미'를 창설했고(1663), 프랑스 왕국을 위해 과학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과학 아카데미를 창설했으며(1666), 프랑스 건축 작품의 취향을 세련되게 하고 규칙을 정하기 위해서 왕립건축 아카데미를 창설했다(1671)(에콜데보자르). 그는 또한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처럼 예술가들이 당대의 거장들 밑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학교들을 세웠고, '언어 학교'처럼 동양 언어들을 공부하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진 학교도 세웠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조반니 카시니가 책임을 맡은 파리 천문대는 루이 14세가 콜베르의 부추김을 받고 세운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건축가인 G. L. 베르니니는 루브르 궁전 설계도를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이 설계도에 따라 건물을 지으려면 너무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 건축가들이 제출한 설계도가 채택되었다.
그밖의 활동
콜베르는 뉴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캐나다 이민을 장려했다.
그는 많은 문제에 대한 법률 제정을 촉진했는데, 1670년에 제정된 형법과 상법, 노예 노동에 관한 이른바 '흑인법' 등이다. 콜베르는 또한 농업에서는 전반적인 경제 체제에 모순되지 않는 한 농민을 보호하려고 애썼으며, 말과 양의 품종을 개량하고 새로운 농작물을 장려하고자 했다. 그는 경제 발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탄압 조치에 반대했고, 상업에 종사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성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수도승과 세속 성직자를 불신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끝까지 독실한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었다.
말년
말년에 콜베르는 실의에 빠졌다.
그가 광범위한 개혁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일련의 전쟁에 말려들었고, 국가 세입의 많은 부분이 전쟁 비용으로 소모되었다. 그래도 콜베르는 여론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당시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을 강력하게 적용해 군주제를 더욱 강화하고 나라에 필요한 설비를 마련했다. 그가 공공 행정에 도입한 질서는 후세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콜베르의 맏아들인 세녤레 후작 장 바티스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군 담당 국무장관이 될 권리를 인정받았다.
둘째 아들 자크 니콜라는 루앙 대주교였다. 넷째 아들인 오르무아 후작 쥘 아르망은 건설장관이었고, 세 딸은 공작과 결혼해 공작 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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