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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98. 1,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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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66. 9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건축가.
Mansard라고도 씀.
개요
17세기 중엽 바로크 건축이 성행하던 때 고전주의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가 설계한 건물들은 섬세함·우아함과 훌륭한 조화로 유명하다.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는 건물은 메종 성이 있다.
초기생애와 작품
그의 할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아버지는 목공 명인이었다.
삼촌 1명은 조각가였으며 또 1명은 건축가였다. 1610년 아버지가 죽자 망사르는 건축가이며 조각가인 매부 밑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뒤 앙리 4세 때와 루이 13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기에 성공을 거둔 뛰어난 건축가 살로몽 드 브로스 밑에서 도제(徒弟)로 지내며 큰 영향을 받았다. 1600년대는 브로스 시대의 종말이자 망사르 시대의 시작이었으며, 이 시기에 젊은 건축가 망사르는 더없는 찬사를 받았다. 1594년 프랑스의 왕이 된 앙리 4세의 파리 입성은, 정치적·사회적 열망의 한 시기가 싹트기 시작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왕들은 왕권을 과시하는 수도와 궁전을 짓고 싶어했기 때문에 건축이 이같은 정치적·사회적 열망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부르주아들은 대형 마차와 말을 매놓을 마굿간과 하인들의 숙소를 갖출 만큼 크고, 왕과 수행원들을 접대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한 시골 성이나 도시의 대저택의 건축을 의뢰했다.
망사르의 고객들 대부분은 궁정에서 일하면서 부자가 된 중산계층이었다.
사실 그들이 망사르에게 건축을 맡길 정도라면 매우 부자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비용에 신경쓰지 않고 설계도면을 작성했을 뿐 아니라 이를 실행하면서도 이미 지은 것을 부수고 다시 짓는 등 계획안을 다듬고 개량했다. 실제로 초기의 한 고객은 그에게 '투르크 황제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고 한다. 망사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때는 1623년 파리 생오노레가(街)에 푀양 수도회 교회(지금은 없음)의 예배당 정면을 설계하면서부터였다.
단 하나 남아 있는 초기작품은 칼바도스 주 바이외 근처의 발르루아 성(1626경 착공)이다. 이 성은 루이 13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公)이자 가스통의 비서였던 장 드 슈아지를 위해 지은 것으로, 육중한 주(主)건물 1채와 여기에 부속된 작은 건물 2채 등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건물의 한쪽 정면은 광장 쪽으로 향해 있고, 다른 쪽 정면은 정원 쪽으로 나 있다.
벽에 쓰인 재료와 그 처리는 앙리 4세 때 건물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벽은 건축적인 장식이라고는 거의 없는 거칠고 갈색을 띤 노란 벽돌을 주로 썼으나 모서리는 흰 코인(귀돌)과 흰 석조 창틀로 강조했다. 1635년 가스통은 블루아에 있는 그의 성을 개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성은 15~16세기에 지어져 3명의 왕이 살던 곳이다. 망사르는 완전히 새로 짓자고 제안했지만, 결국은 정원을 향한 북쪽 날개 부분만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양쪽에 부속건물이 붙은 주건물에는 고전적인 기둥(오더)을 덧붙였는데, 지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 오더로 섬세하게 층을 나누었다. 주건물로 들어가는 광장 입구는 둥글게 열주를 따라 양쪽에서 접근하도록 되어 있다. 그는 지붕면이 꺾이어 상하 물매가 다른 급한 지붕을 사용했다.
사실 이 지붕 형태는 일찍부터 프랑스 건축가들이 사용해왔으나 망사르의 이름을 따 맨사드 지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건물은 세세한 부분까지 정교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매스(mass)의 비례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궁정 관리인 펠리포 드 라 브릴리에르에게서 파리에 저택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 저택은 망사르가 죽은 뒤 재건되었지만 판화로 알 수 있는 원래 모습은 다루기 곤란한 형태의 부지에서 부딪히는 건축 디자인상의 문제들을 섬세하고 정교하며 위엄있게 해결한 그의 재능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메종 성
1642년 아주 부유한 재정가이자 왕실 재무관리자였던 르네 드 롱괴유가 자신의 영지에 성을 지어달라고 위탁했다.
이블린 주 중심 도시에 있으며 지금은 메종라피트라 부르는 이 성은 그의 내부 장식이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란 점에서 독특하며 특히 웅장한 계단이 아름답다. 맨사드 지붕을 비롯해 건물 전체가 대칭으로 설계된 이 성은 초기 성의 디자인과 비슷하지만 양각에 더욱 강조점을 두고 있다. 중심 건물은 1채로 되어 있으며 벽면에 몇 단의 얕은 계단형으로 돌출한 직4각형 입구가 있다. 주건물 좌우에 맞붙은 2개의 낮은 날개부 건물은 주건물보다 튀어나와 깔끔하고 완벽한 직4각형을 이루고 있다.
양 날개부에서는 낮은 1층 건물이 뻗어 있다. 세밀하게 직4각형 모티프들을 다르게 구분한 절제된 솜씨는 우아함과 조화를 더하고 있다.
오늘날 이 성은 도로와 주택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 옛날 오스트리아의 안네와 그 아들 소년왕 루이 14세를 위한 환영회를 열며 성을 개방했을 때, 망사르가 특별히 설계한 계단식 정원 속에서 이 성이 얼마나 훌륭하게 보였을지는 오로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 성을 짓는 과정에서 드 롱괴유는 때때로 완고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대체로 까다로운 망사르의 성격 때문에 몹시 괴로움을 겪었겠지만 이날은 자신이 선택한 건축가에게 만족했음이 분명하다.
만년
망사르는 아마도 자신의 성품 때문에 좌절을 겪게 된 듯하다.
그가 처음 겪었던 좌절은 1645년 왕실의 의뢰를 받았지만 1646년에 이 일을 놓쳐버린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안네는 파리에 지을 수도회건물 계획과 발드그라스 교회 계획을 입안하도록 요청했다. 발드그라스 교회는 안네가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짓겠다고 왕이 직접 맹세했던 건물이었다. 기초를 쌓는 데 든 비용이 준비된 자금을 초과하자 그는 쫓겨났고 대신 자크 르메르시에가 그의 뒤를 이어 원래 계획안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망사르가 큰 명성을 얻음과 동시에 자신의 계획안을 지었다가 허물고 다시 짓는 변덕스럽고 낭비가 심하며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적'들도 늘어갔다.
망사르에게 일을 맡겼던 총리 마자랭 추기경의 정적(政敵)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라 망사라드 La Mansarade〉(1651)라는 제목의 소책자는 그가 도급업자들을 상대로 부정한 거래를 했으며 품행이 나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같은 공격에도 망사르는 계속 저명한 사람들에게서 위탁받아 작업했다.
1661년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개인고객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많은 건축가·화가·조각가·장인(匠人) 들이 왕이 의뢰한 건물들을 짓고, 장식하고 가구를 꾸미기 위해 초청되었다. 1664년 루이 14세가 루브르 궁전을 완성하기로 결정하자 총리이자 건설감독관인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망사르에게 열주(列柱 colonnade)가 있는 동쪽 날개부분을 계획하도록 요청했다. 아마 망사르는 어떤 최종안을 만들어내지도, 고수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이 일을 놓쳐버린 것 같다. 1665년 콜베르는 다시 망사르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이번에는 생드니 바실리카의 한쪽 끝에다 부르봉 왕가의 묘로 쓸 예배당을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돔을 올린 공간을 중심으로 설계했지만 실제로 짓지는 못했으며, 훗날 종손 쥘 아르두앵 망사르가 앵발리드 기념관 부속예배당의 돔을 설계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망사르가 죽었을 때 세상은 그가 설계활동을 시작하던 당시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이 되었으며, 루이 14세는 정치에서는 물론 문화·취미에서도 프랑스의 중심이 되었다. 프랑스의 건축가·예술가·장인 들은 1가지 목적, 즉 '짐이 곧 국가'라고 천명했던 왕 개인 속에 있는 국가의 영광을 위해 왕에 의해 양성되고 고용되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망사르의 독자적이며 개인주의적 천재성이 깃든 작품으로 세상이 풍부해졌다는 의미에서도 세상은 달라졌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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