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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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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3년 만주에서 발족한 독립운동 단체.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주만참의부라고도 부른다. 중앙에 중앙의회를 두고 군사와 민정을 통괄하며 13개 지방행정구와 5개 무장중대로 구성되었다. 참의부는 항일전쟁과 국내진공작전을 활발하게 펼쳤는데 작전의 대부분이 20~30명을 단위로 한 게릴라전이었다. 500~600명 이상의 병력을 계속 유지했으며 전투력도 상승했다. 관할 지역 내에서 병역의무제와 재향군인단을 통한 군사훈련, 황푸군관학교 및 모스크바 국제사관학교 출신의 한인장교들의 전술 지도 등이 전투력 증대요인이었다. 1923~25년 50회 이상의 항일전·국내진공작전으로 가장 눈부신 군사활동을 전개했고, 1929년 지도자 김소하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

참의부(參議府)

참의부 무장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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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라고도 한다.

군사·민정을 통괄하는 기관으로서, 만주라는 유리한 근거지와 한인동포들의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했다.

창립 배경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전쟁론에 기반을 둔 만주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지방별로 강력한 지도통제력을 갖춘 항일무장단체를 만들었는데, 간도 일대에만 50여 개 단체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은 각 지방의 자생적인 조직체였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군영으로 조직되지 못했다. 반면 일제는 독립군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만주출병을 감행하여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는 무차별 살육·약탈을 자행했다. 또한 중국 동북군벌들에게 압력을 넣어 독립군 근거지를 박탈하도록 하여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조직과 기반을 잃고 분산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1922년 6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은 통합군사조직체로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했다. 같은 해 8월 통군부 참가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열고 새로운 통합운동단체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통합군대로 대한통의부의용군(大韓統義府義勇軍)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듬해 내부의 복벽파와 공화파 간의 갈등으로 의군부·통의부로 다시 분열되었고, 그 과정에서 통의부의용군 제1·2·3·5중대가 항일통일전선 결성을 목적으로 독자적 행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강력한 무장투쟁 전개를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군정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조능식(趙能植)·백광운(白狂雲) 등을 상해임시정부로 파견, 임시정부 직할군단을 설치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김승학(金承學)·이유필(李裕弼)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새로운 군정부 창립에 협력하게 했다.

창립과 조직

1923년 8월 만주의 지안[輯安]·푸쑹[撫松]·안투[安圖]·퉁화[通化]·류화[柳化]·창바이[長白] 지역을 관할로 하여 새로운 군정부인 참의부가 창립되었다.

참의부는 중앙에 중앙의회를 두고 군사와 민정을 통괄하며 13개 지방행정구와 5개 무장중대로 구성되었다. 간부진은 참의장 겸 1중대장 백광운, 중앙의회의장 백시관(白時觀)을 비롯하여, 최석순(崔碩淳)·최지풍(崔志豊)·김창빈(金昌彬)·김창천(金蒼天)·허운기(許雲起)·박응백(朴應伯)·김소하(金篠厦) 등이었다.

1924년 백광운이 통의부 대원들에게 살해되자, 최석순을 참의장으로 하고 김선풍(金旋風)·김우근(金宇根) 등을 간부로 참여시켜 재정비했다. 이후 1925년 고마령(古馬嶺)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많은 간부가 전사하자, 1926년 봄 윤세용(尹世茸)을 참의장으로 선임하고 이관진(李觀鎭)·계담(桂擔)·이춘(李春)·김우일(金又一)·송남형(宋南亨)·김학봉(金學鳳) 등으로 새 간부진을 구성했다. 다음해 윤세용이 사임하자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김승학을 참의장으로 선임하고, 마덕창(馬德昌)·김소하·계담·양기하(梁基瑕)·백시관 등을 주요간부로 조직을 개편했다.

1928년 4월 참의장 밑에 군사·외교·조직·선전·재무·민사·교통·법무 등 8부서와 비서장을 두었다. 민사 담당의 중앙의회는 의장 밑에 7개 행정구와 각 구당 3명의 위원을 두었으며, 군사조직은 5개 중대와 중앙호위대로 구성되었다.

군사활동

참의부는 한만국경지대에 가까워 만주의 독립군정부 중 가장 활발한 항일전쟁과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는데, 작전의 대부분은 20~30명을 단위로 한 게릴라전이었다.

창립 때의 500명의 병력에서 1928년까지 600명 이상의 병력을 계속 유지했는데, 관할 지역 내에서 병역의무제와 재향군인단을 통한 군사훈련,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및 모스크바 국제사관학교 출신의 한인장교들의 전술 지도 등이 전투력 증대요인이었다. 1923~25년 50회 이상의 항일전·국내진공작전으로 가장 눈부신 군사활동을 전개했고, 특히 1924년 5월 19일 장창헌(張昌憲)·한웅권(韓雄權)·이춘화(李春化) 등 8명의 대원은 평안북도 위원군 마시탄(馬嘶灘)에서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 일행을 기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5년 3월 평안북도 초산의 일제기관 기습공격 후 고마령에서 작전회의를 하던 중 일본 군경 120명의 기습을 받아 최석순 등 29명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었다. 이후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계기로 일제 및 동북군벌의 탄압이 가중되고 일부 간부들이 변절하여 전력이 약화되었다. 1928년 12월 신민부(新民府)·정의부(正義府)와의 3부통합문제로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김동삼(金東三)·김상덕(金尙德) 계열의 부분 통합체인 혁신의회(革新議會)에 김승학이 참여하면서 일방적으로 참의부의 해체를 선언하자, 심용준(沈龍俊) 등은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함으로써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1929년 10월 참의부고수세력의 지도자 김소하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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