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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응백

다른 표기 언어 朴應伯
요약 테이블
출생 ?, 평북 삭주
사망 1927
국적 한국

요약 독립운동가.

3·1운동 후 항일무장단체를 조직해 활동한 후 광복군총영에서 활약했고 참의부 사령관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최시흥(崔時興)·최천주(崔天柱)·최지풍(崔志豊)·김세진(金世鎭)·심용준(沈龍俊)·양봉제(梁鳳濟) 등과 함께 평안북도 의주·귀성·삭주의 삼군(三郡)에 걸쳐 있는 천마산을 본거지로 항일단체인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조직했다. 최시흥 휘하에서 참모로 활동하면서 인근 각지에서 청년 500여 명을 모집했다.

천마산대는 남만(南滿)에 있는 여러 단체와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남만의 광복군총영과 합작해 천마산 별영(別營)으로 활약했다. 1921년 만주로 가서 광복군총영의 소대장으로 일하면서 친일파를 습격했다. 1922년 광복군총영을 비롯한 팔단구회가 통합해 조직한 대한통의부의 제3중대 간부로 활약했다.

이후 대한통의부가 분열되어 의군부(義軍府)가 분립되면서 두 단체간의 알력이 심해지자, 1924년 8월 김원상(金元常)·오두영(吳斗泳)·조능도(趙能道) 등과 함께 통의부 대표로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전 광복군사령부의 계통을 이어받아 임시정부하에 군단을 설치할 것을 요청했다. 임시정부에서는 남만에 육군주만참의부를 두어 군민양정을 총괄하게 하고 공채증권 10만 원분을 주었다.

1924년 참의부에서 훈련대장과 3중대 대장을 겸했고, 1925년 8월 참의부 제1회 행정회의에서 훈련위원 겸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9년 국내로 출동했다가 삭주군 경계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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