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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국 남북전쟁 및 그 이후의 기간(1865~77).
전쟁발발중이나 그 직전에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연합 11개주(州)의 연방 재편입에 따르는 정치·사회·경제 문제의 해결을 모색했던 시기이다(미국 남부).
1862년에 이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테네시·노스캐롤라이나 등지에 임시 군정(軍政) 주지사를 임명했다.
이듬해 북군이 막 점령한 주(州) 가운데 유권자의 10% 이상이 규정된 충성서약을 한 곳에 주정부를 재수립하는 첫 조치가 취해졌다. 대통령의 계획에 사회적·경제적 재건을 위한 조항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의회 내의 공화당 급진파는 행정부 단독으로 관대한 조치를 취하려는 데 분개했다. 그결과 1864년 좀더 엄격한 웨이드-데이비스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으나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링컨이 암살된(1865. 4) 뒤 그를 계승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링컨의 온건정책을 계승해 의회와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흑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는 수정헌법 제14조가 1866년 6월 의회에서 통과되고 남부 주 대부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비준되었다(1868. 7. 28). 반대세력에 대한 존슨의 강경한 태도와 남부에서의 몇몇 반동적인 사태(인종폭동, 흑인의 권리를 심하게 제한하는 인종차별적인 흑인단속법 통과 등)에 반발한 북부는 1866년 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급진파에게 압승을 안겨주었다.
이 승리로 의회 재건(보통 급진적 재건이라 함)시대가 개막되어 1867년의 재건법을 시작으로 10년간 계속되었다. 이 법에 따라 남아 있던 남부 10개주(테네시는 1866년 연방에 재편입됨)는 5개 군정지구로 나뉘어 연방군 감독하에 1868~70년 모두 연방에 재편입되었다.
각 주는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수정헌법 제14조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이 헌법 수정안이 의회에서 통과된 후 재편입된 주는 해방노예의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정헌법 제15조를 받아들여야 했다. 신생 주 정부는 일반적으로 공화당 성향을 지니게 되었고 흑인, '카펫배거'(남부로 이주한 북부인)·'스캘러왜그'(흑인이나 이주자들에 동조한 남부인)로 구성된 정치연합의 지배를 받았다.
대부분의 남부 백인들은 이전의 남부연합 소속 주에 세워진 공화당 정부를 외부의 힘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생긴 것으로 간주했으며 남부의 보수세력들은 새로운 정부에 계속 적개심을 보였다. 남부인들은 특히 해방된 흑인들을 먹이고 보호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의회가 만든 해방흑인국(Freedmen's Bureau)의 활동에 불만을 가졌다.
이런 적개심으로 이들은 큐클럭스클랜(Ku Klux Klan/KKK)이나 백동백기사단(Knights of the White Camelia) 같은 비밀 테러단을 조직했다. 남부 보수주의자들은 협잡·폭력·협박을 동원해 주 정부를 재장악했으며 1877년 연방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할 무렵에는 각 주에서 민주당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1900년경 미국의 많은 역사가들은 흑인의 인종적 열등성에 관한 이론을 지지했다.
동시에 재건정부를 북부인의 복수심과 정치적·경제적 지배욕에서 비롯한 타락의 구렁텅이로 보았다. 그러나 후일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그당시 전국 각지에 공적·사적 부정이 만연하기는 했지만 이 기간에 많은 건설적 개혁이 남부에 도입되었음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법원이 재정비되고, 사법절차가 개선되었으며, 공립학교 체제가 확립되었고, 좀더 현실적인 과세방법이 창안되었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직후 채택된 주헌법의 많은 조항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재건의 경험은 파벌간의 반감을 고조시키고, 인종 문제를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남부에서 1당 정치가 커나가도록 만들었다. 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재건이 실패한 가장 근본적 원인은 흑인 시민들이 새로이 획득한 정치적 권리를 유지하는 데 경제적 기반이 되는 토지분배가 남부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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