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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과 반란(1857~59)
영국의 인도 지배가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도 이와 비례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색인:인도반란). 우선 종래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왕가(王家)나 지방 세력가들의 불만이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식 합리주의의 도입은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생활양식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몰아붙여 인도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인도 사회 전반에 스며든 반영(反英) 분위기는 자연 발생적으로 다양한 성격의 폭동이나 반란을 야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185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횟수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커다란 파국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 드디어 불을 당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용병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평소 민족적 자존심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대우 문제 등을 둘러싸고 영국인과 충돌이 잦았었다. 1857년 5월 마침내 메루트의 세포이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의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델리로 진격했다.
델리에서는 성 안의 세포이와 시민이 성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함으로써 순식간에 반란군은 이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그들은 명목뿐이던 무굴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그의 통치 부활을 안팎에 선언했으며, 그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반란 동참을 호소했다. 이렇게 하여 델리에서 독립의 횃불이 솟아오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란은 인도의 전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반란은 단순한 세포이의 폭동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농민과 일반 시민 등 전사회계층이 참여하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오우드의 러크나우와 칸푸르가 그 중심지였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반란은 북부·중부 인도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러 지역으로 비화되어, 영국의 인도 지배는 바야흐로 붕괴에 직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란군측에도 많은 약점이 있었다.
우선 반란군은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고, 효과적인 전략이나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단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불만과 분노 때문에 모여든 감정적 집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속시킬 만한 지도력이나 서로간의 유대감도 희박했었다. 이에 반해 영국측은 1857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낭패감에서 벗어나 전력을 재정비하고, 이들을 진압할 구체적 행동에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은 곧 전투의 주도권을 영국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고, 9월에 들어 델리를 다시 빼앗겼다.
이때 자행된 영국군의 파괴와 학살 행위는 그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델리에 이어 영국군은 칸푸르를 함락시켰고, 얼마 동안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네팔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반면 반란군측은 차츰 내부 분열에 휩싸여 내적 통일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1858년 3월 캠벨이 지휘하는 7만명의 영국·네팔 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격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란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러크나우마저 함락되었다.
이 반란은 식민지 지배에 의해 초래된 많은 문제점들이 이른바 연쇄반응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방향을 상실했고, 시대착오적인 왕정복고를 꿈꾼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적어도 식민지 지배에 대항할 민족주의적 반항의 씨앗이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이 사건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이른바 '인도 통치법'(1858. 8)이 발효되었다. 일종의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법의 시행에 따라 인도인들도 관공서의 주요직책을 맡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또한 인도의 전통적인 제도나 관습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그간 악명을 떨치던 동인도회사가 문을 닫았고, 영국 국왕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내각에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이 새로 임명되었고, 그 하부기관으로 15명으로 이루어진 인도 참사회가 구성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대두
영국인들의 지배가 확대되고 견고해질수록, 다른 한편으로 인도인들의 민족의식도 깨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인들의 국정 참여 범위를 확대시켜달라는 정도의 소박한 요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종교와 사회 전반의 개혁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최초의 종교·사회 개혁 운동은 벵골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브라마 사마지(Brahmo Samaj)이다. 일종의 종교적 결사체인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람모한 로이이다. 그는 벵골의 비슈누파 브라만가에서 태어난 정통 힌두교도였으나 이슬람 및 서구 사상도 공부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에 일신교적 색채를 부여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힌두교도의 전통적 관습 및 종교의례 등에 대해서도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유아혼(幼兒婚)의 폐지와 교육의 기회 균등, 이혼의 자유, 과부의 지위 개선 등 불합리한 사회제도 및 관습 전반에 대해 비판하고 나아가 철폐를 요구했다. 이와 함께 그는 카스트 제도의 철폐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브라마 사마지는 이후 데벤드라나트 타고르(1817~1905)와 케샤브 찬드라 센(1838~84) 등을 지도자로 받아들여 교육의 기회 개방, 병원 등 후생시설의 건립 및 그밖의 사회봉사 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 활동은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정도이다. 이와 유사한 사회 개혁단체로 구자라트 출신의 다야난다 사라스바티(1824~83)가 주도한 아리아 사마지(Arya Samaj)가 있다. 그는 브라마 사마지가 그리스도교적 영향을 받았던 데 비해 고유의 힌두교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인도인들의 종교 순화에 힘썼다.
아리아 사마지도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사회개혁, 특히 교육수준의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운동은 인도 고대문화에로의 복고적 성향 때문에 민족주의적 저항을 뒷받침하는 사상으로서 훗날 인도의 정치·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밖에도 같은 경향의 운동단체로서 베단타 철학을 기초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상을 접목한 라마크리슈나 선교회, 미국에서 설립되었으나 인도의 사회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지학협회 등이 있다.
이들의 개혁운동은 종교적 배경과 그 추구하는 이념이 같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모두 종래의 화석화된 힌두교 교의와 전근대적인 사회 관습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대부분 인도 고전사상의 재인식과 부활을 강조함으로써 인도의 일체화를 꿈꾸고 있던 도시의 중간계층이나 지식인들의 민족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점에서도 이들의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각성은 그뒤 마하트마 간디(1869~1948)를 그들의 민족지도자로 맞이하게 되면서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며 국부(國父)로 전세계적인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비폭력무저항주의(ahimsṃ)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혼란기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의 사상은 그 후계자인 네루의 평화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유럽열강들의 인도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사회의 전분야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특히 그후 인도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는 영국인들의 직접적·간접적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도인들의 언어나 생활관습의 변화까지도 초래할 만큼 본질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영국인들의 진출 거점이었던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봄베이(지금의 뭄바이)·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 등을 중심으로 영어를 배우고 서구식 사고를 겸비한 신중간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교육·종교·저널리즘 및 사상에 있어서도 영국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교 사상에도 접할 수 있었던 만큼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사회제도가 근대화되고 각종 관공서·재판소·학교 등이 생겨나면서 이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다시 말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현지 인도인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결과 변호사·의사·교사 등의 직업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 계층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사회조직의 최상층부는 영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종 특권과 사회적 혜택을 누렸다. 차츰 인도인들도 자신들의 한계와 민족적 일체감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민족운동의 저변에는 이러한 신교육세대 및 새로운 직업계층의 인도인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동류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이 신교육세대가 중심이 되어 훗날 반영 민족주의운동이 태동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또한 이들 중에서 장래의 인도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간디·네루 등의 예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받은 사회적·문화적인 영향이 적지 않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유문화와 사상을 간직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인도가 현대와 고대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인도인들의 가치관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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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영국의 지배와 인도사회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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