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영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협력하는 대가로 인도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으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자극받은 인도인들은 범국민적인 반영운동을 전개해나갔고, 그 선두에는 간디가 있었다. 영국제품 불매운동, 물레의 장려 등으로 상징되는 그의 무저항비폭력주의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인도인들은 하나로 뭉쳤다. 1947년 영국은 인도의 독립에 대해 제안했으나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 독립국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제외한 국민회의파 중심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수반은 네루가 맡았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들과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결국 1947년 인도에 2개의 공화국, 즉 인도공화국과 파키스탄 공화국이 동시에 탄생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에 협력하는 대가로 인도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자극받은 인도인들은 범국민적인 반영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선두에는 간디가 서 있었다. 영국제품 불매운동, 물레의 장려 등으로 상징되는 그의 무저항비폭력주의는 전인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인도인들은 조국애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색인:아힝사, 보이콧). 이러한 간디의 민족주의운동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영국은 강압정책을 병행하면서도 차츰 인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인도의 연방화를 논의한 원탁회의(1930~32)와 뒤이어 공표된 1935년법 등이다. 이 법은 전인도의 연방제 지방자치의 허용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연방제의 구상에 대해 인도 국민회의측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 이유는 시민적 자유와 각 지역을 대표할 책임정부 및 연방입법부의 선거방법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방적 영토 편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교와 국방에 대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실질적인 자치권의 확보와는 아직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법의 시행을 둘러싸고 인도 전역에서는 소요가 끊이지 않았고, 각 정파간에도 알력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내외적 여건은 인도의 독립에 밝은 빛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우선 영국의 정권 교체와 이에 따른 정책 변화를 들 수 있다. 영국은 1945년의 선거에서 보수당이 퇴진하고 노동당이 새로 정권을 잡았다. 노동당은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도의 독립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족주의운동 단체들이 인도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영국측에 더욱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인도의 독립을 점점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영국의 애틀리 정부는 1947년 2월, '1948년 6월 이전에 책임 있는 인도인 단체에게 권력을 이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 독립국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제외한 국민회의파 중심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수반은 네루가 맡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힌두교도들과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사상자도 7,000여 명에 달했다.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도에는 2개의 공화국, 즉 인도공화국과 파키스탄 공화국이 동시에 탄생하게 되었다. 비록 과도기적 임시정부 형태였지만 3년후인 1950년 인도는 완전 독립했다.
한편 파키스탄은 1956년 이슬람 공화국을 선언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두 나라는 민족적인 갈등과 종교문제로 끊임없는 분쟁에 휩싸여왔다.
1950년 1월 인도는 신헌법을 시행해 주권재민의 연방제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연이어 제1회 총선거가 소선거구제로 실시되어 국민회의파는 여당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굳혔다. 1951년 4월에는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어 토지개혁의 추진과 함께 공업화계획이 본격화되었다(→ 색인:산업화). 제1차 5개년계획은 농업 면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내정 면에서 주목받는 것은 1955년 1월에 시작된 국민회의파대회에서 인도가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사회주의형 사회'가 설정된 점이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엄밀히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사회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루 정권은 대외적으로 비동맹외교정책을 내걸었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평화5원칙을 고수했다. 1955년 4월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네루는 이집트의 나세르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지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1956)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언어별 주(州) 재편성의 도입(1956)으로 하나의 전기를 맞이했다. 인도가 많은 언어와 민족으로 구성된 이상 언어별 주행정구역의 확정은 인도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독립 인도의 정치사는 1957년 제2단계를 맞이했다.
즉 제2회 총선거로 신설된 게랄라 주에서 인도공산당이 제일당이 되어 몇몇의 다른 좌익정당과 연합해 주 정부를 장악한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좌익성향의 게랄라 주정부는 1959년에 대통령중심제가 도입될 때까지 정권을 유지했으며, 국민회의파 중앙정부가 내건 정책의 혁신적 부분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네루를 선두로 하는 국민회의파는 이 '좌익정권'의 타도에 전력을 기울였고 대외적으로도 티베트 문제에 대해 내정불간섭원칙을 버렸다. 1962년에 인도와 중국 국경에서 발생한 군인간 무력충돌 결과 인도군의 패배는 네루의 정치적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인도의 제2차 5개년계획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색인:중국-인도 국경분쟁). 1964년 네루의 사망은 인도의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7년 인도정치는 전독립 인도사에서 전환점을 맞이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해 제4회 총선거의 결과 종래의 연방과 여러 주를 장악한 국민회의파의 일원적 지배체제가 무너지면서 연방은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주는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전선정부가 서벵골과 게랄라의 두 주에서 정권을 장악했다. 또한 타밀나두 주에서는 드라비다 진보연맹이 국민회의파를 누르고 주정부를 장악했다. 이에 대해 인디라 간디 총리는 강권정치를 도입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자 모색했다. 즉 인권탄압과 주 자치의 핵심을 제거하는 것이 그녀의 기본전략이며 관리의 부정부패, 인플레이션, 생활불안이 만성화하는 가운데 1975~77년 비상사태선포를 강화해 인도의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977년 제6회 총선거 결과 독립 후 만년 여당이던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처음으로 패배하고 대신 자나타(인민)당이 정권을 잡았다. 자나타당에 거는 민중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자나타당은 비상사태 이전으로 정치를 되돌린다는 의지가 약했다.
자니타당은 애초부터 당내의 권력투쟁에 시간을 허비하며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침내 1978년 인디라 간디가 정계로 복귀했고, 1980년 제7회 총선거에서 재집권했다. 기적적으로 정계로 복귀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이전처럼 강권정치를 속행했다. 1980년대 펀자브 주의 시크교도는 일제히 국민회의파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운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녹색혁명의 모범적인 주로 간주된 펀자브 주가 농업 중심의 주로 고정되어 공업투자가 보류되자 시크교도들 사이에는 카스트 신분제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불만과 분노가 쌓여 있었다.
1984년 6월 시크교도 가운데 일부 과격파가 굳게 버티고 있는 시크교도 총본산에 대한 정부군의 무력진압은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 총리에는 그녀의 맏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취임했다. 국민회의파 정권은 외국자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내의 독점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계급을 기본적인 지지세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또다른 혁신정책이 마련되지 않아 이들은 국민회의파에서 유능한 인재가 배출되는 것을 견제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국민회의파가 펼친 정치적 현실이 인도의 모든 정치적 현실은 아니다. 1967년 이래 인도정치의 다원적 지도와 민주화의 진행은 서벵골 주에 나타난 바와 같이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전선정부의 지속적인 정치활동으로도 확인된다. 서벵골 주 민중의 생활향상과 민주화에 대한 확대된 요구는 인도정치에 발전과 활성화를 가져다준 계기가 되어 전인도인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89년에 네루 일가(인디라 간디와 그 아들 라지브 간디)의 권력독점을 종식시키고 출범한 비스와나스 싱 정권은 1990년 종교 분쟁과 계급갈등으로 인한 집권 국민전선의 붕괴로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의 지지로 셰카르가 정권을 승계했으나 1991년 3월 국민회의파의 간섭과 비협조를 이유로 사임했다. 그 결과 벤카타라만 대통령이 하원을 해산했고 같은 해 5월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총선의 선거 유세 과정에서 라지브 간디 전 총리가 남부에 갔다가 테러리스트의 총격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는 동정표가 급증하여 과반수 의석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제1당의 위치를 확보했고, 1991년 6월 21일 제9대 총리에 라오 국민회의파 총재가 취임했다(→ 색인:인도 국민회의당). 그러나 1992년 12월 6일 과격 힌두교도의 아요디아 시 소재 바브라 회교사원 파괴로 종교분쟁이 확산되었다.
이 분쟁으로 1,000여 명 이상이 사망하고 분쟁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인접 이슬람교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