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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팽창과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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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제국의 인도 진출(1498~1760경)

유럽은 인도에 대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유럽이 필요로 하는 향료와 직물 및 그외의 진기한 동양상품들이 인도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색인:국제무역). 즉 상업적 이익 때문에 인도는 유럽의 주요 관심대상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향료는 특히 중요한 상품이었다. 향료는 고기의 부패를 막아주는 작용이 있어, 육류를 즐기는 유럽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와 유럽 간의 무역은 중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2가지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몽골과 투르크의 침입으로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고 있던 육로가 차단되었고, 나아가 이집트를 통과하는 해로까지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당시의 국제적 긴장관계는 이슬람 세력의 타도를 위한 십자군의 원정과 향료를 독점하려는 상업적 열망을 더욱 부채질했고, 마침내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색인:탐험의 역사). 포르투갈인들은 월등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곧 아랍 상인들을 제압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

1524년 3차례에 걸쳐 인도로 항해한 포르투갈의 항해가

ⓒ Daniel VILLAFRUELA/wikipedia | Public Domain

그후 포르투갈의 천재적 영웅 아포노 알부케르케는 비자푸르의 술탄으로부터 인도의 서안지방인 고아를 탈취하여(1510) 이곳을 동방 포르투갈령의 수도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인도대륙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유럽 세력은 포르투갈인 셈이다. 하지만 얼마 뒤 포르투갈은 1세기 동안이나 대립관계에 있던 스페인에게 점령당함으로써(1580)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이어 인도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의 유럽 열강들이 차례로 인도에 들어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무역독점 경쟁에 나섰다.

특히 세계무역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각축전은 치열했다. 그러나 7년전쟁에서의 패배에 이어 카르나티크 전쟁(1744~48, 1750~54, 1758~63) 및 플라시 전쟁(1757)에서도 프랑스가 영국군에게 대패함으로써 제국간의 식민지쟁탈전에서 약자의 위치로 전락했다.

식민지 지배의 확대

카르나티크와 벵골의 지배권 확보에 성공한 영국은 이를 발판으로 점차 인도아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각 지역 세력집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남부인도의 마이소르는 인도의 장래에 미칠 영국의 위협을 누구보다도 일찍이 감지하고, 이에 대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꾀하는 한편, 국내외의 여러 나라와 연락을 취해 우방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내정개혁도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당시의 어수선한 인도 정치상황을 고려해볼 때 극히 이례적인 참신한 개혁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이소르의 노력도 주변 국가들의 외면과 영국군의 침입(1799)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은 하이데라바드와 마라타와의 동맹관계로 인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마이소르를 간단하게 격파해버렸던 것이다(→ 색인:마이소르 전쟁). 이때 그들의 영웅 티푸(1782~99 재위)도 세링가파탐 전투에서 진두 지휘를 하다가 전사했다.

마이소르 전쟁 (Mysore Wars)

4번째 마이소르 전쟁 후 영역 지도

ⓒ Miljoshi / wikipedia | 2.5 BY CC

전쟁 후 마이소르의 옛 영토는 대부분 영국과 하이데라바드 및 마라타에 분할 병합되었다. 이 보다 앞서 1798년에는 마라타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하이데라바드도 영국과 군사보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이 나라 또한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한편 북인도에서는 마라타 동맹과 시크 세력이 영국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인도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는 마라타의 위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헤이스팅스 (Warren Hastings)

영국의 초대 인도 총독

ⓒ Dcoetzee / wikipedia | Public Domain

우선 그는 오우드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 비대해진 마라타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의 이런 정책이 가시화된 것이 이른바 로힐라 전쟁(1774)이다. 1774년 영국군의 원조하에 오우드군은 로힐칸드를 무력 침공하여 이를 병합했다. 이를 계기로 오우드는 마라타와 영국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영국의 세력하에 놓였다.

영국이 오우드를 강화함과 동시에 이를 속국화하려 하고 있을 때, 마라타 동맹은 내부적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1772년 이후의 페슈와(Peshwa:총리) 계승문제를 둘러싼 내분은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비화되었고,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 등 외부세력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른바 제1차 마라타 전쟁(1775~82)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은 그 성격상 유럽 열강과 토착세력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시작되고 있던 마라타 동맹의 내분에 외국세력이 가세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호시탐탐 인도 국내문제에 개입할 빌미를 찾고 있던 영국측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영국은 전략 요충지 살세트 섬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라타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후에도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후계 문제를 둘러싼 각 세력집단간의 갈등으로 또다시 영국의 개입을 불러들였고(제2차 마라타 전쟁:1802~05), 마침내 1818년 마지막 남은 홀카르가도 영국과의 군사보호조약을 받아들임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사실상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인더스 강 유역의 카슈미르·펀자브·신드 등도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모두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신드 병합(1843. 8)이 이루어질 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독립국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던 시크 왕국도 란지트 싱의 죽음을 계기로 야기된 후계자 다툼의 와중에서 영국의 재물이 되었다. 1·2차 시크 전쟁(1845~46, 1848~49)에서 내부 분열 끝에 영국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인도의 거의 전지역이 영국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란지트 싱(Ranjit Singh)

펀자브의 시크교 왕국의 창설자

ⓒ Jivan Ram/wikipedia | Public Domain

18세기 중반부터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영국은 거대한 인도대륙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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