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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650(?) 이후, 유다 아나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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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570경, 이집트 |
국적 | 성서 |
요약
고대 근동 역사에서 중대한 시기에 발생한 종교 및 정치 사건들에 깊이 휘말렸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여, 유대인 동족들로 하여금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게 함락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는 등의 재난을 견뎌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BC 627(또는 626)년, 즉 요시아 왕 재위 13년에 예언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예언을 하라는 야훼(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그는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하고 거절했으나, 야훼는 자신의 말을 직접 그의 입에 넣어주고 그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는다는 보증을 해주었다.
고대 근동 역사에서 중대한 시기에 발생한 종교 및 정치 사건들에 깊이 휘말렸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여 동족들로 하여금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게 함락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는 등의 재난을 견뎌낼 수 있게 해주었다(바빌론 유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아나돗이라는 마을의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소년시절에 이스라엘 민족의 전승들 가운데 일부, 특히 호세아가 남긴 예언들을 배웠음이 분명하다.
그가 남긴 메시지의 첫 부분에는 호세아에게 영향을 받은 증거가 담겨 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는 고대 근동 전체가 격변기에 들어선 때였다. 2세기 동안 이 지역을 장악해오던 아시리아 제국이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걸어 마침내 수도 니느웨가 BC 612년에 바빌로니아인들과 메디아인들에게 함락되었다.
이집트는 제26대 왕조(BC 664~525)가 들어서면서 잠시 부흥했으나 제국을 세울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새로 강자로 떠오른 것은 유명한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를 배출한 칼데아 왕조가 다스리던 신바빌로니아 제국이었다. 약소국으로서 그 지역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던 유다는 아시리아 속국으로 있다가 아시리아가 몰락하자 짧은 기간 동안 독립을 주장했다. 그뒤 유다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결국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그는 BC 627(또는 626)년, 즉 요시아 왕 재위 13년에 예언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예언을 하라는 야훼(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그는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하고 거절했으나, 야훼는 자신의 말을 직접 그의 입에 넣어주고 그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는다는 보증을 해주었다. 몇몇 학자들은 예레미야가 이 명령을 받은 뒤 성전에 소속된 정식 예언자로 활동했다고 믿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제사장·예언자·성전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다(예루살렘 성전). 예레미야가 초기에 백성에게 전한 메시지는 거짓 예배와 사회적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을 비판한 뒤 회개하라고 외치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기가 본 환상들 가운데 하나인 북쪽에서 쏟아져내리려는 끓는 물을 상징으로 사용하여 북쪽에서 적군이 몰려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결과는 대멸망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적군을 BC 7세기에 서아시아에서 내려와 팔레스타인을 공격한 러시아 남부 유목민인 스키타이인들로 보아왔다.
북쪽의 적군이 메디아인, 아시리아인, 또는 칼데아인(바빌로니아인)이라고 본 학자들도 있다. 또 일부 학자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특정 민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희미한 종말론적 예언들이라고 해석했다.
BC 621년에 요시아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신명기〉 또는 그 일부로 보이는 책을 발견하고서, 그 책에 근거하여 폭넓은 개혁을 단행했다. 요시아가 단행한 개혁들 가운데는 예배에서 이교 의식들을 제거하고, 모든 제사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며, 과거에 예언자들이 가르친 원칙들에 근거하 여 사회 정의를 세우려는 것이었다(이 작업이 이른바 '〈신명기〉에 근거한 개혁들'임). 예레미야가 이 개혁에 대해서 취한 태도에는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는 개혁 내용 가운데 찬성할 만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예레미야〉 11장에서 그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고대의 계약조문을 지키도록 외치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는데 이것은 예언자가 예루살렘과 유다 마을들을 두루 다니면서 백성에게 개혁조치들을 따르라고 설득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백성의 정신과 윤리적 행위를 그대로 두고서 종교의 겉모양만 주로 다루는 개혁조치들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 셈이다.
그는 개혁이 본질을 빗겨가는 방향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고, 전에 적군이 북쪽에서 몰려온다고 한 예언을 실증하지 못하자 여러 해 동안 침묵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예레미야가 실제로 BC 627(또는 626)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활동했다는 것을 의심하며, 성서에 기록된 그 연대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견해가 생기는 이유는 후대의 바빌로니아인들을 가리키는 듯한 북쪽에서 오는 적군의 정체를 규명하기가 어렵고, 〈신명기〉에 근거한 개혁에 대해서 예레미야가 취한 태도를 납득할 수 없으며, 그의 메시지를 요시아 시대에 적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같은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은 예레미야가 요시아 시대말에 또는 여호야킴 시대(BC 609~598) 초기에 예언을 시작했다고 본다. 여호야킴 시대 초기에 예레미야는 유명한 '성전 설교'를 했다. 이 설교는 〈예레미야〉 두 곳에 남아 있는데, 7장 1~15절과 26장 1~24절이다. 그는 안정을 얻기 위해 성전에 의지하는 백성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윤리 개혁을 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만일 현상태로 가면 하느님이 과거에 실로에 있던 성막을 무너뜨렸듯이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뜨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곧 체포되어 대역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비록 풀려나긴 했으나, 성전에서 다시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것 같다. 예레미야의 생애에서 여호야킴 시대는 활동적이면서도 어려움을 많이 겪은 시기였다. 개혁자였던 선왕(先王) 요시아는 공의와 의를 실행함으로써 예레미야의 지지를 받았으나, 아들 여호야킴은 크게 달랐다.
예레미야는 이기심과 물욕으로 사회적 불의를 자행하던 여호야킴을 호되게 비판했다.
BC 605년 바빌로니아가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잔존 세력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킨 카르케미시 전투가 벌어질 무렵, 예레미야는 이집트에 반대하는 예언을 했다. 이 전투가 세계 판도를 크게 바꾸어놓게 될 것을 안 그는 서기인 바룩에게 이때를 내다보고서 전한 과거의 모든 메시지들을 두루마리에 받아적은 뒤 성전에 가서 낭독하게 했다.
이 두루마리는 곧 여호야킴 앞에서 다시 낭독되었는데, 왕은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불태워버렸다. 예레미야는 도피한 뒤 다른 내용을 덧붙여 두루마리를 또하나 받아쓰게 했다. 여호야킴이 바빌로니아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자(BC 601경), 예레미야는 유다 사람들에게 다시 경고하기를, 예전에 친구였던 사람들의 손에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여호야킴이 바빌로니아를 계속 배척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여호야킴은 성이 포위되기 전에 죽었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라 BC 597년 3월 16일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성을 내주고 수많은 백성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잡혀갔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자기들에게 우호적인 시드키야(BC 597~586 재위)를 유다 왕으로 앉혔다. 그는 여호야킴보다는 예레미야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으나, 약하고 줏대가 없어서 궁정은 친(親)바빌로니아파와 친이집트파로 갈렸다.
시드키야는 바빌로니아에게 10년간 조공을 바치다가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2번째로 예루살렘에 군대를 보냈고, 자신도 직접 따라와 BC 586년 8월에 그 성을 함락했다. 시드키야 재위초에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동족들에게 편지를 써서, 거짓 예언자들이 그들을 부추기면서 하는 말을 믿고서 곧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지 말고, 그곳에 평화롭게 정착하고 바빌로니아인들이 잘 되기를 바라라고 권고했다. BC 594년에 주변국들의 밀사들이 유다로 와서 힘을 모아 바빌로니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고 설득했을 때, 예레미야는 목에 멍에를 메고 돌아다니면서, 유다와 주변국들을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넘겨준 이는 야훼이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바빌로니아의 멍에를 메게 될 것이라고 외쳤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의 멍에를 메라고 일관되게 외쳤다(예레미야의 편지).
이집트군이 북상함에 따라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가 잠시 풀리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지파 땅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도피죄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그뒤 대신들은 그를 진흙구덩이에 빠뜨렸는데, 만일 에티오피아 출신의 내시인 에베드 멜레크(에벱 멜렉)가 왕에게 허락을 받아 그를 건져내어 덜 옹색한 장소에 가두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시드키야 왕은 예레미야를 감옥에서 2번 불러내어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마다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게 항복하라고 조언했다.
마침내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바빌로니아인들은 갇혀 있던 예레미야를 풀어주고 그를 안전하게 바빌로니아로 호송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예레미야는 동족과 함께 남는 쪽을 택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유력한 가문 출신인 유다 사람 게달리아를 유다 지방 총독으로 임명하고, 예레미야를 그에게 맡겼다.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제의를 계속 거절하고, 백성에게 밝고 즐거운 미래를 예언해 주었다. 게달리아가 암살된 뒤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일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이집트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에 가서도 동족인 포로들을 질책했다. 그는 BC 570년경에 죽은 것 같다. 성서 외의 자료에 보존되어 있는 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이집트에서 분개한 동족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예언
예레미야는 용감하고 끈기 있는 예언자로서, 자기가 받은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육체적 고통도 견뎌야 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는 또한 내적인 의심과 갈등도 겪었다. 이것은 그가 직접 한 말들, 특히 '예레미야의 고백'이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본문들에 잘 나타나 있다(예레 11:18~12:6, 15:10~21, 17:9~10, 17:14~18, 18:18~23, 20:7~12, 20:14~18). 이 본문들은 예레미야가 천성적인 성향과 야훼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야 한다는 깊은 소명의식 중간에서 심한 갈등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예민하고, 조심스럽고,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인 듯하다. 동족들의 일상적인 기쁨과 슬픔을 나누지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손에 붙잡힌 몸으로서 "저는……홀로 앉아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좌절한 때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거나, 도망쳐 사막에 나가 혼자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심지어 하느님을 "물이 마르다가도 흐르고, 흐르다가도 마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도랑"이라고까지 표현했고, 왜 자기를 속여 능력을 준다고 했느냐고 따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했습니다"라고 말한 때도 있었고, 야훼가 자기 편에 서서 싸우는 '두려운 전사'라고 말한 때도 있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당시 백성의 악함을 지적하면서 심판을 선언했다.
그릇되고 진실하지 못한 예배로 가득하고, 나라일을 도모하면서도 야훼를 의지하지 않는 것을 그는 눈여겨보았다. 그는 사회의 불의를 비판했으나, 아모스와 미가 같은 과거의 예언자들만큼 많이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는 죄의 근원을 유약하고 부패한 사람의 마음에서 찾았으며, 그 마음의 상태를 '악한 마음의 완고함'이라고 했다. 죄를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겼고, 유다가 야훼(참된 하느님)에 대해서 충성하는 것보다 이방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거짓 신)에게 훨씬 더 충성한다고 했으며, 자연이 그 법칙에 복종하는 것과 인간이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비교하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다른 어떤 예언자들보다 회개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악하게 살면서 우상을 섬겨오던 생활을 청산하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계약에 따라 야훼에게 충성하며 살라고 외쳤다. 그가 말한 회개는 윤리적인 색채가 강했는데, 회개는 개인과 국가에 바라는 야훼의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후반기 활동을 통해 동족들에게 닥친 절망과 씨름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자신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독특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던 희망을 생생히 표현했다. 그는 사촌에게서 고향 아나돗에 있는 밭을 샀다.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은전을 저울에 달아주고 매매계약서를 쓴 뒤에 말하기를, "이곳에 있는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팔고 사게 되리라고 이스라엘의 하느님,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셨다"라고 했다.
이를 포함한 다른 몇 가지 행동을 통해 그는 이스라엘이 본토에서 누리게 될 밝은 앞날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 예레미야가 앞날에 대해서 한 예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새 계약'에 관한 것이다(예레 31:31~34). '새 계약'에 관한 본문의 문학양식은 예레미야의 것이 아닌 듯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상만큼은 그의 것이다. 그는 야훼가 옛날 모세 시대에 맺은 계약을 이스라엘과 맺을 새 계약으로 대체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날이 오면 야훼는 율법을 돌판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직접 알고 죄사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새 계약'의 예언은 〈신약성서〉 시대에 대단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예언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인용되었으며,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말했다고 전해지는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라는 말씀의 배경이 된다(그리스도교).
예레미야는 때로 '개인적 종교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그의 시대 이전에도 종교적 개인주의가 있었고, 그 자신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 하느님께 선택되었다는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참된 종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나 할례 같은 신체적인 의식에 국한되지 않고, 각 개인이 하느님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데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개인 종교의 이상을 갖게 되었으며, 하느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극히 개인적인 방법으로 하느님과 씨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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