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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년에 에라스무스는 제자인 마운트조이 경 윌리엄 블런트의 초청으로 잉글랜드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그는 토머스 모어를 만나 평생 동안 변치 않은 우정을 맺었다. 에라스무스는 성서를 형식주의자들처럼 논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람들이 아직도 고전적인 수사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시대에 살았던 성 예로니모나 그밖의 그리스도교 교부들처럼 해석하는 '원시적 신학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가 영국에서 만난 존 콜릿은 그의 이런 야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열정적인 콜릿은 그에게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구약성서〉를 강의하라고 열심히 권했지만, 신중한 에라스무스는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고대 신학'을 연구하려면 그리스어에 숙달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고, 라틴어로 씌어진 바울로 서신을 들고 유럽 대륙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의 아르투아를 방문했을 때(1501) 에라스무스는 열렬한 설교자인 장 부아리에를 만났다.
부아리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사였지만, '수도원 생활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보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생활'이라고 에라스무스에게 말했다. 숭배자들은 부아리에의 제자들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 마지막 종교의식이 주는 신성한 위안을 얻지 않고도 하느님을 믿고 얼마나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는가를 자세히 이야기했다. 부아리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교부인 오리게네스의 저서를 에라스무스에게 빌려주었다.
그리스 출신의 오리게네스는 플라톤 철학에 뿌리를 둔 우의적이고 정신적인 성서 해석법을 주창한 사람이었다. 1502년에 에라스무스는 이미 루뱅(브라반트 주)이라는 대학 도시에 정착하여 오리게네스와 바울로의 저서를 그리스어로 읽고 있었다. 그 노력의 결실이 바로 〈그리스도교 병사의 필독서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1503/04)였다.
이 저서에서 에라스무스는 '고대인'들이 좋아한 정신적 해석을 이용하여 성서를 도덕적 관심사에 적합하게 만드는 한편, 성서를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뼛속 깊이 주입하라'고 독자들에게 촉구했다. 〈필독서〉는 '수도원 생활은 경건하지 않다'고 단언했다는 점에서 평신도의 경건함을 밝힌 선언문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루뱅 근처의 파르크 수도원에서 그리스 〈신약성서〉에 관한 로렌초 발라의 〈주해집 Adnotationes〉 필사본을 발견했는데, 이 발견을 통하여 그는 '원시적 신학자'로서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을 더욱 면밀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1505년에 콜릿에게 바치는 헌사와 함께 이 책을 출판했다.
에라스무스는 연구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 1505년에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그러나 원하던 지원은 받지 못하고, 나중에 헨리 8세의 주치의가 된 의사의 아들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이탈리아로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이탈리아는 북유럽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이었다.
일행은 대학 도시 볼로냐에 도착하여, 때마침 군인 교황인 율리우스 2세가 정복군의 선두에 서서 볼로냐에 의기양양하게 입성(1506)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장면은 나중에 에라스무스가 익명으로 발표한 대화체 풍자문학인 〈Julius exclusus e coelis〉(1513~14)에 등장한다. 베네치아에서 에라스무스는 이름난 출판사인 '알두스마누티우스'의 환영을 받았다. 이 출판사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로 망명한 사람들이 수많은 학자들의 지적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와 로마의 격언들을 모아 주석을 붙인 알두스판 〈격언집〉을 3,000개 항목이 넘는 분량으로 증보하여, 지식의 금자탑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처음으로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바로 이 책이었다. '네덜란드의 귀'라는 격언은 그가 기교에 치우친 이탈리아를 무비판적으로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암시 가운데 하나이다.
이탈리아의 설교는 지나치게 연극적이었고, 이탈리아 학자들은 영혼의 불멸성을 의심했다. 에라스무스의 목표는 정직하고 겸손한 '네덜란드의 귀들'을 쓰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썼지만 1529년에 출판한 〈소년 교육론 De pueris instituendis〉은 교육의 힘에 대한 확신을 가장 분명하게 주장한 글이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면 하찮은 욕망은 억제하고, 평화를 사랑하거나 사교적인 기질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인간의 본성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에라스무스는 글 자체가 그 사람이라고 믿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고전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시대의 '인문학'은 인간 정신에 유익한 영향을 주는 반면, 형식에 치우친 이론의 나열은 논쟁적인 기질을 유발하고 '어리석고 폭군적인 아서 왕의 우화' 등과 같은 기사문학은 젊은 귀족들에게 복수심과 방탕함을 가르친다고 믿었다. 유명한 〈우신 예찬 Moriae encomium〉은 에라스무스가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길에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구상하여 토머스 모어의 집에서 집필한 책인데, 이 책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진지한 학자 에라스무스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만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도 보편적인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 풍자에서는 어리석은 정열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현명한 사람조차도 자식을 낳고 싶으면 바보 짓을 해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오랫동안(1509~14) 잉글랜드에 머물렀지만,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그리스어 〈신약성서〉 작업을 비롯한 학구적인 일에 종사했다는 것말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나중에 그가 자기 견해를 기꺼이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콜릿의 용기를 배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콜릿은 헨리 8세가 전쟁을 추구하고 있을 때, 왕의 노여움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궁정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유럽 대륙으로 돌아오자, 요한 프로벤 출판사와 관계를 맺고 〈격언집〉 개정판(1515)을 준비하기 위해 스위스 바젤로 갔다. 이 책뿐만 아니라 같은 무렵에 쓴 다른 저서에서도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죄악, 즉 호전적인 야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리스도보다는 카이사르를 흉내내는 교황들, 개인의 사소한 원한을 갚기 위해 나라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군주들, 군주들의 전쟁이 정당하다고 선언하거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미신적인 의식을 가르침으로써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설교사들을 비판하는 데 새로운 대담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죄악을 없애기 위해 에라스무스는 교육에 기대를 걸었다. 특히 설교사들의 훈련은 형식에 치우친 학구적 방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철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주석을 붙인 주석본과 자신이 편집한 성 예로니모의 〈저작선집 Opera omnia〉으로 본보기를 보이려고 애썼다(성서 번역). 이 2권의 책은 1516년에 프로벤 출판사에서 나왔다.
이 무렵 에라스무스는 '다시 젊어지는 세계'를 보았다고 생각했고, 그의 낙관론은 〈신약성서〉에 붙인 서문의 하나에 여실히 표현되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복음서를 정확히 충실하게 설교하면, 그리스도교도는 많은 전쟁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이제 브라반트를 본거지로 삼았다. 이곳 브뤼셀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네덜란드 궁정이 있었고, 그는 총리인 장 소바주를 비롯하여 궁정에 유력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있었다. 그는 소바주를 통하여 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된 16세의 카를 대공을 보좌하는 명예 고문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리스도교 군주 교육론 Institutio pirncipis Christiani〉(1516)·〈평화에 대한 호소 Querela pacis〉(1517)를 써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저서들은 에라스무스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지만, 프랑스와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소바주의 파벌에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다. 에라스무스가 〈신약성서〉를 의역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신약성서〉의 각 편은 군주나 교회 수장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루뱅 근처에서 신학 교수단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라틴어와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를 가르치기 위해 갓 설립된 트릴링구알 칼리지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진정한 신학방법 Ratio verae theologiae〉(1518)은 언어 공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신학교육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의 그리스어 〈신약성서〉는 초판이 나오자마자 많은 주석을 비롯해서 여러 부분이 수정되기 시작했다. 에라스무스는 원문 비평가로서는 분명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학문의 역사에 우뚝 솟아 있는 비범한 인물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가 죽은 지 150년이 지날 때까지도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은 문헌학적 원칙을 그는 직감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루뱅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보수적 신학자들(이들은 대부분 그리스어를 알지 못했음)은 돌연히 나타난 이 아니꼬운 '문법학자'에게 성서 해석을 맡기기를 꺼려했고, 에라스무스가 〈신약성서〉 재판(1519)에서 성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을 그 자신의 라틴어 번역으로 바꾸었을 때도 루뱅의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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