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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와 프로테스탄트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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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점화제가 되어 중대한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다(종교개혁). 이런 사건들이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에라스무스를 싫어하는 성직자들은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루터를 숭배하는 일부 독일인들도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암시한 것을 대담하게 선언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루터가 에라스무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1516)는 바울로의 해석을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중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었고, 1518년에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주장과 루터의 주장이 혼동되지 않도록 루터의 저서를 더이상 출판하지 말라고 출판업자인 프로벤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글, 적어도 〈교회의 바빌론 유수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1520)보다 먼저 나온 글을 읽으면서 감탄할 만한 점을 많이 발견했고,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루터를 '복음서의 진리를 알리는 힘찬 나팔'로 묘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루터의 가장 큰 적은 언어 공부를 이단의 근원으로 보고 따라서 언어 공부와 이단을 한꺼번에 뿌리뽑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좋은 글'에는 파괴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는 대결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영향력의 가느다란 실에 의지했지만, 이 노력은 허사로 끝났다.

그가 1521년 12월에 브라반트 주를 떠나 바젤로 간 것은 루터를 비난하는 책을 써달라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요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직접 요청하면 그는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라는 에라스무스의 믿음은 근본적이었지만, 그가 가장 잘 아는 네덜란드인이나 브라반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적 박해의 잔인한 논리를 혐오했다. 그는 〈대화집〉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이 책은 원래 학생들의 대화체 작품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주석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믿음에 대한 질문'(1522)이라는 대화에서 가톨릭교도는 놀랍게도 루터 신봉자들이 믿음의 모든 교리, 즉 사도신경의 모든 항목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교황의 무류성이나 루터의 예정설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모든 신자들에게 구속력을 갖는 교리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단순한 견해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보기에 교회 분열의 근원은 신학이 아니라 성직자의 개입에 반대하는 반교권주의였고, 성직자들이 지옥의 고통을 무기로 삼아 의무적으로 지키도록 규정해놓은 율법과 '종교의식'에 대한 평신도들의 분노였다.

그가 루뱅에서 알게 된 네덜란드 출신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23 재위)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했듯이, 교회가 그 부담을 줄여주기만 하면 아직도 화해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평신도에게 양형성체를 허용하고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하면 화해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자유라는 매력적인 이름으로 모든 것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쓰고 있다.

하드리아노 6세의 뒤를 이어 클레멘스 7세가 즉위하자 에라스무스는 더이상 신학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원형 경기장으로 내려가기'를 피할 도리가 없었지만,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인 울리히 츠빙글리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루터를 공격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유의지론 De libero arbitrio〉(1524)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구원의 과정에서 맡는 역할을 옹호했고, 성서 해석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친 교회의 합의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 대답으로 루터는 그의 가장 중요한 신학저서 가운데 하나인 〈노예 의지론 De servo arbitrio〉(1525)을 썼다. 여기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2부로 이루어진 장황한 〈히페라스피스테스 Hyperaspistes〉(1526~27)로 응수했다.

노예 의지론(De servo arbitrio)

ⓒ Martin Luther/wikipedia | Public Domain

이 논쟁에서 에라스무스는 바울로나 성 아우구스티노가 허락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자유 의지를 요구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젤에서 지낸 기간은(1522~29) 논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일부 논쟁은 루터와 벌인 대토론에 비하면 약간 지루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을 되풀이 비난하는 정통파 가톨릭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복음서에 대한 배신자라고 부르는 프로테스탄트에게도 짜증이 난 나머지 옹졸한 성격을 자주 드러냈다.

그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쓴 글에는 학자들이 아직 이용하지 않은 자료도 들어 있지만, 대체로 그가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비평에서 더 뛰어난 솜씨를 보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아는 젊은 '가짜 복음주의자'가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복음서로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는 장면을 묘사한 대화체 작품은 그 좋은 보기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이 책은 통틀어 5가지 판으로 간행되었음)와 〈의역〉, 그리고 치프리아노와 힐라리오 및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글을 편집한 저서를 계속 펴냈다.

그는 또한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미신적' 열정 때문에 라틴어 산문을 비고전적인 용어로 더럽히기를 거부한 인문주의자들(이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인이었음)을 호되게 나무라는 데도 시간을 바쳤다(〈키케로파 Ciceronianus〉,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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