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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의 초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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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성직자인 로헤르 헤라르트와 의사의 딸인 마르가레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사생아였으며, 네덜란드 데벤테르에 있는 성 레부인 성당의 부속학교에 들어가 3학년까지 진급했다. 그의 스승이었던 얀 신텐과 교장 알렉산데르 헤기위스는 모두 인문주의자였다.

에라스무스는 학생시절에 고전 라틴어 시를 쓸 만큼 총명했는데, 근대의 독자들은 이 시를 통해 그가 세계시민주의자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부모가 죽은 뒤 에라스무스 형제의 후견인들은 '공동생활 형제단'이라는 단체가 운영하는 헤르토헨보스의 학교로 두 소년을 보냈다. 이 단체는 수도사를 육성하는 평신도들의 종교운동 단체였다. 에라스무스는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소년의 기백을 꺾는 가혹한 징계 때문에 이 학교를 기억하기도 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두 형제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에라스무스는 호우다 근처의 스테인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정규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 약 7년(1485~92) 동안 머물렀던 것 같다.

스테인에 있는 동안 순수 고전어법에 대한 해설이자 고전어법을 타락시킨 '야만인' 학자들을 비난하는 선언문인 로렌초 발라의 〈Elegantiae〉를 알기 쉽게 의역했다. 에라스무스의 수도원 선배들은 그의 고전 연구를 방해함으로써 그에게 '야만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직에 임명된(1492. 4) 뒤, 영향력있는 캉브레 주교인 베르겐의 앙리가 제의한 라틴어 비서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수도원을 벗어났다. 1494~95년의 개정판으로 남아 있는 그의 〈야만성에 반대하는 글 Antibarbarorum liber〉은 이교적인 고전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주장을 거듭 주장하고 그가 떠나온 수도원 생활을 혹평했으며, '건전한 학식은 모두 비종교적인 학식'이라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궁정 신하의 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캉브레 주교가 그를 파리대학에 보내 신학을 공부하게 했을 때(1495)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몽테귀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수도원과 비슷한 그 기숙사의 관리체계를 싫어했고 스코투스주의에 대한 강연을 들을 때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는 고전 연구에 도움을 얻기 위해 제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 시기(1497~1500)에 오래지 않아 유럽 전역의 인문주의 학교에서 쓰이게 된 우아한 라틴어 교재(〈대화집 Colloquia〉·〈격언집 Adagia〉을 포함)의 초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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