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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532년 스페인이 페루를 침입하기 전 수천 년 동안 남아메리카의 서부 고산지대와 해안사막 여러 곳에 왕국이 발달했다.
이 지역은 태평양 연안을 따라 수천km나 뻗어 있는 해안사막과 같은 방향으로 솟은 안데스 산맥이라는 지형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이들 대조적인 두 지역은 오랜 시기에 걸쳐 여러 차례 단일한 정치적 공동체로 통합되기도 했다.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지속성과 그 비범한 예술적·기술적 업적을 바탕으로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 지역 문명을 한데 묶어 안데스 문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이 들어오기 이전 잉카가 통치했던 이 지역은 오늘날의 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 등에 해당한다.
잉카 제국 이전의 시기
BC 15000년경부터 고원지대에 사람이 살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BC 3500년경에야 이 지역의 서부 해안과 고원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BC 2500년경부터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문명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어나고 여러 곳에서 안정된 정착생활이 이루어졌다. BC 2000년경 해안지대에는 100여 개의 부락이 있었으며, 주민은 전부 합쳐 약 5만 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BC 2100~1800년경 도기가 도입되어 문화적으로 진일보했다. 그러나 뜨거운 돌 위에 올려놓고 굽는 요리법이 여전히 계속되는 등 초기에는 일상생활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도기를 만들고 장식하는 방법이 발전하면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밖의 중요한 발전으로는 평직옷을 만드는 데 쓴 것으로 보이는 헤들 룸의 개발이었다. 이후 수천 년 동안 직조는 안데스 지역의 주요기술로 발전했다. BC 1800~AD 800년에 사회정치 질서가 발전하고 여러 부락이 도시로 통합되었다. AD 600년경 여러 계곡을 지배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중심지는 현재 페루의 도시 아야쿠초 근처에 있던 우아리였으며 우아리 문화가 남북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피지배지역의 문화양식이 일소되었다.
세력의 절정기에 이른 800년경 우아리 제국은 내부에서 붕괴되기 시작했고 우아리 시는 버려졌다. 약 1000년 이후 우아리 제국이 이루어놓았던 모든 통합의 표지들은 사라져버리고 스페인의 침입기까지 개별적인 왕국과 지역 문화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청동합금이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북서부에서 페루 해안으로 전해졌지만 기술상의 진보는 거의 없었다. 표준화와 대량제작의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도기제작기술은 질적 개선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잉카의 기원과 팽창
안데스 산맥 지역은 각 지역의 정치체들이 벌인 잦은 전쟁으로 분열된 상태에 있었으며, 이런 여건을 기반으로 잉카족이 세운 국가인 타완틴수유가 성립하게 되었다.
1532년경 잉카족은 지금의 에콰도르 북쪽 국경에서 아르헨티나 중서부와 칠레 중부의 마울레 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뉴욕에서 파나마 운하까지의 거리와 비슷함)을 지배하고 있었다. 해안과 고원을 통틀어 이들은 적어도 20여 가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1,200만 명 이상의 주민을 지배했으며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100여 개 부족을 정복했다.
1세기 전만 해도 잉카족은 쿠스코 계곡을 지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잉카의 기원과 초기 역사는 대부분 사실적이기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오늘날의 몇몇 안데스 부족들처럼 이들 역시 조상들이 땅에 난 구멍들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잉카의 기원지는 쿠스코 남쪽으로 24km쯤 되는 곳으로 짐작되는데 이곳에서 잉카 최초의 지도자였던 망코 카팍과 그의 3형제, 4명의 누이들이 동굴에서 나와 근처의 동굴에서 나온 10개 집단과 함께 얼마 동안인지는 모르지만 각처를 여행했다고 한다.
잉카족은 쿠스코 근처의 비옥한 땅에 정착하여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이웃 부족들에게 자유를 주는 대가로 조공을 바치게 했다. 잉카의 지도자들이 계속 바뀌고 이웃 부족들을 정복하여 땅이 몰수되었지만 피정복 부족사회에 수비대나 잉카의 관료가 파견되는 일은 없었다. 이들은 잉카족 스스로 다시 공격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될 때까지는 아무 간섭도 받지 않았다.
15세기초 비라코차 잉카는 이들 정복민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를 확립했고 남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1450년 이후 제국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수많은 부족의 유지와 통치에 관한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다. 당시 잉카의 지배자 파차쿠티 잉카 유판키는 쿠스코를 제국의 정치·종교 중심지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는 더욱 확장되었다.
동시에 쿠스코 하곡 상류 전체에 수로를 내고 땅을 고르게 하며 주변 언덕으로 계단식 논을 만드는 농업계획이 취해졌다. 이와 더불어 강제 재정착정책이 시행되었다. 이 정책은 적어도 잉카족의 관점에서 볼 때 국가에 충성하고 농업자원을 활용하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파차쿠티 잉카 유판키는 잉카 제국 이전부터 내려오던 창조신 숭배를 기초로 사제의 위계와 의식을 결합하여 국가종교를 주창하기도 했다(→ 색인:비라코차). 그는 잉카족이 이 신성한 종교를 다른 부족들에 전파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설파했는데, 이는 잉카 군대가 창조신의 이름으로 다른 부족을 정복하는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정복된 부족들은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종용받는 것이 아니라 잉카의 신을 경배하도록 요구받았을 뿐이었다.
1471년경 토파 잉카 유판키는 중앙 안데스 대부분을 정복했다.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내적으로 반목해오던 중 황제 우아이나 카팍이 적법한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채 1525년 죽자 내전에 가까운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제국 남부를 지배하던 우아스카르와 에콰도르 및 페루 북부의 여러 지역을 지배하던 아타우알파 등 경쟁자의 전쟁은 우아스카르의 패배로 끝났다. 우아스카르는 나중에 아타우알파의 명에 따라 살해되었다. 그동안 스페인인들이 1532년초 페루 북부 해안지대의 툼베스에 상륙했고 그해 11월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를 납치하여 처형해버렸다. 스페인인들은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양측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을 황제로 지명했으나 실제로는 우아스카르파의 지지를 받은 인물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몇 개월 만에 죽었으며 다시 우아스카르파의 지지를 받은 통치자가 즉위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새로운 황제가 대부분 아타우알파에게 여전히 충성을 바치고 있던 해안지대와 북부를 재지배하려 했으나 스페인인들이 적극 방해하면서 페루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본격적인 지배가 시작되었다. 잉카의 황제는 스페인 정착지를 공격했으나 패하여 결국 먼 산악지대로 쫓겨났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이 나라를 세웠으나 1572년 이 나라도 소멸했다.
스페인 정복기의 잉카 문명
잉카에는 유럽적 의미의 문자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곳끼리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색인:퀴푸). 구전(口傳)을 제외하고 연구결과를 기대해볼 만한 영역은 직물을 이용한 의사소통이다.
잉카의 도로체계는 매우 훌륭하다. 일부는 전(前) 잉카 시대에 처음 건설되었던 반면에 단일한 정치경제체제 속에서 도로가 유지되고 통합된 것은 잉카 제국 시기였다. 예를 들면 짐을 실은 라마 또는 운반인의 속도에 맞게 체계화된 여행단위가 고원지대의 왕도에 아직도 남아 있다. 잉카 종교에는 복잡한 의식, 기도, 애니미즘, 마력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대상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믿음, 자연숭배 등이 섞여 있다. 전잉카 시대의 종교적 관념과 행위들이 계속 영향을 미쳤지만 이들의 종교는 태양숭배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사제들은 모두 신전에서 살았으며 사제의 명칭은 점술가·마법사·고해자·치료자 등 자신들이 맡은 기능에 따라 정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쿠스코의 사제장은 귀족 출신으로 결혼이 허락되었고 모든 신전과 사제들 위에서 완벽한 권위를 누렸다. 중요한 일을 실행할 때는 반드시 점을 쳤다. 점은 병의 진단, 전쟁 결과에 대한 예측, 죄인의 추적 등에 쓰였다. 또 어떤 신에게 무슨 제물을 바쳐야 하는가를 결정할 때도 점을 쳤다(→ 색인:희생제의). 중요한 의식에는 언제나 동물이나 인간이 제물로 바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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